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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주현 Jun 22. 2020

잠깐의 죽음을 기념한 내 오른팔의 타투

누구나 죽는다.


이것보다 반박이 어려운 명제는 없다. 말 그대로 누구나 죽는다. 살아있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끝을 맞이한다. 그리고 한가지 잊기 전에 상기해 봐야하는 것은 '나 역시' 죽는다. 오늘도 온갖 수단을 통해 세계 곳곳의 죽음을 접하지만 나와는 다른 세계의 죽음으로 여긴다. 죽음은 아직 나에게 찾아올 필요가 없는 암묵적 경계선 너머의 그 무언가다. 그렇지만 애석하게도 내가 삶의 권리를 누리고 있다면 죽음의 의무도 주어진다. 빛이 비추면 그림자가 지듯 생명과 죽음은 동시에 존재한다. 지금도 우리는 살아가고 있고 또 죽어가고 있다.



내 오른팔 손목 아래로 약 10cm 가량의 타투가 새겨져 있다. 물안경 이미지와 여덟 자리 숫자 두 줄이 열거되어 있는데 수 십 번의 디자인 수정 끝에 타투이스트인 후배의 손을 빌려 연남동의 한 작업실에서 새겨졌다. 유행에 뒤쳐지고 싶지 않아서 잉크 묻힌 바늘이 살을 꿰뚫는 고통을 참아낸 것은 아니다. 몇 개월 전 동해 바닷속에서 사건이 있었다. 봉사를 겸한 스쿠버 다이빙 활동이 있었는데 아주 사소한 실수와 자만심 때문에 일은 벌어졌다.


입수 이후 내가 지나치게 빨리 바닷속으로 하강 중이고 팀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할 수 있는 대처를 다 해봤지만 작동되지 않는 장비, 차가운 바닷물, 패닉에 가까운 심리 상태로 인해 속절없이 가라 앉고 있었다. 최대 수심을 알고 있던 곳이기에 공포는 더욱 강했다. 그 깊이로 다 내려가 버린다면 당시 나의 장비로는 살아서 올라오기 힘들었다. 떠오르기 위한 시도를 하다가 이퀄라이징 타이밍을 놓쳐서 눈과 부비동의 압력은 견디기 어려울 만큼 높아졌고 물 속 시야는 거의 닫혔다. 오른팔에 수심을 알려주는 다이빙 컴퓨터가 달려 있었지만 차마 그 수치를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만에 하나 절망적인 숫자를 보게 된다면 실낱같은 희망조차도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희망이 사라지는 공포를 마주할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다.


'죽음'. 그 개념이 강렬하게 와 닿았다. 손에 닿지 않는 곳에서 피상적으로 둥둥 떠 있던 그 묵직한 세계가 바로 내 발 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다를 그리 좋아하더니 결국 바다에서 가는구나.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가족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마무리 짓지 않은 많은 일들이 아쉬웠다. 그나저나 많이 괴로우려나... 수많은 생각들이 머리 속에서 뒤엉키고 있는데 쿵! 하는 둔탁음과 함께 영원할 것만 같던 가라앉음이 멈췄다. 운이 좋게도 그리 깊지 않은 수심 속 지대 위에 안착했다. 공기통의 공기를 호흡기를 통해 폐로 옮겼다가 오랄 인플레이터를 통해 장비에 불어 넣으며 차분이 상승을 준비했다. 안압에 무리는 있었지만 안전하게 상승할 수 있는 깊이였다. 그렇게 해수면 위로 나는 떠올랐고 얼마 사용하지 않은 무거운 공기통과 함께 보트에 올랐다. 막무가내로 흐르는 코피와 실핏줄이 터진 눈을 담수로 헹구고 장비를 풀어 헤친 뒤 보트 위에 누웠다. 실수에 대한 자책, 수치심이 피어올랐다가 누그러지며 형언하지 못할 고마움이 온몸을 감쌌다. 차가운 초여름의 바닷물과는 달리 햇볕은 나를 쨍쨍 내리 쬐었고 곧 금새 뜨거워졌지만 나는 그대로 그 뜨거움을 받아들였다. 삶의 열기였다.


여덟 자리의 숫자 두 줄은 그날의 년,월,일 그리고 입,출수 시간이었다. 사건이 일어나고 몇 주 뒤, 타투 도안 디자인을 위해 다이빙 컴퓨터를 켰다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영원과도 같던 잠수 시간은 고작 3분 이었던 것이다. 인스턴트 카레가 전자레인지 안에서 먹기 좋은 온도로 둔갑하는 그 찰나의 시간동안 나는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닿았다가 돌아왔다.



죽을 뻔한 일을 기념하는 타투를 받으며 아파 죽을뻔했다.



혹시라도 이 글을 읽고 '스쿠버 다이빙은 위험하구나' 라고 생각할까 하는 노파심에 첨언 하자면 내가 이 사건으로 가장 크게 깨달은 것은 '사소한 실수나 사건'으로 인해 죽음이 찾아 올 수 있다는 점이다. 사람은 전쟁이나 난치병으로도 죽지만 일반적으로는 일반적으로 죽는다. 길을 걷다가, 운전을 하다가, 다툼을 하다가 사소한 실수로 인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나의 경우도 상식적으로 당연히 작동 되었어야 하는 것을 확인하지 못한 실수를 범했다. 이런 경우가 벌어지는 확률은 보통 0%에 수렴한다.


그렇게 새로 받은 삶을 기념하기 위해 그리고 그 바닷속에서의 절박함을 에너지로 치환하기 위해 다이빙 컴퓨터가 매달려 있던 그 위치에 타투를 새겼다. 일상으로 돌아와 삶의 구석진 곳에서 때때로 타투를 발견하고는 희망의 기지개를 편다. 시간에 의해 조금씩 강도가 풍화되고 있지만 아직은 영상을 보듯 그 기억이 생생하다.

죽음은 늘 내 곁에 있었다. 나를 죽이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삶의 경주가 끝나고 바통을 받은 죽음이 이어 달려오는 것이 아니라 삶과 죽음은 동시간대에 호흡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타투에 맺혀 있는 그림자를 내 옆에 두고 친구처럼 찬찬히 돌봐주기로 했다.



이 글은 나의 죽음을 준비하는 "죽음 계획서 : 장례 희망"의 여는 글이 될 예정이다. 생각해보니 나는 나의 죽음에 대해 조금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종신 보험을 가입하겠다는 얘기는 아니다. 나의 죽음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알려지며 어떤 방식으로 장례가 치뤄지고 시신은 어떤 방법으로 처리가 될지 죽음에 대한 나의 생각을 죽음이라는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다. 아주 긴 시간 써 내려가게 될 유서라고 지칭하는 것도 괜찮겠다. 작은 아이디어나 생각들을 조금씩 모아두면 나 자신에게 혹은 삶의 반짝임을 잠시 잊고 살았던 누군가에게도 도움이 될 지 모를 일이다.


오늘도 나는 보람찬 하루를 살았고, 그만큼 하루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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