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에 '리즈 시절' 있었듯, 한국 e스포츠에 '온게임넷 시절' 있었다
초등학교 때 일요일 아침마다 교회를 다녔다. 그 시간에 온게임넷이나 MBC게임 같은 게임 방송국에서는 스타크래프트 경기 재방송을 하고는 했다. 지금은 방송인이 된 임요환이나 홍진호, 기욤 패트리 등이 한창 프로게이머로서 현역으로 활약하던 경기가 텔레비전으로 중계되던 시절이었다. 당시 스타크래프트 게임에 푹 빠졌던 나는 아침에 교회를 갈 때마다 어머니한테 비디오테이프로 게임 방송을 녹화해 달라고 부탁하곤 했다.
처음에 어머니는 그래도 아들을 좋게 봐주셨는지 한두 번은 녹화를 해 주셨다. 그러면 점심 무렵 교회에서 돌아와 녹화해둔 방송을 멍하니 지켜봤다. 그러다 내 부탁이 계속되자 어머니는 너 게임 중독 아니냐, 왜 이렇게 게임 녹화를 해 달라 그러냐며 녹화를 거절하셨다. 어머니를 조르고 졸랐지만 아들의 게임 중독(?)을 걱정하신 어머니는 안 된다는 말만 반복하셨다.
당시 내가 TV를 자유롭게 볼 수 있는 시간은 주말 이른 아침이나 이른 오후 정도였다. 나머지 시간은 부모님에게 리모컨이 가 있었다. 이른 아침에 스타크래프트 재방송을 해 줬는데 동생의 꼬드김으로 교회를 다니면서 이 시간엔 TV를 볼 수 없게 됐다. 이른 오후에는 온게임넷과 MBC게임에서 스타크래프트 방송을 안 해준 것으로 기억한다. 어린 마음에 스타크래프트를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비디오 녹화까지 부탁했나 싶다. 비록 어머니 때문에 몇 번 한 걸로 끝나긴 했지만...
온게임넷, 그리고 OGN에 대한 나의 기억은 이처럼 스타크래프트와 관련된 어린 시절의 일화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온게임넷이 OGN으로 이름을 바꾼 지도 벌써 6년째지만 아직도 OGN보다 온게임넷이라는 이름이 더 익숙할 정도다. 나는 그 이후에도 꾸준히 스타크래프트 리그에 관심을 가져왔지만 중·고등학교로 갈수록 공부하느라 바빠졌고 임요환, 홍진호 같은 선수들의 전성기도 지나면서 관심도는 점점 낮아졌다. 그러다 보니 2010년 승부조작 사건이 터지면서 e스포츠 업계가 발칵 뒤집어졌을 때도 아주 큰 충격을 받진 않았다. 이미 관심에서 상대적으로 멀어진 지 꽤 됐기 때문에...
그리고 10년 넘게 지난 지금 나는 다시 OGN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 OGN의 폐국설이 게임업계 전반에 돌았기 때문이다. 야심차게 온게임넷에서 OGN으로 사명을 바꿨지만, 창립 20주년을 거치면서 사실상 폐국 직전에 이르게 됐다고 한다. 2000년대 온게임넷의 영광을 생생히 기억했던 내게는 격세지감이었다.
어쩌다 보니 지난 2월 초 OGN이 운영하는 경기장을 갈 일이 있었다. 여러 게임 커뮤니티에서 OGN의 e스포츠 경기장인 서울 OGN e스타디움이 폐쇄 수순을 밟고 있다는 정황 증거를 담은 사진이 돌았다.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어 무작정 그곳으로 가 봤다.
서울 OGN e스타디움은 지난 2016년부터 OGN이 운영하던 e스포츠 전용 경기장이다. e스포츠에 최근부터 다시 관심을 가지게 된 나는 이번에 처음 가 봤다. 그러고 보면 e스포츠 경기장을 방문한 것도 초등학교, 중학교 때 시절 얘기다. 당시 온게임넷과 MBC게임은 모두 코엑스에 게임 스튜디오를 두고 있었는데 온게임넷의 메가스튜디오와 MBC게임의 세중게임월드를 모두 한 번씩은 간 적이 있었다. 요즘 e스포츠 전용 경기장에 비하면 규모는 매우 작긴 했지만 관중들의 뜨거운 열기만큼은 결코 뒤처지지 않았던 것 같다.
십여 년 만의 e스포츠 경기장 방문이었지만 활성화된 곳이 아닌 폐쇄 직전인 곳을 방문하는 거라 설렘보다는 무거운 마음이 더 컸다. 기왕이면 정말 이곳에 스타크래프트든 배틀그라운드든 경기를 보러 다시 방문하고 싶었는데 말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경기장이 있는 서울 에스플렉스센터 15층으로 올라갔다. 사진에 나온 그대로였다. 경기장 복도의 불이 다 꺼져 있고 그간 전시돼 있던 각종 트로피들은 사진에 나온 대로 다 치워졌다. 경기장 안으로는 문이 잠겨 들어갈 수 없었다. 경기장 시설은 15층부터 18층까지 있는데, 모든 층이 다 같은 분위기였다. 불은 다 꺼졌고, 각종 조형물들은 치워졌거나 곧 철거할 예정인 것처럼 제자리가 아닌 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코로나19 때문에 모든 e스포츠 경기장의 오프라인 경기가 중단된 상황이다. 그래도 운영 중인 경기장이라면 당장 경기장의 불은 꺼졌더라도 바로 개장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늘 갖춰놔야 하는데, 이곳은 언젠가는 문을 열 것이라는 기대감보다는 언젠가는 문을 완전히 닫을 것 같다는 느낌이 더 컸다. OGN이 처한 어려운 상황이 확 와닿았다.
그래도 최소한의 관리는 이뤄지는 모양인지 청소부 아주머니가 빈 경기장 복도 곳곳을 걸레질하고 있었다. 경기장을 관리하는 직원도 간간이 보였다. 이분들에게 몇 가지 물어보니 이미 작년 12월부터 각종 기자재를 빼는 작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OGN 사무실도 이 무렵부터 짐을 빼면서 철수 수순을 밟았고 이 과정에서 OGN의 각종 방송 시설들도 빠진 모양이었다. 경기장 자체를 철거하는 단계까지는 아니지만 순차적으로 철수 절차를 밟는다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조짐은 있었다. 이미 지난해 말부터 OGN의 자체 제작 프로그램은 급속히 줄고 있었다. 12월 말에 이르러서는 편성표 전부가 재방송으로만 구성되기도 했다. 이에 모 매체에서 폐국설이 보도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방송 송출은 되고 있어 아직 폐국은 아니지만 e스포츠 사업에서 발을 빼면서 자체 편성 능력을 잃은 것은 맞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방송 한두 개를 제외하면 전부 재방송만으로 구성됐고 그나마 본방송이라고 방영되는 것들도 타 플랫폼에서 이미 중계됐던 걸 재방송하는 형태다. 더 이상 온갖 e스포츠 경기를 활발히 중계하던 그 시절 '온게임넷'이 아닌 것이다.
어렸을 적 온게임넷 경기장을 방문했을 때 이곳에서 임요환 같은 선수들이 실제로 경기를 하는구나, 라며 신기하게 곳곳을 둘러봤던 기억이 생생하다. 당연히 스타크래프트 때문에 온게임넷도 꾸준히 챙겨봤다. 그때만 해도 온게임넷이 설마 없어질 거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못했는데...
시대가 달라지긴 달라졌나 보다. 이제 TV 게임 방송국이 아니더라도 게임 중계를 보거나 게임 콘텐츠를 접할 곳은 많아졌고 그런 변화 속에서 OGN은 지속 가능한 생존을 위한 답을 못 찾은 것 같았다. OGN을 그리워하는 사람들도 대부분 과거, 그 시절의 온게임넷 얘기를 하는 경우가 많다. 말 그대로 e스포츠 버전의 '리즈 시절'인 것이다. 그나마 리즈 유나이티드는 다시 프리미어리그 승격이라도 했지, OGN은 정말로 흔적만 남기고 사라질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OGN이 쓰고 있는 경기장은 원래 명칭이 '서울 e스타디움'으로, 서울시와 문화체육관광부가 소유주다. OGN의 운영 기간은 올해 말까지로 계약됐는데, 이변이 없는 한 계약 연장은 안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내년 이후 서울 e스타디움의 향방이 어떻게 될지도 미지수다. 제대로 된 e스포츠 경기장으로서의 역할을 하려면 게임사 혹은 e스포츠 관련 업체에서 다시 이곳을 운영해야 하는데 아직까지 서울시가 딱히 이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를 하는 것 같지는 않다.
앞으로 어떻게 이 경기장이 쓰일지는 차차 논의가 될 것이고 어떤 식으로든 답이 나올 테다. 다만 앞으로 OGN, 그리고 온게임넷이라는 이름이 e스포츠와 게임판에서 점점 희미해질 가능성이 크다는 걸 생각하면, 확실히 한 시대가 변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이제 막 e스포츠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나이 어린 친구들은 OGN보다는 아프리카TV에 대한 기억이 훨씬 더 클 것이다. 최고 인기 대회인 리그 오브 레전드 리그의 경우 라이엇게임즈에서 직접 방송하고 있다. OGN이 언급될 일은 앞으로 더욱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
국내 e스포츠 시장은 리그 오브 레전드를 중심으로 점점 커지고 있다. 앞으로의 성장 전망도 밝다. 그곳에서 OGN이 빠질 수밖에 없는 현재 상황이 한편으로는 참 안타깝다. 그러고 보면 한때 온게임넷과 게임 방송국의 양대 축이었던 MBC게임도 2012년 MBC뮤직으로 바뀌면서 폐국됐다. 뭐 OGN은 그나마 오래 버텼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2000년대만 해도 두 방송사 모두 앞날이 밝을 것만 같았다는 걸 생각하면 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련함이 든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그래도 OGN이 약 20년 동안 한국 e스포츠 시장에서 한 역할을 생각하면 결코 OGN의 역할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나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재미를 선사해 준 고마운 방송국이라는 사실은 설사 OGN이 정말 폐국하더라도 달라지지 않을 테다. 아직 완전히 "굿바이"라고 말하기는 조금 이르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