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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나 Apr 27. 2021

내가 보낸 유배지

폐가가 된, 아니 내 집이 된 시골 폐가



나는 멀미가 심한데 이상하게도 그 날은 도로의 모양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트럭을 타고도 멀미가 나질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나갈 것인지’와 같은 생산적인 고민도 아니었는데 멀미를 이긴 생각이라니! 그도 그럴 것이 잘 스며드는 것만큼이나 잘 떠나오는 것에 대해 그간 병적으로 집착했던 나였다. 나는 ‘잘’ 떠날 궁리를 하며 가고 있었다.





용달 아저씨와 휴게소에서 어색한 점심을 먹고 차로 걸어갔다. 내 짐을 실은 파란 1톤 트럭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렇다 할 가전제품, 가구도 없이 동여매진 짐들을 보니 내 삶의 허무가 마치 저 짐의 무게만큼 느껴진다.


1톤을 가득 채운 변변한 물건 하나 없는 삶.


저것들을 잃지 않기 위해 아등바등 살았다니. 그렇게 생각하자 막 시작한 이 여행길이 조금 울적하게 느껴졌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랑요, 너무 뜨겁지 않게 라테 하나요. 아! 바닐라 라테로요.”



지금 이 순간 때려 넣어 나를 울적한 기분에서 꺼내 줄 수 있는 건 역시 카페인이지. 아저씨 거는 프리미엄이 붙은 따뜻하고 달달한 라테를 샀다. 출발할 적에 내 눈물을 못 본 체 해 주신 배려의 작은 보답으로.





얼음이 다 녹아 보리차가 되었을 때, 그 마저도 쪽쪽 빨아 마셔 소리가 날 때쯤 목적지를 알려주는 표지판이 보였다. 아저씨는 여기가 맞냐고 거듭 물었지만, 나는 잘 모른다고 했다. 아저씨는 순수를 점찍은 내 얼굴을 두어 번 돌아보셨다. '기이하고도 철없는 아가씨로세.' 하는 말소리가 들리는 듯한 고갯짓이었다. 아저씨 생각에 내가 저 갈 곳도 모르는 대책 없는 반푼이로 보였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어 혼자 웃음이 나 크큭거렸다. 어쩐지 아저씨는 젊은 아가씨가 왜 이런 시골로 오는 것인지 묻지 않았고 나는 그런 그가,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의 인생을 어딘가로 실어 주어야 하는 고된 노동에도 함부로 지쳐버리지 않은 멋진 사람이라 생각했다.





오후 세시, 목적지 가까이 오자 사진으로 한 번 봤다고 눈에 익은 지붕과 감나무가 보인다. 마당으로 조심스레 차를 몰고 들어갔다. 내 집에 왔다는 안도감 대신 마침내 오늘 하루가 끝나가려고 한다는 기쁨이 몰려온다.



“여기 무슨 유배지 같네요, 껄껄.”



트럭에서 내려 짐을 풀던 아저씨가 한마디 건네셨다. 그런 표현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집이긴 했다. 한동안 사람이 살지 않아 거미줄이며 박카스 병 같은 게 사방에 널려 있었고 헌 집에 어울리지 않는 삐딱한 샤시문과 바람이 세게 불면 금방이라도 열려버릴 것만 같은 창호지 문이 함께 달려있었다. 들어가서 빠질 줄 모르는 녹슨 열쇠가 꽂혀있는 문을 열면 퀴퀴한 묵은 냄새와 함께 쥐와 벌레들이 재빨리 몸을 감추는 그런 집이었다.


창고방 하나에 우선 모든 짐들을 몽땅 옮겨 두었다. 딱히 누가 가져가서 아쉬울만한 물건은 없었지만 면에 나가 자물쇠를 사서 막힌 열쇠 구멍 아래 달아두고, 옆 마을에 있는 언니네 집으로 향했다.





길었던 하루를 씻어내며 생각하니 유배지란 표현이 썩 잘 어울린다. 그래, 그 집은 유배지가 맞을지도 모를 일이다.





살아가기에 막막한 그 집을 눈앞에 두고도 주저앉아 왁- 하고 울음을 터뜨리지 않은 건, 그곳으로 나를 떠민 건 나 자신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왜 내가 나를 여기로 보냈는지, 그리고 난 그걸 왜 여기 도착하고 나서야 생각하는지, 헛웃음이 나는데 이상하리만치 묘한 개운함이 있다. 딱 그런 기분으로 나는 지금 유배지에 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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