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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한 Jan 16. 2022

귀여움은 어디서 오는가

그리머가 바라본 ‘귀여움’의 객관적 정의

귀여움이란 참으로 놀라운 상태입니다.

심장을 아프게 하고 남녀노소의 미간을 좁히고

맹목적으로 지갑을 열게 합니다.


서울 일러스트레이션 페어. 일명 서일페라고 불리는

국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상업미술 행사가 있습니다.

1년에 두 번씩 코엑스에서 열리는데

수많은 젊은 작가들의 다채로운 작품과 그 작품이 활용된 굿즈들로

코로나 시국에도 불구하고 인산인해를 이루는 행사입니다.


오픈한지 얼마안 된 평일 낮이라 사람이 적어보이지만 원래는 어마어마한 곳입니다.




흐름도 파악하고 눈요기도 할 겸 매년 방문을 하는데요.

작품의 상당히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소재가 ‘고양이’입니다.

귀여움의 대명사로 꼽히는 동물이죠.


이 외에도 다양한 동물이나 인물이 표현된

귀여움을 동반한 캐릭터가 주를 이루고

“완성도 있는 귀여움”을 지니고 있는 부스는

지나가는 사람의 발걸음을 붙들고 기어코 지갑을 열게 합니다.


서일페는 겉으로 보기엔 아기자기하지만 단단히 마음먹지 않으면

지갑 속의 현금이 녹아 없어지는 무시무시한 곳입니다.




저는 그리머입니다.

경험하는 공간이나 소품을 그림으로 옮기는 것이 생활의 일부입니다.

그래서 대상을 조형적으로 고찰하는 것을 즐깁니다.



왜 우리는 대상을 귀엽다고 생각하고

그 귀여움이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서일페를 한 바퀴 돌면서

귀여움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귀여움의 시작, 생명


귀여움은 생명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귀여운 소파, 귀여운 손목시계도 분명히 있지만

결국 생물로부터 느낀 감정의 파생입니다.


생명체는 생존이 1순위입니다.

오직 자아실현을 위해서만 살아가는 동물은 극히 드뭅니다.

인간조차도 생존이 먼저니까요.




종족 전체의 존속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단계는

‘어린 개체’의 생존입니다.

어린 개체가 안전하게 살아서 생식 능력을 가진 성체가 되어야

그 종은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죠.


새끼의 생존율이 낮은 환경이라면 

적어도 그 환경에서만큼은 멸종합니다.

우리가 멸종 위기종을 관리할 때 번식을 가장 유의 깊게 관리하고

어렵게 태어난 새끼들의 건강 관리가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래서 새끼들은 귀엽습니다.

아니, 귀여워야만 합니다.






하드웨어적 귀여움


단지 조형적인 측면에서 보면 

새끼들의 형상은 매우 부자연스럽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성체의 모습에 비해

몸 이곳저곳의 비율은 엉망진창입니다.




몸 대비 머리의 크기가 큽니다.

다리나 꼬리의 길이는 짧고 길이에 비해 굵습니다.

코 부위가 길쭉하게 성장하는 동물의 경우 옆모습이 상대적으로 평평합니다.


 

성장에는 단계와 순서가 있습니다.

한계가 있는 에너지는 효율적으로 활용되어야 하기 때문에

가장 이로운 순으로 우선순위가 부여됩니다.


그 결과로 성장의 구간 구간에 부자연스러운 비례와 형상이 나타납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새끼의 큰 눈”이 있습니다.

눈은 얼굴 면적 대비 지나치게 큽니다.

안구의 성장폭이 두개골이나 다른 기관 대비 작기 때문이죠.



왜 눈이 먼저 커버린 걸까요? 

시각으로 위험한 요소를 빨리 파악해야 하고

생존에 필요한 정보를 일찍이 학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몸이 다 커버린 다음에 시각을 얻게 되면

성인이 되고서도 모든 의사 결정을 부모에게 컨펌받는 마마보이나 다름없습니다.

그 개체는 생물학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도태됩니다.




성체의 모습은 진화의 산물입니다.

그 종이 살아남기에 가장 최적화된 형태죠.

물론 인간에 의해 조작된 예도 있긴 하지만 대체적으로는 진화의 흔적에 기초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새끼는 아직 미완성형입니다.

생존에 상대적으로 취약한 상황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덜 자란 어색한 비율을 귀엽게 여깁니다.

짤뚱한 다리, 커다란 눈, 오동통한 발, 넓은 이마 아래 아기자기하게 모여있는 눈코입

새끼가 갖고 있는 모든 어색한 요소에 심장을 부여잡습니다.






소프트 웨어적 귀여움


여기까지가 하드웨어적 측면이었다면

소프트웨어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새끼는 호기심이 흘러넘칩니다.

끊임없이 만져보고 냄새 맡고 입에 갖다 댑니다.


인간의 아기가 뭐든 손에 잡히는 것을 입에 갖다 대려는 본능은

모든 촉각 기관 중 입이 가장 예민하기 때문입니다.

엄마의 젖을 찾고 먹어야 하기 때문인데, 

그렇게 먼저 발전된 감각 기관을 통해 대상을 학습하려고 합니다.


우리도 호기심이 없다면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호기심은 학습 욕구를 반영합니다.

빨리 세상을 인식하고 하나라도 더 배워놔야 새끼는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호기심을 받쳐줄 왕성한 활동량을 가집니다.

어른은 상상도 못할 만큼 가공할 만한 에너지를 자랑하며

종일 뛰어놀다가 지쳐 잠든 모습은 미소 짓게 만듭니다.



가특이나 짤뚱한 꼬리와 다리를 가진 새끼 강아지가

이리저리 종종 뛰어다니고, 호기심 어린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너무 짧아 거의 있으나 마나 한 꼬리를 떨어져 나가도록 흔들면


집 어딘가에 성능 좋은 제세동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댕청미라는 표현 또한 

무모하고 어리숙한 강아지들의 행동에서 비롯된 것이죠.



그렇게 새끼들은 모든 것들을 궁금해하고

도처에 널린 정보를 가용할 수 있는 모든 감각기관과 근육을 사용해서 수집합니다.


물론 이 행동도 생존을 위한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은 본능적인 행동양식이죠.






소중히 보호하고자 하는 이타적 마음


귀여움을 느끼는 마음은

다 자라지 못한 생명을 보호하고자 하는 

보호 본능이 작용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동일 종은 물론이고 다른 종에 이르기까지 이타적인 보호 심리가 작용합니다.




다시 생각해 보면 귀여움은 대상의 상태가 아니라

내가 느끼는 감정입니다. 



최대한 귀엽게 보이도록 노력하는 새끼 고양이나 강아지는 없습니다.

그냥 생긴 대로 사는 것일 뿐인데 사람들이 물고 빨고 꺅꺅거리죠.


귀여움을 당하게 하여 살아날 확률이 높아지도록

누군가에 의해 치밀하게 설계된 것인지 저는 알 수 없습니다만,


확실한 것은 우리 모두에게는 

아직 완전히 자라지 않은 개체에게 베푸는 아량이 있습니다.

낚시꾼들이 어린 물고기를 놔 주거나

어미 오리를 따라 졸졸 따라가는 새끼 오리의 행렬은 고속도로를 마비시킵니다.



성체가 되기 전 외부 위험으로부터 취약한 구간의 생명체를

내가 보호해 주고자 하는 마음

저는 이 마음이 귀여움이란 감정의 출발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귀여움의 표현


SD 캐릭터 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Super Deformation Character의 줄임말인데

Deformation은 “기형”입니다.


Super까지 붙였으니 제대로 맘먹고 비율과 형태를 왜곡한 것이죠.


원펀맨의 '제노스' - 출처 : 굿스마일컴퍼니


자세히 관찰할 필요 없이 한눈에 보기에도

아직 완전히 자라지 못한 생명체들의 ‘취약 구간’을 그대로 모방합니다.


짧고 굵은 팔과 다리

커다란 머리와 더 커다란 눈, 작은 코

일종의 공식화된 표현 방식이 존재합니다.

각 부위의 비율을 조절하며 지나치게 어색하지 않은 정도에서

균형감을 찾는 작업을 합니다.



하지만 이런 공식화가 딱딱하게 경질화되고 패턴 화가 되면

왠지 모를 식상함이 생깁니다.

제가 서일페에서 느꼈던 약간의 불편함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공식을 따른다고 무조건 귀엽지는 않... (출처 : 인터넷 쇼핑몰 '이말년 피규어')




분명히 귀여움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지갑을 열게 합니다.

그런데 종종 맹목적 귀여움만을 쫓는 작품들도 눈에 보입니다.


앞서 설명한 SD 공식에만 충실한 캐릭터라든지

아니면 고양이라서, 강아지라서 자동적으로 귀여움이 수반된 기획이라든지

그냥 예쁘고 귀여우면 좋지 뭐- 하기에도 너무 많은 수의 작품들이 획일화된 느낌입니다.



앞서 설명한 귀여움의 본질을 생각해 보면

사실 시도해 볼 만한 요소들이 더 많아집니다.

동일한 캐릭터일지라도 그 캐릭터에게 왕성한 호기심과 어리숙함을 부여하면

표현할 수 있는 상황과 배경적 연출이 달라집니다.


대중적이지 않은 대상을 다루더라도

그 소재가 성장 중인 과정을 상상해 보면

참으로 다양한 각도로 보호 본능을 자극할 수 있습니다.


자연스러운 성장과정을 의도적으로 비틀어 표현하는 것도 가능하고요.



정말 멋지고, 작품을 소유하고 싶은 훌륭한 작가들과 작품도 많습니다만

다른 나라들의 아트웍과 비교해 볼 때 획일화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대상을 본질적으로 이해하고 보는 이들의 감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다양성과 도전이 더욱 많이 시도되면

생산자와 구매자의 의식도 더 성장하고

시장 또한 풍요로워질 것으로 기대됩니다.



이 정체모를 종에게도 우리는 귀여움을 느낍니다. 귀여움의 공식을 참고하되 얼마든지 크리에이티브해질 수 있습니다.








제 나름대로 해석해 본 귀여움과 귀여움을 다룬 작품 흐름의 아쉬움을 토로해 봤습니다.

물론 정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각자 나름대로 작품의 가진 감성을 한번 정의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왜 그런지 자꾸 되묻는 질문을 하다보면


그 시선과 관심이 언젠가는 작품에 스며들고

그렇게 깃든 철학이 작품의 DNA가 되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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