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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착한별 Nov 10. 2024

순발력만 믿지 않기를!

진짜 실력 키우기


출처:Pixabay


어머니, Eric이요...

아이 영어 학원에서 화가 왔다. 내용을 듣자마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원장 선생님은 바로 전화를 안 하시고 지켜보다가 정 안 되겠으면 그때만 전화하신다고 했었다. 다닌 지 일 년 밖에 안되었는데 벌써 같은 내용의 전화가 네 번째다. 이제 초등학교 2학년인데 하고 넘길 문제가 아니었다. 수업 시간에는 재밌어하고 잘 따라오지만 숙제를 귀찮아하는 게 보이고, 자주 안 해오고, 다른 친구들 숙제 검사할 때 "지금 해도 되죠?" 하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자기만의 언어로 발표 준비해 오라고 했을 때도 다른 친구들은 미리 텍스트를 준비하고 외워오는데 우리 아이는 안 해오고  즉흥적으로 하면서 그 순간을 모면한다는 것이다. 물론 머리가 좋아 순발력으로 대처하는 거겠지만 그런 식으로 하면 자기 실력이 쌓이지 않는다, 같은 반 친구들은 숙제도 잘해오고 평소에 열심히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덧붙인 말은 "어머니, 저학년은 믿지 말고 직접 봐주셔야 해요."였다. 내가 처음부터 숙제 체크 안 했던 아니다. 자신이 알아서 하겠다고 자꾸 잔소리하지 말라고 자기 믿냐고 해서 1학년도 아니고 2학년인데 믿어보자 했던 거였다. 학원 숙제가 올라오는 밴드도 휴대폰에 깔아줬다. 무엇보다 분명히 나에게는 매번 했다고 했다. 믿어주고 싶었다.





아이 학원에서 온 전화를 받고 나서 한동안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녀석을 어떻게 마음먹고 숙제하게 하지가 아니라 '모습은 나인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도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그러지 않았다. 기억엔 중학교 때부터였던 같다. 시험 당일 날 학교에 걸어가면서 시험 범위를 두 번만 읽어도 몇 페이지 몇째 줄까지 세세하게 기억할 있는 능력이 내게 있다는 알게 되었다. 물론 기억력은 1시간 정도만 가능했다. 시험이 끝나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리고 수업 시간에 들은 것들은 이해가 다 돼서 대답도 잘했다. 그러니 선생님도 친구들도 다 내가 공부 잘하는 아이라고 여겼다. 사실 중학교 때까지는 수업시간에 들은 걸로, 시험 직전에 본 것으로 공부 제법하는 아이에 속했다.  


아이는 숙제 안 했어도 순간집중력으로 금방 해낼 수 있는 자신을 알게 된 거다. 다급하면 아이디어도 생각나서 금세 할 수 있다는 걸 이미 경험으로 알았던 거다. 그래서 숙제를 안 하는 거였다.  순간적으로 집중해서 자기 능력의 최대치를 끌어내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만 믿고 살다가는 진짜 자기 실력이 드러나는 때가 오기 때문이다.  내가 그랬다.





학교에서 안 배웠니?



러시아어 인하우스 통역사 시절에 나는 학창 시절에 성실하게 공부하지 않았던 것을 호되게 되돌려 받았다. 가는 회사마다 기술 통역을 해야 했는데 수학은 고등학교 이후로 아예 손을 놓았던 사람이고 물리, 화학도 제대로 공부한 적이 없으니 머리에 남아있는 게 있을 리가 없었다. 수능도 관심 있는 언어, 외국어 영역만 풀고 나머지는 다 찍었던 나였다. 외어를 전공했지만 사회에서 나가서 통역해야 하는  내가 공부 안 했던 것들과 연결된 것들이었다. 막막했다. 나와 함께 일했던 러시아인 수석님들은 기계, 물리, 화학 전공자들이었다. 내게 무언가를 설명할 때마다 개념을 모르는 나를 보면서 "학교 다닐 때 안 배웠니?"라는 말까지 다. 굴욕이었다.


필요한 건 절박함


회사가 학교와 다른 점은 내가 하기 싫다고 안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내가 모르는 말들을 알아듣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통역을 해야 하니 생존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공부를 해야 했다. 모르는 것들을 찾아서 이해하고  러시아어로 익혀서 내 것으로 만들어갔다. 인생은 참 아이러니하다. 하기 싫다고 피했더니 결국 그걸 공부해야 하는 상황이 아왔다. 시작은 소소한 기술 이전 번역이었는데 나중에는 배터리, 청소기, 세탁기, TV, 휴대폰에 심지어 반도체까지 통역해야 하는 날이 왔다. 대학 교재까지 사서 공부하며 단어를 싹 다 정리다. 정말 내가 고등학교 때 이렇게 공부했으면 서울대를 가고도 남았지라는 생각이 안 들 수가 없었다. 피할  수 없는 박한 순간이 되어서야 '진짜 공부'했다. 통역을 해야 해서 시작한 공부였지만 그 공부에서 재미를 알게 되었다. 삼십 대가 돼서야 '공부의 맛'처음 알았다. 그리고 그때  한 번 진하게 공부한 경험은 그 이후에 다른 공부를 할 때도 그 태도를 유지하게 했다.



차곡차곡의 힘


다른 사람보다 센스와 순발력이 있다는 건 물론 강점이지만 그게 더 빛나려면 기본기가 탄탄해야 한다. 의 기본기가 충분한지 아닌지는 스스로가 가장 잘 안다. 그래서 나는 러시아어 통역사 시절에 잘한다는 칭찬을 들은 날에도 마음 놓고 기뻐할 질 못했다. 뭐가 부족한지 스스로 잘 알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림책 분야를 5년 공부했지만 그림책에 대해 많이 아시네요라고 누군가 말해도 나는 스스로를 인정하지 않는다. 내가 아직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이는 엄마따라쟁이다. 내가 기본을 차곡차곡 쌓는 모습을, 착실하게 한 분야를 공부하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따라올 거라고 믿는다. 무엇보다 납기가 있는 것들을 제 때 해내는 모습을 보여줘야겠다. 나보다는 '공부의 맛'을 일찍 알았으면 좋겠다.



잔이 넘치는 건 마지막 한 방울
그전엔 모르죠.
내 꿈도 조용히 채워지고 있죠.


송정미의 <한걸음 한걸음>이라는 노래를 좋아한다. 작가의 꿈을 갖고 있는 의 잔은 지금 얼마만큼 채워져 있을까? 마지막 한 방울이 언제일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은 많이 읽고 많이 써야 할 때인 건 알겠다. 내 꿈도 조용히 채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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