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카페망고 Oct 05. 2020

과욕이 부른 참사

- 아마도 연휴 후유증?

긴 추석 연휴를 마치고, 여느 때처럼 여덟 시에 출발하는 전철을 타고 출근길에 올랐다. 아직도 정신은 비몽사몽이었다. 갑자기 쑥 내려간 기온 때문에 사람들의 옷차림은 추석을 기점으로 제법 두꺼워진 듯했다. 각양각색의 마스크를 쓴 사람들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목을 떨구고 손에 든 휴대폰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사람들의 손에 들린 휴대폰은 마치 떨어트리면 폭발할 수도 있는, 안정장치가 풀린 수류탄 같았다. 


사람들을 있는 힘껏 밀어 넣으며 간신히 전철에 올라탄 나는 회색 빛 출입문에 어쩔 수 없이 몸과 얼굴을 밀착시켰다. 문이 닫히자 열차는 속력을 한껏 올렸다. 나는 순간 기관사가 실수로 내가 몸을 지탱하고 있는 문을 열어버리면 어떡하나 하는 섬뜩한 상상을 했다. 수많은 날을 지하철로 출퇴근을 했지만, 다행히 달리는 도중에 문이 열리는 일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부질없는 상상이라며 머리를 흔들고 오늘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주로 메일 교신을 하며 일을 하는 홍콩 사무실은 오늘까지 휴무였다. 또 원단을 공급하는 중국과 제품을 만드는 공장까지 휴일이었기 때문에, 출근을 한다 해도 개점휴업이나 다름없었다. 


오늘은 개운하게 아메리카노를 마실까 피곤을 녹여줄 달달한 라떼를 마실까 생각하는 사이 지하철은 서남쪽으로 전진했다.  


환승역은 출근을 서두르는 사람들로 만원이었다. 내가 갈아타야 할 플랫폼으로 몸을 틀어 방향을 잡자 인파는 목적지로 나를 떠밀었다. 환승역에 도착하자마자 운 좋게도 바로 열차가 들어왔다. 러시아워라 사력을 다해 올라타지 않으면 다음 열차를 기다려야 할 정도로 열차 안은 이미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긴 연휴가 끝나고 나면 사람들은 나처럼 으레 출근을 서두른다. 조금이라도 일찍 사무실에 앉아 업무 열정을 드러내고픈 욕심에 나는 발과 머리를 열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 승차하지 못한 승객이 가방과 함께 내 배를 밀어 넣어주지 않았더라면, 문이 닫힐 때 가방이나 옷이 문에 끼었을 것이다.  





지하철을 나오면서 휴대폰 앱으로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연휴에 놀아도 너무 놀았나 보다. 딸아이와 오랜만에 쇼핑을 하고, 매일 색다른 요리를 함께 만들어 먹고, 공원에 가서 자전거를 타고, 늦게까지 같이 TV를 보고 또 늦잠도 자고 그 동안 못했던 것을 마음껏 하고 놀았다. 잠시나마 오롯한 엄마이자 주부가 되었던 나는 내가 직장인이었나 싶을 정도로 출근길이 낯설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나는 프로였으므로. 


오늘 같은 날은 반드시 뜨겁고 또 진한 커피를 마셔야 정신을 차릴 수 있다. 카페에 들러 나의 영혼을 깨울 커피를 받아 들고 사무실로 향했다. 지하철에서 시달림을 많이 당한 날일수록 나는 좀 더 여유 있는 표정을 지었다.  


출근 카드를 찍고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눈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는데, 책상 위가 허전했다. 옷을 벗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뭐지? 아뿔싸! 


책상 위에는 반드시 있어야 할 랩탑이 온데간데없었다. 출장 때문에 공항엘 갔는데 여권을 안 가지고 온 기분이 이럴까? 전쟁터로 나오면서 총을 두고 오다니…… 적군이 눈앞에 나타날 때까지 그걸 새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니. 지하철에서 컴퓨터 가방을 들고 있던 승객들을 보지 않았던가? 나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연휴가 시작되기 전, 메일을 봐야 할 일이 생길지 모르기에 랩탑을 챙겨 갔었는데 켜보지도 않고 그만 집에 두고 온 것이었다. 나는 연거푸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이 사태를 어찌 해결해야 할지 고심했다. 


랩탑 없이 하루 종일 자리에 앉아 있는 건 무리였다. 창가의 구석진 자리긴 하지만 오가는 사람들도 있고, 훤한 책상을 보고 랩탑은 어디 있냐고 물어볼 거였다. 주말이 끝나고 월요일에 노트북을 들고 출근하는 직원들에게 농담조로, 켜보지도 않을 거면서 무겁게 왜 노트북을 들고 갔냐고 농을 하고는 했었는데, 그 일이 나에게 벌어질 줄이야. 


누구에게 마땅히 랩탑을 갖다 달라고 할 사람이 없었다. 아파트 관리실에 현관문 비번을 알려주고, 오토바이를 불러달라고 할까 생각해 보았지만 적절한 방법 같지가 않았다. 오전은 어찌 때우고 점심때 후딱 집에 다녀올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당장 자리에 앉아서 할 일이 없었다. 아무리 빨리 다녀와도 집까지 왕복 두 시간은 족히 잡아야 했다. 




나는 헛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팀원에게 몸이 안 좋아 수액 좀 맞고 오겠다며 나는 사무실을 뛰쳐나와 지하철 역으로 뛰기 시작했다. 누가 나를 찾기 전에, 아무도 모르게 감쪽같이 다녀와야 했다. 나는 미끄러지듯 계단을 뛰어 내려가 개찰을 하고 막 떠나려는  지하철에 올라탔다. 최대한 환승역 가까운 곳으로 문이 사람들을 비집고 자리를 옮겼다. 환승역에 내려 인파를 뚫고 머리칼을 휘날리며 다시 뛰었다. 지하철 안에서도 나는 계속 시간을 보며 계산을 했다. 


아침에 탔던 그 지하철 역에 내려 계단을 삽시간에 달려 올라가 개찰구를 빠져나가, 나는 숨을 고를 새도 없이 다시 집을 향해 뛰었다. 바닷물이 갈라지듯 사람들이 길을 비켜 주었다. 입안에 침이 모두 말라 숨을 쉴 수가 없었지만, 조금이라도 시간을 단축해야 했다. 나는 비밀요원처럼 현관문 비밀번호를 재빠르게 누르고 신발을 신은 채 안방으로 뛰어 들어가 노트북이 담긴 에코백을 가슴에 안고 다시 지하철역으로 뛰었다. 냉장고를 열어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싶었지만 그럴 새가 없었다. 차가운 노트북을 가슴에 꼭 안고 백 미터 달리기를 하듯 있는 힘껏 뛰고 또 뛰었다. 사람들은 필시 나를 보며, 생사를 다투는 급한 일이 있어서 뛰는 줄 알았을 것이다.  


나는 사무실로 돌아와 숨을 헐떡이며 자리에 앉아 랩탑을 켰고, 목덜미의 식은땀을 천천히 닦았다. 사무실은 여느 때처럼 조용했고 내 거친 숨소리만 정적 속을 떠다녔다. 시계를 보니 집까지 왕복 1시간 30분 만에 주파한 경이로운 기록을 새웠다. 이 기록을 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컴퓨터의 전원을 켰다. Life’s Good. 이란 로고가 화면에 뜨자 내 심장에도 드디어 빛이 새어 드는 것 같았다. 


이미 차갑게 식어버린 커피를 마시며, 다시는 쓸데없이, 아무리 긴 연휴라 하더라도 필요치 않으면 랩탑은 가지고 가지 말아야지 다짐했다. 열정을 어필하려다가 노는 데 정신이 팔려 되려 정신 나간 여자가 될 뻔했다. 


늘 하던 대로 해야 어디 빠지지 않게 최소한 중간은 간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은, 나 혼자만 숨 가빴던 시월의 아침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재즈 카페의 도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