이어령이 김정운에게
20대 중반의 내 별명은 '파란만장 쪼대리'였다. '시트콤' 찍는 날도 많았고 평범하지 않은 일을 자주 겪어서였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그 뒤로도 이 십 년은 더 파란만장했다. 내게만 더 거센 것 같던 파도가 잠잠해진 게 얼마 되지 않았다.
ON 문장: 태풍치고 책 말리고 울고 이래야 '삶'인 거야.
유튜브에서 김정운 박사가 이어령 선생과의 일화를 이야기하는 영상을 보다가 아하! 하고 받아 적었다. 섬에 멋진 집을 지어 살고 있던 김정운 박사는 어느 날 태풍으로 인해 소중히 아끼던 책들이 다 젖어버려서 커다란 상실감에 빠져있었다. 그때 이어령 선생님이 해주신 말이 바로 '태풍 치고 책 말리고 울고 이래야 삶인 거야.'였다. '섬에서 행복하게 살았어요.'는 이야기가 될 수 없다고도 하셨다. 삶이 이야기가 될 수 있는 것은 그런 역경과 고난을 만나며 살았기 때문이란 뜻이다. 우리가 드라마나 영화, 소설에 몰입하는 순간도 주인공에게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이다. 늘 평온하고 행복한 주인공에게는 별 매력이 느껴지지 않지만 고난에 처한 주인공에게는 감정이입이 잘 된다. 우리는 마치 내가 주인공이 된 것 같이 슬퍼하다가 주인공이 다시 행복해지면 함께 안도한다. 그러니 인생은 내가 주인공인 드라마가 맞다. 내가 주인공인 재미난 드라마라서 이런저런 이야깃거리들이 생기는 거다. 왜 어르신들이 내가 살아온 얘기를 책으로 쓰면 몇 권일 거야라고 말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돌아보니 10대, 20대, 30대 그리고 지금의 40대를 겪으며 내게도 많은 이야기가 쌓였다. 그 경험치로 사람과 상황을 이해하는 폭도 넓어졌지만 글을 쓰려고 하는 내게는 자산이 되었다.
작사를 배우던 시절에 선생님이 그랬다. 작곡가들이 슬픈 발라드 신곡 가사가 필요하면 가장 최근에 이별한 작사가를 찾는다고. 슬픈 가사를 쓸 때는 처절하게 찢어지듯이 아프게 써야 한다고. 나는 그때 30대 초반이었고 이별은 한두 번 해본 게 다였다. 그마저도 '나를 좋아한대서 결국 내가 마음 열어 널 좋아했는데 내가 좋아하기 시작하니 넌 왜 날 안 좋아해?'의 마음이었다. 이제 날 안 좋아한다는 그 마음이 괘씸하고 납득이 안 갔던 게 내 첫 이별이었다. 짧았던 두 번째 사랑과 이별 역시 인생 최대 찌질남을 만났었기에 별 기억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억지 슬픔이라도 쥐어짜보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실제로 그만큼이 아니었는데 비련의 여주인공 마음으로 가사를 쓰려니 쉽지 않았다. 가사를 쓰기엔 이별 경험 강도가 약했다. 만약 그때 내가 평생 잊을 수 없는 러브스토리를 가진 사람이었다면 너무나도 안타깝게 이별한 사랑이었다면 좀 더 가사를 잘 뽑아낼 수 있지 않았을까?
'고수'라는 키워드로 이야기하는 프로그램을 보다가 이슬아 작가가 말한 '실패값'이란 단어가 내 귀에 쏙 들어왔다. '태풍 치고 책 말리고 울고 이러는 것'도 실패값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멋지게 잘 살고 싶었는데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인생의 변수들이 태풍처럼 파도처럼 자꾸 들이닥칠 때 '이제 난 망했어, 실패했어.'라고 생각되겠지만 대신 그 누구에게도 없는 '나만의 이야기'가 남는다. 그렇다면 '어떤 파도가 와도, 와라!' 하는 태도를 가진 사람이 고수가 아닐까? 어쩌면 내가 주인공인 삶에서 '고수'가 되는 게 인생일지 모른다.
만날 울며 겨자 먹기로 일하던 통역 일을 십 년쯤 했을 때 떨고 있지만 떠는 모습을 들키지 않았고 속으론 울고 싶었지만 겉으로는 웃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기까지 내게 얼마나 많은 태풍이 왔었고 내가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는 나만 아는 이야기다. 나에 대한 기대치가 낮을 때 나는 조용히 내공을 쌓는 사람이었다. 울면서도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울었지만 결국은 해낸 사람이었다. 그때의 나는 '이렇게 이렇게 하면 내가 할 수 있겠다.'라는 자기 믿음을 갖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과 아닌 것의 차이는 내게 큰 영향을 준다. 그래서 나는 어떤 일을 시작할 때 자기 믿음이 굉장히 중요한 사람이다.
요즘 내게는 '꾸준히 연습하면 나도 잘 쓸 수 있을 것이다.'라는 믿음이 생겼다. 그래서 이렇게 매일 브런치에 쓰고 있다.
앞으로는 살면서 '태풍 치고 책 말리고 울고'하는 날이 찾아오더라도 '내게 또 어떤 이야깃거리를 주려고 이러나'하고 생각해 보련다. '이것도 나중에 어딘가에 써야지.' 하는 마음으로 내 삶의 고수가 되어야겠다.
ON 문장: 태풍치고 책 말리고 울고 이래야 '삶'인 거야.
OWN 문장: 내가 주인공인 삶에서 '고수'가 되는 게 인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