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이야 아무것이나 쓰면 되지 하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되시는 분들은 정말 아무것이나 쓰셔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플래너 전용 펜을 하나 마련해 두는 편입니다. 그 펜을 들었을 때 '플래너를 작성해야지' 하는 물리적인 트리거를 만들고 싶었고, 가장 간단하고 유용한 방식으로 휴대하고 싶었습니다. 그중 저는 2가지 이상의 컬러가 포함된 멀티 펜을 추천합니다. 대형 문구점에 가 보시면 아시겠지만 엄청나게 많은 멀티펜이 있습니다. 1~2천 원 정도로 살 수 있는 저렴한 국산 멀티펜도 있고 십만 원이 넘는 수입제품도 있습니다. 심지어 쓰고 싶은 컬러를 바라보며 노크를 누르면 그 색상의 심이 나오는 중력 멀티펜도 있습니다. 이렇게 다양하게 나와있는 제품들을 비교해 보고 고르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저는 플래너의 효율적인 작성 차원에서 체크해야 할 점 몇 가지만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파란펜과 빨간펜을 주로 사용합니다. 용도에 따라 아주 단순하게 구분하고 있는데 파란색은 계획, 빨간색은 결과입니다. 검은색 대신 파란색을 계획에 사용하는 이유는 대부분의 플래너들이 흑색으로 인쇄되어 있기에 검은색으로 필기하는 것보다는 파란색의 필기가 시인성이 좋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부분은 개인 취향에 따라 다를 수 있으니 좋아하는 컬러를 선택하되 '계획'과 '결과' 두 가지의 기록은 확연히 구분되는 것을 고르는 것을 추천합니다. 이렇게 구분해서 사용하면 계획을 어떻게 세웠고 그것을 잘 이행했는지, 어떤 변경이 있었는지 한눈에 비교하여 보기 좋습니다. 지난 한 주를 돌아보며 나는 어떤 것을 하려고 '마음먹었고', 어떻게 '실행했는지' 색깔로 구분되는 것이죠. 초창기에는 두 자루의 펜을 모두 들고 다니면서 플래너를 작성했는데 계획과 결과를 교차해서 기록할 때 상당한 불편함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결국 빨간색 심과 파란색 심이 포함된 멀티펜 한 자루만 들고 다니며 아주 간편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펜 심의 성분에 따라 유성/중성/수성 펜이 있습니다. 잘 번지고 공기 중에 휘발하며 수명도 짧은 수성은 근래에는 잘 사용되지 않기 때문에 유성펜과 중성펜만 비교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유성은 흔히 말하는 '볼펜'입니다. 기름 섞인 끈적한 잉크가 펜 끝에 달린 볼이 구르며 묻어 나오는 방식입니다. 필기감이 부드럽고 심의 수명이 중성펜 대비 월등히 긴 편입니다. 펜 끝이 잘 마를 일이 없어서 오래 사용하지 않다가도 문제없이 쓸 수 있지만 찐득한 펜의 잉크 속성으로 인해 간혹 '볼펜 똥'이 생기기도 합니다. (고가의 펜인 경우 좀 덜하긴 합니다.) 중성펜은 우리에게 '젤 펜'으로 더 익숙합니다. 수성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고분자 물질인 젤 타입의 용제가 섞여서 채워져 있습니다. 유성펜 대비 필기가 완료된 글자가 굉장히 선명하고 명확하게 보이는 장점이 있는 반면 필기 시의 부드러움은 조금 덜 하고 상대적으로 리필 심의 수명이 짧습니다. 저는 필기 후의 글자가 깔끔해 보이는 중성 멀티펜을 오랫동안 사용하다가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잉크에 대비해 늘 여분의 리필을 준비해야 하는 단점이 있어 최근에 유성 멀티펜으로 교체해 사용 중입니다. 각각 장단점이 명확하니 직접 써보시고 취향 따라 골라보시길 바랍니다.
To-Do 관리는 이월과의 싸움입니다. 오늘의 일을 내일로 미루게 되면 그만큼 전체적인 스케줄링이 늦어집니다. 거기에 이월에 이월이 겹치면 마치 스노우 볼 이펙트처럼 시간 지연이 복리로 붙습니다. To-Do에 적혀 있는 일이 중요한 일일수록 거기에 쓰여있지 않은 일들이 너무나 재밌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청개구리 본성인 것 같기도 합니다. 이 부분을 조금 더 강력하게 챙기고 싶다면 형광펜을 하나 준비해 두시는 것이 좋습니다. 굳이 소지하고 다닐 필요는 없습니다. 집에 비치해 두시고 플래너를 작성하는 시간에 이월할 항목을 표시해 두는 용도로 사용합니다. 결과를 표기하는 빨간펜으로도 이월을 체크하지만 좀 더 강력하게 표기하고 관리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입니다. 자세한 사용법은 작성 가이드 챕터에서 안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단, 사용하는 펜의 종류에 따라 형광펜에 의해 번짐이 발생할 수 있으니 기록용 펜과 형광펜 간의 궁합을 미리 맞춰 보시고 구매하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필통을 갖고 다니지 않는 분이라면 플래너와 펜을 한 세트로 만들어두는 것이 좋습니다. 플래너 챙기기도 벅찬데 굴러다니기 딱 좋은 펜까지 챙겨 나오려면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닙니다. 플래너를 챙기는 일은 간단할수록 가벼울수록 좋습니다. 간혹 귀찮다고 동일한 펜을 두 자루 구매해서 집과 회사에 하나씩 두는 분들도 계신데, 그런 경우 집이나 회사가 아닌 곳에서 작성할 때 난감합니다. 인터넷에 '펜 홀더'로 검색하면 밴드 혹은 가죽으로 되어있는 다양한 종류의 펜 폴더가 있습니다. 고무줄로 고정시키거나 접착테이프로 플래너에 붙이는 것들이죠. 아니면 아예 플래너 자체에 펜을 보관할 수 있는 밴드가 부착되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떠한 방식이든 플래너와 펜은 항상 한 쌍으로 다닐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마련해 두시기를 권장합니다.
앞서 소개해드린 대로 맘에 드는 필기구를 정하셨다면 플래너 종이와의 궁합을 반드시 테스트해봐야 합니다. 특히나 만년필이나 액상형 형광펜을 쓰시려는 분이라면 꼭 거쳐야 하는 과정인데 출시되는 플래너들의 종이 질은 제각각이므로 필기 시 뒷면에 비침 현상이 없는지 반드시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이번 주에 신나게 기록한 내용일지라도 전주나 다음 주에 영향을 주면 곤란합니다. 자칫 필기 자체의 욕구가 떨어질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대형 서점에 방문하시면 대부분의 제조사에서 테스트용 다이어리와 펜을 배치해둡니다. 직원에게 비침 테스트를 하고 싶다고 양해를 구하시면 플래너, 펜 둘 다 구매하지 않고도 충분히 테스트가 가능합니다. 만년필을 꼭 사용하셔야 한다면 평량이 좀 있는 종이를 사용하는 다이어리를 골라야 하고 형광펜의 경우 청색, 적색 계열보다는 노란 쪽이 좀 덜 비치며 액상형이 아닌 색연필처럼 색이 칠해지는 재질을 골라보시는 것도 좋습니다.
이렇게 시간 관리를 위한 장비를 살펴봤습니다. 조금 까탈스럽게 보는 면이 없지 않지만 플래너의 경우 한 번의 선택이 1년의 사용성을 결정짓는 요소이기에 좀 더 세심하게 골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불필요한 2차 지출도 막을 수 있고요. 하지만 이 또한 정답이 아니며 그냥 '잡히는' 것으로 쓰셔도 괜찮습니다. 누구나 쓰다 보면 자기만의 노하우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어렵고 까다롭게 도구를 고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시간을 관리한다는 것' 그 자체에 있는 것이니까요. 제가 가이드 해 드린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준비가 되셨다면 기쁘고 설레는 마음으로 다음 챕터로 출발해 보겠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우리가 우리의 시간을 관리해 볼 차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