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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주현 Jul 15. 2018

얼굴을 그리는 이유

답안지는 없다.

많은 한국 사람은 조금 슬픈 습관을 하나 갖고 있습니다. 

모든 일에는 정답이 있다고 믿으며 그 정답을 모르는 상황에서는 불안함을 느끼는 습관입니다. 

저는 이것을 “정답 컴플렉스”라고 부릅니다. 

정답 컴플렉스는 이곳 저곳에서 정말 많이 보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토론에 굉장히 약하죠, 토론은 자신의 주장이 있고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대며 논리를 쌓아갑니다. 토론의 백미는 서로의 헛점을 들추고 증명하며 더욱 단단해져가는 과정인데 내가 주장한 말들이 정답이 아닐까봐 쉽사리 발언을 하지 못합니다. 엄청나게 멋있고 한마디로 모두를 잠 재울 수 있는 그런 문장을 구사해야만 많은 사람들앞에서 발언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고등학교 문학시간에 배우던 시를 기억하시나요? 

우리는 시를 배우며 그 시에 담겨진 시어가 의미하는 것을 영어 단어 외우듯 암기하며 배웁니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데요 한 시인이 본인의 시를 다룬 문제를 풀었는데 정답을 맞추지 못했습니다. 

영화의 결말을 관객에게 맡기는 형식의 영화는 유달리 혹독한 평가를 받습니다. 무언가 명쾌한 결론을 제시해주어야 발뻗고 잠을 잘 수 있습니다. 그림을 전시하는 전시장의 입구에는 작품을 설명하거나 해석한 장문의 글이 씌여 있습니다. 두세번을 읽어도 무슨 내용인지 당최 모르겠더라고요.



우리는 정답의 의미보다는 정답의 유무가 더 중요한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정답을 맞춘자와 그렇지 못한자가 있어야 평가가 가능하고, 그 평가가 있어야만 교육과 사회가 운영되는 나라였습니다.


저도 이 컴플렉스에서 자유롭지 못해서 (대체로 쓸데없는) 고민들을 많이 합니다. 

그림을 그리기 전에 생각합니다. 이 그림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할까? 나는 이 그림을 왜 그리는건가? 누군가가 물어봤을때 나는 어떻게 멋지게 대답해야할까? 이 길고 긴 고민의 끝은 결국 ‘아무것도 못그림’ 이었습니다. 


그림과 디자인을 전공했고 누구보다 왕성하게 작업을 할 수 있는 환경에도 불구하고 그 놈의 정답을 찾지 못해 아무것도 하고 있지 못했습니다. 그런 고민을 하다하다 지쳐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모르겠고 그냥 그리고 싶은거 그리자"


그렇게 시작한 얼굴 그리기가 제법 꾸준한 제 그림 컬렉션으로 꾸며지고 있습니다. 

신기한 점은 여지껏 그려 왔던 무수한 그림들과 비교할 수 없이 꾸준히 그려지는 거예요. 

온갖 의미와 정답을 담은 그런 그림은 두어장 그리다가 지치고는 했는데 

그저 그릴때 재밌고 그리고 나서도 뿌듯함이 좀 더 느껴지는 얼굴은 쉽사리 게을러지지가 않습니다. 

정답이 없는게 정답이었던 거죠.  




종종 지인이 묻습니다. “너 왜 얼굴만 그려?” 

예전 같았으면 이렇게 대답했을 꺼예요 “사람의 시각적 인지과정은 익숙한 것으로 우선하는데 수많은 이미지에서도 얼굴에 본능적으로 먼저 눈이 간데 얼굴이 얼(영혼)의 굴(꼴)이라는 어원으로 봐도 얼굴은 인간 존재를 규명하는 기표가 아닐까?”

요즘엔 이렇게 대답합니다. “얼굴 그리는게 재밌어”




때로는 정답이 본질을 퇴색합니다. 정답을 찾아 해매다보면 정작 봐야할 것을 못보고 지나치는 경우가 있는것 같아요. 까짓거 틀리죠 뭐, 내가 내린 답으로 세상을 새로이 해석하면서 살아가 보는것. 한번 쯤 해보고 싶지 않으신가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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