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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나 Apr 26. 2021

스물여덟, 갑자기 귀촌.

Prolog



여느 날과 같으면서도 다른 날이었다. 늦은 퇴근을 하며 종일 시달린 마음으로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아니, ( 당시 나는 정말로 사는 집이 없었으니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고  수는 없겠다.) 잠시 머무르는 방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가는 내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밖의 풍경들이 소리도 없이 뭉개진 불빛으로만 느껴졌다. 정류장  편의점에서  캔에 만원 하는 맥주와 좋아하지도 않는 편의점 도시락을 사서 나오는데 별안간 손가락이 떨리고 다리에 힘이 풀린다. 마음이라도 쇳덩이 같이 무거웠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중심도 잡지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신발 밑창을 질질 끌다시피 하며 마을버스를 타러 갔다. 걷다가 누군가 실수로  어깨라도 친다면 벼릴 데로 벼려진 별조각 같은 날카로운 눈물이 투둑 하고 떨어질  같았다.





정확한 시작은 모르겠으나 나는 공연히 물음표도 없이 왜, 라고 말하는 날이 많아졌다. 속으로 저 한 음절을 뱉고 나면 끝은 꼭 서러움이 따랐다. 어쩌면 너무 당연한 거라고 쭉 여겼던 일들조차도 갑자기 억울해지기 시작했고, 내가 만들어 온 짧고 어지러운 궤적을 시도 때도 없이 오가며 자주 왜, 라고 말했다. 그 한마디는 불가항력에 대한 원망이기도 했고, 스스로에 대한 책망이기도 했지만 더러는 누군가의 탓이었다.


모르게 멍이 드는 날도 잦았다. 달팽이관이 고장나버린 것처럼 어딘가에 부딪히고선 한참을 있다가 몸 구석에서 나도 모르는 멍자국을 발견했다. 그때가 되어서야 내가 얼마나 습관처럼 무감각한 척하고 있는가도 함께 알아차렸다. 아마 멍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분명 보라에서 노랑으로 퍼지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한두 해 사이 준비되지 않은 채로 내게서 소중한 것들을 조금씩 떠나보내고 있었지만 나는 제대로 울 줄을 몰랐다. 블라인드로 햇빛을 막은 사무실에서, 17인치 모니터 두 개에 그날의 임금을 빚지던 날들이 계속됐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내일이 불안한 청춘이 나를 계절이 어디쯤 인지도 모르고 일하게 만들었으니까.





스무 살 무렵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가던 중 도무지 숨이 쉬어지지 않아서 중간에 내린 적이 있었다. 사람이 많은 마트 같은 데서도 숨이 가빠서 오래 있지를 못했었고. 그때는 그게 그저 그런가 보다 했을 뿐, 마음이 너무 무겁게 어딘가를 짓누르고 있어서 그런 것인 줄을 몰랐다. 하던 걸 멈추고 엄마에게 가서 1년을 살면서 자연스럽게 좋아졌지만, 나는 내가 아프다는 것조차도 몰랐기 때문에 어떻게 낫고 있는지도 몰랐다. 다시 또 몸이 힘든 날 보다 마음이 고단한 날들이 계속되면서 나는 좀 두려워졌다. 예전처럼 그렇게 또 아파지면 어떡하지. 이제 내가 돌아갈 곳은 어디에도 없는데. 난 아프면 안 되는데.


그날 방으로 가며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나를 구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나도록 주먹을 쥐며 마음을 붙들어 맸다. 아마 그건 살겠다는 강렬한 생의 의지와도 같은 것이었겠지. 서울을 돌아보지도 않고 떠날 거야. 아주 아주 멀리, 내가 나를 살피고 돌볼 수 있는 그런 곳으로. 그리곤 나를 철저히 홀로 내버려 둘 거야, 단 일 년이라도 말이야. 그다음의 인생이야 어떻게 되든 모르겠어. 난 그냥, 그냥 행복해지고 싶어, 지금 당장.





한 달 뒤, 1년도 채 다니지 못한 회사를 그만뒀고, 연에 50만 원짜리 폐가를 보지도 않고 계약했다. 가진 것은 고작 보증금 500만 원과 퇴사 직전 모은 300만 원, 마지막 월급 200만 원이 다였다. 나는 그렇게 갑자기 그리고 조용히, 나와 연결된 모든 끈을 놓고 귀촌을 했다. 직업도, 친구도, 연인도, 심지어 꿈조차도.


가난 뒤에 항상 치열했던 내 스물의 초상을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조용히 치를 것이다. 그리곤 물기를 잔뜩 머금어 울어버린 종이 같은 나를 따스한 볕에 내어 죽죽 펴서 말릴 것이다. 2019년 스물여덟의 가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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