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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주현 May 29. 2018

나들이 스케치

여행중, 사진보다 스케치를 고집하는 이유

최근 나들이 다녀오신 적 있으신가요?  


바쁜 일상을 접어두고 떠날 때면, '왜 진작 나오지 않았을까' 몸은 고되지만 마음은 한결 여유롭죠. 잊기 싫은 경치에 닿을때면 스마트폰을 꺼내 풍경을 찍기도 하구요. '나 여기왔다!’ 를 보여주기 위해 인증샷을 찍기도 해요. 무거운 고성능 카메라가 전혀 필요 없는 세상이에요. 


저는 나들이를 떠날때면, 스마트폰은 잠시 가방에 봉인하고 작은 스케치북과 간단한 그림도구만 들고 떠납니다. 사진을 찍는 대신 그림을 그리는 거죠. 대단한 작품은 아니더라도 인상 깊은 모습을 슥슥 종이에 옮깁니다. 여행 후 남는 것은 사진 한두장, 완성된 그림도 한두장 뿐 이지만 사진보다 스케치를 고집하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동백섬 끝자락 모습, 부산여행




첫번째는 기억의 온전한 보관입니다. 


여행지에서 많은 사진을 찍지만 애석하게도 그 사진들의 대부분은 잊혀졌다가 언젠가 핸드폰을 바꿀때, 누군가의 실수 등 다양한 이유로 사라집니다. 찍은 사진을 시간이 지나서 꼼꼼히 꺼내 보는 일은 어마어마하게 부지런한 사람만이 하는 것 같아요 아마도 이런 현상은 사진찍기가 굉장히 간편하고 장수의 제한도 거의 없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한 장 한 장 필름을 소비하고 돈을 지불하며 현상을 해야했던 과거의 사진과 달리 피사체를 빠르게 지나치면서도 찰칵찰칵을 할 수 있게 되었죠. 


그림을 그리는 것은 그런 속도가 불가능합니다. 내가 저 모습을 스케치북에 담아야겠다 라고 마음먹는 그 순간부터 그 대상에 온전히 집중해야만 해요.  그저 눈으로 보는 것과 그것을 종이로 옮기는 행위는 ‘필사적 관찰’ 없이는 힘들죠. 코뿔소는 누구나 알고 있지만 실제로 코뿔소를 그려보려고 하면 어려운 것 처럼요 




.한강공원 잔디밭에서 치맥먹으며



그렇게 온전히 집중하기 때문에 그 대상과 장소, 여행에 대한 기억은 뇌리에 깊이 박힙니다.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면서 ‘내가 이런 사진을 찍었었나?’ 해본 적은 많지만 그린 그림을 보며 ‘내가 이런 그림을 그렸었나?’ 해본 적은 없어요. 그림에 표현된 대상 뿐 아니라 그림을 그리던 내가 했던 생각, 그날의 날씨, 향기, 오가던 사람들의 표정과 말투까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다녀오는것 처럼 생생하게 남게 됩니다. 


시간을 두고 찬찬히 눈으로 관찰하는 행위 자체도 의미가 있습니다. 유치원 학예회에 다녀온 동료의 이야기를 듣고 안타까웠는데 대부분의 부모들이 사랑스러운 아들, 딸이 공연을 하는 모습을 카메라 렌즈를 통해 보더라는 겁니다. 그 날의 감동을 미래로 예약하지 않고 그 순간을 온전히 만끽하고 향유하는 것. 저는 그것을 기억을 보관하는 참된 방법이라고 믿습니다. 



 

.가평의 어느 한적했던 펜션, 회사 워크샵




두번째는 마음의 여유로움입니다. 


종이를 펴고 선을 긋는 순간부터 마법처럼 여유가 생깁니다. 마치 기분좋은 향을 하나 피우고 앉아서 명상을 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인데요, 그림을 그리는 것은 매우 정적이기 때문에 바쁘게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다른 여행객들과 비교하면 동상처럼 보입니다. 


이 때 마음의 여백이 생기기 시작하는데요, 평소 보듬어 보지 못하던 생각을 하게 되고 민감한 이유로 피하고 있었던 문제들도 차분히 마주하게 됩니다. 설령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다고 해도. 스케치북을 덮고나면 그리기 전과 비교해 많은 용기가 생기게 돼요. 저는 심리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이 현상을 학문적으로 풀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낯선 곳에 떨어뜨려두고 낯선 풍경을 조용히 종이에 옮기고 나면 다시 일상을 맞이 할 수 있는 밀도있는 생각의 여백과 자신감이 생기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습니다. 




.종로 익선동 초입에 위치한 술집 ‘기러기 둥지’




세번째는 의미있는 결과물입니다. 


사진도 좋은 결과물이 될 수 있습니다. 시각결과물 뿐 아니라 여행지에서 쓰는 짧은 글도 당연히 좋은 결과물이 될 수 있겠죠. 하지만 작가가 아니라면 한 장, 한 편으로 무언가를 응축시키는 일은 많은 훈련을 필요로 합니다. 그 여행, 기억, 감정을 오롯이 글 한편, 사진 한 장에 담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반면에 그림은 내가 남기고 싶지 않아도 그 날의 기억과 감정이 남습니다. 그림을 잘 그리고, 못 그리고를 떠나서 누가 그리는 어떤 그림이든지 그 날의 세밀한 기억과 감정이 반드시 그 종이에 남습니다. 물론 자주 그리다보면 표현력이 좋아지기에 더욱 섬세한 흔적을 남길 수 있게 되겠지요 


그렇게 한 장 두 장 모아서 벽에 붙이면 얼마나 멋진 갤러리가 될 지 상상해보세요.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온갖 이야기와 느낌을 담고 있는 나만의 여행기가 탄생합니다.  




.멀리 나가야만 여행인가요?, 점심시간 회사주변




친구와, 사랑하는 연인과, 아이들과 함께 나들이를 떠날때면, 어색해도 좋고, 잘 못그려도 좋으니 간단하게라도 스케치를 해보세요. 그리고 그림을 서로 보여주면서 소감을 이야기해보고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세요. 평소에 나누지 못했던 대화를 할 수 있으리라 


저는 감히 장담합니다^^ 



.부산여행의 흔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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