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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한 Jun 14. 2018

글 그리기, 그림 쓰기

다 한통속

우연히 집어든 책 한 권을 읽다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고 글로 옮깁니다.


작은 도서관을 두리번 거리다가 눈에 들어온 초록색 책 한 권이 있었습니다. <쓰기의 말들>이라는 작은 책이었는데, 난해한 표지 디자인과 달리 유리잔에 담겨있는 물 한 잔같은 조용하고도 밀도 있는 책이었습니다. 본인을 글쓰는 사람이라고 지칭하는 ‘은유’님이 지은 책이었는데, 일상에서 느끼는 단상들과 더불어 글쓰는 Tip들이 담긴 짧은 글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습니다. 책을 펼치면 좌측에는 유명한 작가의 문장 몇줄, 오른편에는 작가 본인의 글이 씌여 있습니다. 읽는 호흡이 짧아 쉽게 읽히지만 중량감있는 내용들이 담겨 있습니다. '글쓰기란 이런 재미가 있는 세계였구나’, ‘글을 쓴다는 것은 쉬워보이면서도 복합적 능력을 필요로 하는 진실한 창작활동이구나.’ 하는 점을 느끼며 꼭꼭 씹어 읽었습니다.


몇몇 인상깊었던 부분들을 잠시 옮겨봅니다.





배산임수한 전원 주택에 사는 사람이 쓸 수 있는 글이 있고, 한 평 고시원에 사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글이 있다. 같은 여자라도 아이 둘 키우며 일하는 주부인 내가 감각하는 세상과 연구실에서 종일 보내는 교수가 접속하는 세상은 다를 것이다. 그렇다면 쓸 수 있는 글도 다르다. 남을 부러워하지 말고 자기가 발 디딘 삶에 근거해서 한 줄씩 쓰면 된다.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것은 누구나 글감이 있다는 것. 톨스토이와 도스트예프스키뿐이랴. 글쓰기는 만인에게 공평하다.
'내용만 진실하다면 소재는 무엇이라도 좋다.’ 영 아닌 소재는 없구나. 소재 찾기보다 의미 찾기로구나.
화려한 요소가 얼마나 많은가가 아니라 불필요한 요소가 얼마나 적은가가 글의 성패를 가른다. 
어쩌면 용기란 몰락할 수 있는 용기다. 어설픈 첫 줄을 쓰는 용기, 자기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용기, 진실을 직면하는 용기, 남에게 보여 주는 용기,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 용기, 다시 시작하는 용기.
사랑이라는 낱말을 쓰지 않고 사랑을 표현한다.
신기한 것들에 한눈팔지 말고, 당연한 것들에 질문을 던지세요. - 이성복
아무것도 안하는 것과 아무것도 안 하는 거 '같은' 것의 차이. 하루 이틀은 쓰나 안 쓰나 똑같지만 한 해 두 해 넘기면 다르다. 다행히 나는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잘 쓰고 싶다는 마음보다 그저 쓰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글이 어서 늘기를 재촉하지 않았다. 매일매일 쓰는 동안 안 보이는 성장의 곡선을 통과했다. 어떤 불확실성의 구간을 넘겨야 근육이 생기는 것은 몸이나 글이나 같은 이치였다.
피와 살이 도는 한 사람이 보이는가. 도덕 교과서나 주례사나 공문서 같은 고리타분한 글을 피하고 싶을 때, 내가 택하는 가장 안전한 점검 방법이다. 그런 점에서 증언문학 '체르노빌의 목소리' 는 내게 이상적인 작품이다. 내용은 체르노빌 원전 사고로 폐허가 된 벨라루스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개개인의 고통을 날것 그대로 담았다. 인용구로만 이뤄진 목소리 소설이다. 부제가 미래의 연대기. 한 사람으로 들어가는데 인류로 빠져나오는 마법 같은 글이다.
트위터, 페이스북, 블로그, 논문, 기사, 편지 등 대개의 글쓰기는 공개가 기본값이다. 세상에 내 생각과 의견을 제출하는 일이다. 자기의 최대치, 생각의 근사치를 표현하려 노력한다. 남이 보니까. 그것은 자기 생각을 검증하는 기회가 된다. 누가 뭐라하기도 하니까. 다른 의견을 접하고 내가 아는 게 전부가 아님을 안다. 환대든 적대든 다양한 반응을 겪어야 맷집이 키워지고 글이 성숙해진다. 자기 글에 대한 책임을 배우는 것이다.






필요한 부분만 옮기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만큼 소중한 문장들이 많은 책이었습니다. 위의 글처럼 삶의 지혜와 동시에 좋은 글을 쓰는 방법에 대해서도 많이 다뤄져 있습니다. 불필요한 요소 최대한 덜어내기, 소재보다는 의미찾기, 거짓되지 않기, 사랑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사랑을 표현하기, 매일 매일 쓰기, 추상적인 대상보다는 직면한 현실을 쓰기, 공개하고 타인의 목소리 듣기. 정도로 요약해볼 수 있을것 같아요. 이렇게 정리해보다가 저는 어떤 사실을 발견하고 전율을 느꼈습니다. 위 문장에 등장한 ‘글’이라는 단어를 ‘그림’으로 바꾸고 ‘쓰다’라는 동사를 ‘그리다’로 바꾸어도 그림을 위한 훌륭한 가이드가 된다는 것 이었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듯, 지혜와 진리는 한 길로 이어지는 거라지만 이건 해도 해도 좀 너무했습니다. 이 사실을 발견한 순간 이 책을 다시 처음부터 읽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강화도 동막해수욕장 갯벌



필요한 부분만 남기기

그림에도 화려한 기교가 존재합니다. 입시 미술학원에서 강사를 했던 시절이 제게는 소중하고도 아쉬운 경력이기도 한데요. 정물, 석고상등을 열심히 그리고 있던 수강생들의 그림을 강사로서 잠깐씩 연필을 건네받아 수정을 해주는 것이 강사의 주요 일과 였습니다. 어려운 부분을 만나 곤혹스러워 하는 학생들의 문제를 해결 해 주기도 하고, 학생들이 알아차리지 못했던 오류를 찾아 수정해주는 식이었죠. 이 때 강사의 손에서 그려지는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몇 번 안되는 손질로 그럴 듯한 효과를 만들어 내느냐 입니다. 제가 앉아 5분~10분 그림을 봐주고 일어나면 ‘와, 그림이 완전 달라’ 라는 반응이 있어야만 좋은 강사이기도 했고 학생들도 그 학원을 계속 다니게 만들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그 시절 제 손에 무의식적으로 담겨진 ‘테크닉’들을 제 그림에서 없애는 데 참으로 많은 노력을 했어야 했습니다. 아직도 제 그림 곳곳에 많이 남아 있기도 합니다. 은유 작가는 그런 기교보다는 필요한 부분만 남아있는 글을 쓰라고 합니다. 있어야 할 것만 남아 조금 더 본질에 가까워있는 그런 그림. 아직도 해결해야 할 미션이 많이 남아 있네요.



가식되지 않고 진실에 직면하기

그림을 그리다 보면 '이 그림을 보면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를 지나치게 고려할 때가 있습니다. 눈 앞에 흥미로운 대상을 그리면 될 것을 나를 좀 더 멋지게 포장할 수 있는 대상을 찾아 탐색합니다. 더욱 멋진 그림도 나는 그릴 수 있어! 그런 소재를 찾을 꺼야 하면서 말이죠. 제 생각엔 이것은 가식에 가깝습니다. 표현하려는 대상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해석하고 그 소재에 폭 빠져 그려내기만 하면 될 텐데요. 그렇게 ‘멋지게’ 그려진 그림은 다 그리고 나면 뭐랄까 뿌듯함은 있지만 사랑스럽진 않습니다. 어딘가 거북살스러운데가 있어요. 아마도 이 작가가 말하는 진실성이 결여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 해봅니다. 



커피 그라인더가 잔뜩 진열 되어있는 회사 근처 어느 카페



사랑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사랑을 표현하기

어렵고도 공감가는 문장입니다. 그림중에 ‘슬픔’이라는 심상이 눈에 보일듯이 흐르는 그림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작품은 감정을 과잉표현했다고 느끼는데요. 그 그림을 그리던 때의 상황이나 작가의 입장등 다양한 맥락을 알고나면 납득이 가는 부분도 있지만 저는 부담스러워 그 그림을 벽에 걸어두고 싶지는 않습니다. 슬픔에 겨워 1절은 물론 2절, 클라이막스까지 울부 짖는 노래보다는 감정을 절제하며 부르지만 알듯 모를듯 슬픔이 뭉근히 묻어나는 그런 노래는 오래 두고 들어도 질리지 않습니다. 햄버거 보다는 쌀밥 같은 그런 작품이 저는 좀 더 좋은 것 같습니다. 역시 그런 그림을 그리고 싶구요.



존경하는 교수님께 선물했었던, 파키라 화분의 근황



매일 매일 그리기

이미 이 주제는 한편의 글을 써버리고 말았네요

매일 하는 일의 위대함은 분야를 막론하고 동일한 것 같습니다.



공개하고 타인의 목소리를 듣기

그림을 그린 지는 꽤 되었지만 그림을 공개한지는 몇 년 되지 않았습니다. 또래 친구들이 페이스북에서 인스타그램으로 넘어갈 무렵 저는 주저했습니다. 인스타그램 만큼은 왠지 그저 그런 일상이 아닌 제가 그린 그림을 채우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인스타그램을 시작하기 위해 어떤 컨셉의 그림을 그릴까 수도 없이 고민하고 그림을 그렸다가 지우기를 반복하며 5년쯤이 지났을 무렵. 이러다 평생 시작하지도 못하겠다 싶어 만취한 어느날 아무 그림이나 올려버립니다. 그렇게 시작되어 버린 인스타그램을 통해 실제로 너무나 많은 것을 배웁니다. 무언의 약속이 되어버려 그림을 꾸준히 그릴 수 있는 동기부여가 된 것은 물론이고, 검색을 통해 흘러들어온 세계 각국 유저들의 피드백도 너무 짜릿합니다. 사람들이 보다 흥미로워 하는 그림들도 직간접적으로 알 수 있게 되고요. 어설프고 자신이 조금 없더라도 사람들에게 공개하고 목소리를 들을 것. 그림 그리는 후배들에게 꼭 조언하는 항목입니다.



스시 오마카세를 먹으며



선을 한번 그을때마다 이 요령들을 떠올리려 한다면 그 그림을 완성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이렇게 정리한다고 한들 글이든 그림이든 바로 바뀌지 않죠. 하지만 지향점을 어느 정도 정해두는 것은 필요한 일이 아닐까 합니다. 다양한 글들을 또 다른 시각으로 해석해보며 방향을 보완하고 빈 곳을 채우다보면 제 그림들도 나름의 향기를 품게 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요.




글과 그림은 참 많은 면이 닮아 있습니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잘 하기는 어렵습니다. 매우 정적으로 생산되지만 결과물이 만들어내는 파동은 무엇보다 역동적입니다. 어렸을 적엔 거리낌이 없지만 나이가 들수록 용기를 내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당장 시작할 수 있는 도구는 지금도 주위에 널려 있습니다. 글과 그림은 사람을 쓰고 그립니다. 그리고 사람은  그 안에서 위안받지요. 저도 많은 이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줄 수 있는 그림을 쓰고 글을 그리는 그런 사람이 되어보고 싶네요. 



고마운 스승들께 선물 드렸던 꽃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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