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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나 Apr 26. 2021

출발, 하다, 이별

서울을 떠나던 날의 상(像)



새벽 여섯시다. 지난 , 소소했던 송별회의 피로감을 주우며 잠을 쫓았다.



‘내가 지금 무슨 일을 저지른 걸까.’



나는 스스로도 의미를 모르겠는 헛웃음과 마른세수 몇 번을 하고는 빠르게 이불을 개어 박스에 담았다. 시간이 없다. 이삿짐을 옮겨줄 용달 아저씨가 아홉시에 온다고 했는데 짐을 하나도 싸지 못했다. 고단한 서울살이에 여러 차례 이삿짐을 싸고 풀어본 나는 잠이 묻은 상태에서도 능숙하게 침대를 분해했다. 접이식이라면서 접히지도 않는 매트리스를 꾸역꾸역 접어 테이프를 감고 있을 때 전화가 울렸다.



"지금 가고 있어."

"응? 아니 오지 마시라니까 정말루."



동네 언니 둘이 이삿짐 나르는 걸 도와주러 오고 있단다. 나는 전화상인데도 허공에 손사래를 치며 오지 말라고 방방 뛰었다. 그러나 왠지 입이 웃고 있었다. 마침 짐을 쌀 시간은 부족하고 나는 이대로 혼자 서울을 떠나기에 조금 쓸쓸한 참이었다.


용달 아저씨는 늦는다고 연락이 왔고 그 사이 언니들과 나는 부지런히 2층 계단을 오르내리며 짐을 길가에 다 내려놓았다. 야무진 살림을 꾸려가고 있는 분들이라 그런지 이사 역시 전문 업체에서 나온 듯 어찌나 신속한지. 곧이어 동네언니3까지 등장했다. 나는 대체 왜 이 이른 시간에 모여들어 나의 도둑이사를 방해하는 거냐며 눈을 흘겼지만 역시나 입이 또 웃고 있었다. 표정이 솔직한 탓이다.



"대체 이사하는 분이 누구세요?"



뒤늦게 도착한 용달 아저씨는 도대체 이사하는 사람이 이 넷 중 누구인지를 궁금해했다. 나는 이유 없이 그 질문이 웃겨 지금도 꺼내어 생각하며 웃는다.


열한시가 다 되어서야 우리는 인사를 했다. 여러 차례 껴안고 서로의 등을 쓸어 주는 것이 우리의 길고 긴 안녕이다. 가다 휴게소에서 밥이라도 사 먹으라며 언니들은 돈을 쥐어 줬다. 준비된 봉투부터 지갑 속에 있던 28,000원까지 탈탈 털어 건네받으니 어쩐지 떠나기 싫은 기분이 들려고 해 입술을 다물었다.



“나 집 다 고치면 우리 집에 꼭 놀러 와. 알았지? 꼭.”



인사치레 같은 단출한 말들을 남기며 재회의 가능성으로 이별을 달래고는 서둘러 용달차에 올랐다. 트럭이 언덕 아래로 내려갈 때까지 서 있던 그이들의 모습이 정오의 실루엣으로 여전히 남아있다.





5년 동안 빼곡히 추억을 흘려두었던 화곡동 골목을 구불구불 내려 나온다. 그제야 그간 그 골목에 남긴 나의 취기나 과오 같은 것들이 스치고, 그 길을 수도 없이 같이 거닐던 한때 '나의 우주'와도 같았던 사람과 이제는 정말 이별했음이 느껴졌다.


술기운이 살짝 올라 좀 더 일렁거렸던 그 해 가을 달과 좋아하던 계절에 밤을 곁들여 함께 하던 나란한 산책. 봉지 가득 맥주병 달그락 대며 오르던 무더운 언덕과 가벼운 입맞춤이 있던 겨울 아침 출근길이, 그래 결국은 이 모든 몇 번의 계절의 끝에 함께 서 있던 이와 이제는 정말 이별이었다. 고마웠다, 잘 지내라는 상투적인 말들을 몇 자 적어 보내고는 한동안 창밖을 봤다. (미친 여자인가 싶어 잠시 흠칫하셨을 텐데도 모른 채 묵묵히 운전만 해주신 용달 아저씨,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그렇게 나는 떠나왔다. 아니,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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