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 차려보니 마흔이 된 스타트업 디자이너

유통기한에 관한 고찰

by 차PD


처갓댁 가족 여행중이었다. 저녁 준비를 하면서 모인 나를 포함한 사위들은 각자의 직업과 다가올 걱정들의 현실적인 대화를 나눴다. 그중 불현듯 내게도 질문이 돌아왔다. "형님 직장은 정년이 꽤 길죠?" 이 질문을 받는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애써 외면하고 있었던 은퇴의 그림자가 별안간 선명해지면서 옆자리에 엉덩이를 들이밀고 앉았다. 질문에 답변을 해야하니 부랴부랴 말을 만들며 말을 했는데 크게 두가지로 요약된다.


다른 산업군에 비해 많이 짧다. 사실상 몇 년 안남았다고 보는게 맞다.

이미 회사에서 나이순으로 손가락에 꼽힌다.


나의 대답에 내가 놀랐다.



다시 살펴 생각해볼까

IT 업계가 조금씩 노쇠해가고 있다지만 아직 이 분야는 확실히 젊다. 필연적으로 새로운 기술과 트렌드를 민감하게 소화해 활용해야하고 안정보다는 속도가 강조된다. 사용하는 툴도 일의 프로세스도 익숙해 진다 싶으면 바뀌고 AI 기술이 발전되면서 최근 변화 속도와 범위는 예측할 수 없을 정도다. 이런 맥락에서 회사는 전통적인 무언가를 잘해왔던 사람보다 새로운 환경을 잘 이용하는 인재를 더 원한다.


'아니야, 나는 잘 해오고 있었고 여전히 경쟁력 있는 사람이야. 언제나 배울 준비가 되어있다고' 하며 스스로 위로했지만 이런 생각이 통하는 세대에도 임계치가 있다. 젊게 사는 어른은 이미 젊은이가 아닌것처럼.



나는 어디에 있는가?

생각이 여기에 닿자 과거를 돌아보게 됐다. 나는 어디를 거쳐서 어디에 있고 왜 이곳에 있는가. 큰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내 링크드인 프로필에는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회사가 몇 개 적혀있다. 그 영향 때문인지 다양한 제안이나 메시지가 오기도 하는데 현재 나의 거처는 특별히 관심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잘 모르는 스타트업이다. 이곳에 옮기기로 했던 나의 각오나 부푼 희망을 다시 떠올려야 할때가 온 것. 나는 어떤 설렘으로 어떤 사람이 되기 위해 이곳에 있나. 이직을 고민하고 결정할때 이곳저곳에 끄적이던 메모들을 한데모아 꼼꼼히 읽어본다.



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

그러다 책장에 꽂혀있던 청록색 책 한권에 생각이 맺힌다. “내가 가진 것을 세상이 원하게 하라.” 제작년 이 책이 처음나왔을때 너무 좋은 내용이라며 게걸스럽게 읽고 꽂아두었던 책이다. 현 직장으로의 이직을 결정할때 가장 큰 용기의 보탬이 되어줬던 기억. 이 책을 다시 펼쳐 읽다가 한 페이지 귀퉁이에 적힌 붉은 글씨를 발견했다.


‘시각화의 힘으로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한다.'


저자는 각자가 하고 있는 일의 본질을 직접 정의해보도록 권유하고 있었고 그 조언에 따라 고심끝에 적어둔 문구였다. 아, 맞아 이거였다. 나는 이 의미를 위해 일을 하고 있었다. 이 문장을 이리도 감쪽같이 잊고 있었다.


이 고요한 작업의 진짜 의미는 확장에 있다. 저자는 본인이 정의한 업의 본질을 유지한 채 광고 기획사를 퇴직하고 생각의 힘을 나누는 책방의 주인이 되었다. 업의 형태는 다르지만 추구하는 목적은 동일하다는 것. 이러한 접근방식이 고리타분하고 이상적으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 어떤 방법론보다 효율적인 은퇴준비라고 생각했다.


시각화의 힘으로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소명으로 삼으면, 지금 실제로 하고 있는 일의 목표는 이 맥락에서 다시 설정해볼 수 있다. 그렇게 ’디자인의 힘으로 사람-기술-비즈니스간의 간극을 없앤다.‘는 직업적인 목표가 되었다. 나는 아웃풋을 만들기에 앞서 커뮤니케이터다. 복잡한 문제를 쉽고 단순하게 정리하기를 좋아하고 그 길에서 시각화의 힘을 빌리는 과정을 사랑한다. 생각이 여기에 닿으니 내가 가진 것이 세상이 원하는 무언가가 될 수 있음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더욱 마법같은 일이 벌어지는데 내가 어디에 출근을 하든 직장은 종착점이 아닌 어딘가를 향한 과정이 된다.


ChatGPT Image 2025년 8월 25일 오후 06_12_31.png 출처: OpenAI ChatGPT 이미지 생성



다시 출발선에 설 용기

방향만 정했다고 그대로 되지 않는다. 몸으로 실행하지 않으면 아무일도 벌어지지 않는다. 몇 가지 질문으로 시작해본다. 시각화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구체적인 문제는 무엇이 있을까? 시각화는 어떤 형태의 아웃풋으로 발현될 수 있을까? 너무나 쉽게 AI 기술로 대체되지는 않을까?(이 부분이 최근 매우 중요해졌다) 취미로 삼던 그림 그리기와 나의 본업이 정교하게 얽힐 수 있는 지점이 있지는 않을까? 낭만의 영역에 갇혀있는 그림이라는 시각적 장치를 효율과 쓸모의 동네로 꺼내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글과 그림으로 옮기면서 테스트와 숙련도를 쌓아가보려고 한다. 관성적으로 그리던 스타일과 취향이 담긴 그림과는 잠시 작별을 고해야할것 같다. 분명한 것은 이 노력들은 현 직장의 일에도 큰 보탬이 될것이며(사람-기술-비즈니스의 간극을 없애는 것을 추구하므로) 스타트업이기 때문에 더 큰 빛남이 될 수 있다. 시간이 지나 자의든 타의든 조직을 벗어난다면 “업의 본질”이라는 선명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든든한 기반이 만들어져 있을 것이라고 예상해본다.


아직 정확한 상이 맺히는 일은 아니지만, 즐거운 은퇴를 위해 첫 포석이 되리라는 생각이다. 이 준비는 미리될 수록 근본적이며 농익을 것이다. 길고 긴 출퇴근 왕복시간, 점심시간, 육퇴후 여유시간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본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달리기와 투자의 공통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