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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나 Apr 28. 2021

다른 생의 흔적 지우기

폐가 수리의 제 1 단계



뒤를 돌아보지 않겠다는 마음이 간절해서 현실적인 문제들은 충분히 모른 체할 수 있었던 한 달이었다. 정신없이 시골에 도착해서야, 늦었지만 생각을 다듬을 짧은 시간을 내게 주기로 했다. 이사하고 일주일 정도는 집과 짐을 그대로 방치해 두었다. 당장 백수가 된 것은 그래도 신나는 일이었으나 집은 어디에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몰랐다. 추워지기 전에 서둘러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타일, 시멘트, 벽지, 타일 컷팅기 같은 공구를 인터넷 장바구니에 담으면서 '내 인생에 참 재밌는 일이 벌어지고 있구나' 생각했던 건 다행이다. 그래도 내가 이 일을 감당할 만한 그릇이긴 하다는 거니까. 굵직하게 얼마를 쓸 건지, 어떻게 할 건지 계획을 세웠다. 사실 그 계획이란 것이 너무도 하찮아서 계획이란 이름을 붙이기는 쑥스럽다.



<내 계획 - 수리 비용은 최대한 적게, 200만 원 안에서 해결. 모든 건 다 내 손으로 나 혼자 하기. 내 소유의 집이 아니니 너무 욕심부리지 말자.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지칠 때까지 나를 내몰지 않기. 여기 온 이유를 늘 생각해. 부디 지금 순간에 살아 있자구.> (정말 이렇게 적혀 있다.)



폐가 수리의 첫 번째 단계는 그 집에 남아 있는 사람의 흔적을 깨끗하게 지우는 것이다. 여느 시골 폐가의 사연처럼 이 집도 할머니가 돌아가시며 함께 버려진 집이었다. 가끔씩 자녀분이 텃밭에나 깨, 블루베리 같은 것을 가꾸러 들르는 집이었지 내부는 아주 오랜 시간 사람의 손길을 잊은 듯했다. 집 안은 할머니의 버려진 살림살이가 온기도 없이 식어 있었다. 해가 들지 않아 기분 나쁜 습기가 공중에 떠도는 부엌에는 식구들이 많이 오기를 기다리는 '스뎅' 밥그릇들이 그득하다. 쓸쓸한 자태로 위태롭게 포개져 싱크대 하부장에 쌓여 있다. 고조선 유물처럼 생긴 뚜껑도 없는 참기름병과 암모나이트 같은 입자 조미료들도 역할을 잊은 채 굳어 있다. 깔끔을 떠는 편인 나는 보기만 했는데도 복통으로 응급실에 실려갈 것만 같았다. 이런 부분에서 맷집이 너무도 약한 내가 지저분한 폐가를 고친다는 게 덜컥 겁이 났지만 어쩔 도리는 없었다. 일은 너무도 크게 저질러졌고 마스크와 장갑만이 내가 의지할 유일함이었다.



다시 생각해 봐. 확실해?

네가 이 더러움을 참을 수 있다고? 그게 가능한가-



스스로도 약간 놀랐지만, 가능했다. 헛구역질을 하면서도 나는 꿋꿋하게 모든 물건과 그 물건들의 주인이 남긴 흔적까지 전부 비워내려 애썼다. 한 생의 끝맺음이 이런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이 조금 안쓰러웠지만,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할머니의 생을 내 멋대로 절하하지는 않기로 했다. 나는 그저 기도하는 마음이나 갖자 하였다. 그리곤 벽지를 뜯어내기 시작했다. 세월을 오래 덧입어 벽지는 벽만큼이나 두꺼워져 있었는데, 끝도 없는 작업이어서 어느샌가 나도 모르게 기도 내용이 바뀐 것 같다.



‘거기 어떤 분이라도 듣고 계신 거 알아요. 저, 이 벽지는 언제 다 뜯을 수 있을까요? 빨리 끝내게 해 주시면 안될까요? 제발요, 착하게 살겠습니다.’



일주일간 벽지를 뜯었다. 역시 기도는 아무도 들어주지 않은 것 같았다. 벽지 다음 제거의 대상은 장판이었는데, 예상대로 방마다 3, 4장이 겹쳐 깔려 있었다. 한겨울의 냉기를 장판을 겹쳐 까는 것으로 막으려고 하셨던 것일까. 조각조각 남은 자투리 장판이 덧대어져 있는 모양새가 집주인의 성격을 보여주는 듯했다.





겨울의 중심으로 접어들 때까지 홀로 집을 고치며 몸이 너무 고돼서 사실 이런저런 생각이 잘 들지 않았다. 오로지 지금 하고 있는 행위 자체에만 집중하게 됐다. 그래도 하루를 마치고 샤워를 할 때나 자려고 누울 때면 한동안 꼭, 집에 대한 생각을 했다. 벽지나 장판에 대한, 정확히는 거기에 포개진 타인의 생에 대한 사색을 이렇게 오래 할 줄은 몰랐다.


나도 그렇게 여기저기 삶을 묻히고 다닐 것을 생각하니 나를 주인으로 삼은 모든 물건과 공간에 이상한 친밀감과 애착이 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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