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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나 Feb 24. 2022

풀기 어려운 사주라고요..?



역술가는 말했다.



“그냥 하고 싶은 걸 하세요.”



가만 보면 나는 언제나 그랬다. 초등학교 6학년 때는 돌연 엄마에게 유학을 보내 달라고 했다. 당시에 엄마는 타지에 보내 놓은 두 자식은 물론이거니와 시골에 남겨진 어린 나와 심지어 자신조차도 돌보지 못할 만큼 지쳐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안된다고 말했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유학은 해외가 아니라 당시 지방 도시에 있던 지인 C에게 보내달란 거였다. 나는 분수를 아는 꼬맹이였기에 캐나다나 호주보단 그나마 가까이 있는 C에게 구구절절 편지를 보냈고, C는 과장된 나의 호소에 놀라 엄마와 통화를 하기에 이른다. (사실 나는 엄마의 퇴근 시간에 맞춰 C에게 보낼 눈물 젖은 편지지 위에서 잠든 척한 게 통했다고 생각한다.) 12년을 보낸 시골을 그런 식으로라도 벗어나고 싶었다. 정확히는 나의 상황과 나의 가난을, 또 나에 대해 전혀 아는 이가 없는 곳에서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이런 나의 마음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겉으로 보기에 나는 꽤 멀쩡해 보였다. 당시 필수 사설 문제집이었던 흔한 전과 한 권을 사지 못했지만 늘 1등을 사수했고 엄마는 학교에 한 번도 오지 않았지만 학생회장도 했고 방학 때마다 무료로 쌀을 받아 가는 아이였지만 그늘 같은 건 없어 보였다. 그러나 나는 지나치게 선명하게 그 시절을 혼자 힘겹게, 아주 힘겹게 지나고 있었다.


그렇게 마침내 원하는 대로 떠나 머물게 된 곳에서의 날들은 생각한 대로였다. 모두가 나를 제대로 몰랐기에 나는 나에 대해 굳이 숨기지도, 그렇다고 부러 드러내지도 않을 수 있었다. 나의 지독한 결핍과 잠시 멀어져 평범할 수 있었던 그 시절들이 지금까지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지만 그렇다고 모든 날이 유쾌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본격적으로 막을 올려버린 나의 사춘기와 지금은 기억도 잘 나지 않는 몇몇 이유가 나를 조금씩 고향으로 부르고 있었다. 당시 많은 것을 감당해야 했던 C에게 신세 지고 있는 것에 대한 미안함이 커지고, 대체로 약아빠진 도시 아이들과의 교우관계가 슬슬 질리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어느 날 받은 반찬 택배 속에 있던 엄마의 서툰 메모를 시작으로 그 모든 감정이 하나의 모스부호처럼 이어지던 중학교 2학년 끝 무렵, 때가 되면 다시 강으로 회귀하는 연어처럼 나는 집으로 돌아갔다. 어떻게 보면 이미 정해져 있던, 아주 뻔한 일이었을 테다.


여담이지만, 내가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떤 날엔가 술에 취한 엄마가 웃으며 이런 말을 했다. 그렇게 엄마 곁을 떠나가고 싶었느냐고. 엄마는 혼자서 좀 외로웠다고 했다. 주위에선 일찍 철이 든 내가 딱하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저 자신밖에 볼 줄 몰라 홀로 도망치기에 급급했던 이기적인 아이에 불과했던 것일까. 그런 생각들이 티셔츠 아랫단을 얼마나 축축이 적셨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15년이 넘게 지난 지금은 내가 집을 떠난 그 시간 동안 혼자 남겨져 있었을 그녀를 생각하며 그 시절의 나보다도 더 많이 울게 되었다. 나아진 게 있다면 그래도 지금은 손수건을 쓴다는 것 정도려나.





내 멋대로 후회와 함께 돌아온 후 1년 반이 지나 고등학교에 진학할 시점에 다시 또 온전한 나의 의지로 집을 떠나가게 된다. 현실 도피를 위해 가로질러 갔던 이전과는 조금 다르게 다시 떠날 때 내 모습은 세로 오르는 것 같았다. 얼마간 떠나 있을 때 깨달은 바가 있다면 세상은 내 생각보다 불공평한 곳일지 모른다는 거였다. 나와 비슷한 해에 함께 태어났지만 내가 마음과 눈물로 자라나는 동안, 그 아이들은 다른 면으로 자라난 것 같았고 어쩌면 타고난 것도 같았다. 다니는 학원의 수와 가방과 신발, 선행학습, 사는 아파트 따위가 그 아이들과 나의 격차를 걷잡을 수 없이 벌리고 있다는 걸 몰랐다. 그건 모의고사 성적표에 나오는 백분율로는 결코 알 수 없는 것들이었다. 내게 그들은 마치 치트키를 쓴 것 같아 보였다. 나는 ‘Show me the money’ 같은 치트키는 모르지만, 이왕 같은 맵에서 싸워야 한다면 나도 어떻게서든 결코 만만하지 않은 경쟁자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간에 비해 성적이 잘 나오니 머리가 좋은 게 아닌가 착각했던 게 오류의 시발점이었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떠나더라도 이번엔 엄마 곁에 함께 할 사람이 있었다. 이 점이 가장, 떠나도 괜찮은 이유였다.


그렇게 다시 떠나와 기숙학교에서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지난 시간을 보충하기는 쉽지 않다는 걸 깨달았을 때, 그것이 치트키 따위와는 상관없이 오로지 나의 탓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이미 지옥의 고3 문이 열려 있었다. 조급한 마음과 달리 좀처럼 따라주지 않는 자신에게 절망하며 나는 이도 저도 아닌 수험생이 되었다. 그러나 수능이라는 과업 말고도 많은 것들이 나를 쥐고 흔들고 있었다. 10대의 마지막이 폭풍의 가장자리처럼 느껴지는 것은 비단 나에게만 그런 게 아니긴 했다. 나처럼 타지에서 왔던 한 친구는 제 나름의 이유로 자퇴를 했고, 자퇴까지 할 깡은 없었던 나는 결국 담임선생님을 찾아갔다.



“쌤. 저 엄마가 보고 싶어요.”



진심이었다. 당시에는 나의 뜻을 관철할 수 있으면서도 모든 심정을 담은 궁극의 한 마디였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보니 전면에 엄마를 내세운 게 꽤 비겁했다. 내가 담임이었다면 “영양가 풍부한 급식 먹고 이런 헛소리 하는 거 얼마나 영양사 선생님께 실수인 줄 아니.” 하며 돌려보냈을 텐데, 여리고 차분했던 담임 선생님은 조용히 나를 타이르시곤 엄마와 통화를 해 보겠다고 하셨다. 오히려 지나가던 수학 선생님이 안타까운 마음에 나를 불러내 다시 생각해봐라, 지금이 이럴 때냐며 다그치셨다. 하지만 나는 기숙 생활에 지쳤다는 핑계로 아무것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결국은 또 내 멋대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후폭풍은 엄청났다. 전에 받아본 적 없던 고3 전용 아침 밥상과 조 여사의 자차 등교 지원과 택시 하교라는 유례없는 전폭 지지를 받았지만 입시는 처참히 폭파되었고, 고향 선배들과 친구들이 농어촌 전형으로 조금은 수월하게 대학 문을 열 때 아무것도 못하는 자격요건에 눈만 높았던 난, 결국 재수를 선택하기에 이른다. 재수 역시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순전히 내가 고집한 것이었다. 종종 그때 수시에 합격했던 대학에 그냥 진학했더라면 지금 무얼 하고 있을지 생각하곤 한다. 남다른 길을 간다는 알량한 자존심을 가진 고졸 백수가 아니라 몇 천의 두둑한 학자금 대출을 가진 대졸자 도비가 되었을까. (나의 기회비용이 배가 아플 만큼 그럴싸하지는 않아서 언제나 다행이다.)


이쯤 되니, 나의 선택들은 하나같이 어쩐지 눈물과 후회로 점철된 최악의 한 수처럼 보이지만 놀라지 마시라. 그 후로는 한껏 진보한 선택들을 했다. 어떤 방향으로 진보했느냐를 따지자면 벤자민 버튼의 시간이 거꾸로 가는 건 우습고, 얼마나 진보했느냐를 말하려면 이 페이지가 모자란다. 무엇보다 내가 깊은 수치를 느낄 수 있으므로 생략하겠다.





역술가는 또 말했다. 나는 고집이 세고 자존심이 또 말도 못 하는데, 그런 기질 때문에 눈이 높아 웬만한 남자는 남자로 보질 않는다고. 아아! 제가 외로웠던 이유가 거기 있었던 거군요 선생님, 눈물 좀 훔치고 올ㄱ… 계속해서 나는 물었다. 그는 신이 아니므로, (점쟁이는 더더욱 아니다.) 아니 설령 신이라고 하더라도 내 앞날을 그의 말에 기대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기에 “전 뭘 하면 좋을까요?” 대신에 내가 지금 하고자 하는 일이 사주 속 성향과는 어울리는지 물었다. 그의 풀이를 간단히 따르면, 주변의 말로 좌지우지될 성격이 아니니 스스로가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게 중요하고, 찾았다면 그냥 그걸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말도 덧붙이셨다.



“이런 사주는 풀기가 어려워서,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어요.”



세상에나. 뭐가 이렇게 쉬운 거 없이 다 어렵단 말인가. 나는 다르게 두 번 웃고 말았다. 여기서 “이런”이라는 수식이 어쩐지 긍정의 꾸밈 같이는 느껴지지 않아서였고, 풀기 어렵다는 말이 내게는 어떤 여지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그 후로 30분간 풀기 어렵다는 나의 사주풀이를 듣다 보니, 혹시 이건 <사주-절망 편> 대개봉인 건가 싶었다. 지금 내 상태를 돌아봤을 때 확실히 절찬리에 상영 중이긴 했다. 하지만 이상한 건, 그 집 문을 나설 때의 나는 미용실에서 머리 손질을 막 마친 사람처럼 어딘가 좀 가벼워진 느낌이었다는 것이다. 내 인생의 후면 블랙박스를 훔쳐본 듯한 그 인상 좋은 아저씨의 명쾌한 풀이가, 내 삶의 어떤 방향으로 크게 작용하지는 않을 테지만 그와의 대화는 생각보다 꽤 즐거웠다. ‘어쩐지 눈물과 후회로 점철된 최악의 한 수처럼 보이는’ 나의 지난 선택들이 몇 장의 만 원짜리로 값을 치르며 뜻밖의 위로를 받은 것 같았다. 아무래도 훌륭한 거래였다.


역술가 아저씨는  사주를 풀어볼  이미 알아채셨을지 모른다. 어떤 호기심과 명리학에 대한 존중으로  발로 당신을 찾아간 것이지만 내가 그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라는 (웃음). 하지만 의외로 나는 그의 해석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여과 없이  가지를 또박또박 마음에 새겨두었다.  후회의 날이 나를 향해  끝을 뾰족이 세울 때마다 지난했던 삶을 돌아보며 다시  새로운 날을 벼리게 만드는 악순환이 반복되곤 하지만, 결국은  날이 누구에게도 아닌 지금껏 하고 싶은 대로   나에게로 향해 있다는 것은 새삼 다행스러운 일이라 여겨진다. 그리고 그의 입을 통한  문장을 누구에게나 조심스럽게 권해보려  글을 시작했다.  너머의 당신도 생의 여지를 가져본다고 나쁜  없지 않을까 싶어서. 그리곤 새삼 다행스러운 일이라 여길지도 모른다.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 있어요.

그러니 결국 당신은, 그냥 하고 싶은 걸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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