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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랑 Jul 07. 2019

아빠가 건네는 주말의 요리들

내가 받은 사랑에 대한 기록



나의 독립을 며칠 앞둔 어느 주말 아침, 부엌에서 도마 소리가 들린다. 아마 아빠일 것이다. 엄마가 여행을 떠났는데, 내가 비실거린다고 생각이 들 때면 아빠는 부엌으로 향하신다. 그리곤 이내 찌개가 등장한다. 그것은 때론 어묵탕, 때론 김치찌개, 마파두부 혹은 된장찌개다.


아빠는 간단한 노크를 곁들어 내 방문을 빼꼼히 연다. 어제의 나는 연이은 야근으로 갈라진 목소리를 내뿜으며 집안을 돌아다녔다. 회사 욕도 좀 하고, 상사 욕도 좀 하면서. 아침이면 또 말짱하게 모로 누워 핸드폰을 보며 키득이는 딸의 모습을 아빠는 한참 바라보았다. 이 태연한 일상을 가능한 오래 눈에 담고 싶어 하는 아빠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나는 애써 행동을 유지했다.

“딸, 아빠가 어묵탕 끓일 거니까 아침 먹자~”
나는 시큰둥하게, 아침은 크게 생각 없지만 어묵탕은 먹어보겠다는 모양새로 두 번 정도 끄덕인다. 아빠는 어묵을 좋아하고, 아빠를 많이 닮은 나도 어묵을 좋아한다. 투박하게 썰린 야채들과 썰리지 않은 어묵들이 들어있을 아빠의 식탁으로 향했다.

오늘 어묵탕의 별미는 가득한 어묵 위에 화룡점정으로 놓인 반숙. 아빠는 6분 30초를 끓이면, 내가 딱 좋아하는 정도의 반숙이 된다고 일러 주셨다. 그리고 어묵은 요리 완성 40초 직전에 투하해 끓이면 그 식감이 탁월하다고 강조했다. 커피를 내리고 남은 원두 가루들을 프라이팬에 볶으면 키친타월보다 더 깔끔하게 유분기를 없앨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제 곧 아빠의 처마를 떠나 혼자만의 부엌을 가질 딸의 하루들이 염려되서일까. 어쩌면 아빠가 아는 전부일지도 모를 몇 가지 팁들을 정확히 설명해 주시려고 애를 썼다.

아빠의 뒷모습에서 나는 이별을 준비하는 사람을 보았다. 맞다. 아빠와 나도 이별을 하는 거다. 내가 경험해 본 적 없는 또 다른 종류의 이별이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 문득 실감했다. 음식 사진을 좀처럼 찍지 않는 나지만 나도 모르게 핸드폰을 들고 와 어묵탕의 사진을 찍었다. 간직하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을 선명하게. 사진으로도, 글로도. 아빠가 건네는 주말의 요리들은 내게 일상이었다. 하지만 돌이켜 보니 당연하지 않은 사랑의 말들이었고, 나의 끝없을 감사였다.

대학생이 되던 해, 입학을 앞둔 겨울밤 아빠와의 산책길을 또렷이 기억한다. 아빠와 유머 코드가 가장 잘 맞기에 대체로 우스개 소리를 하지만, 그 날의 아빠는 꽤 진지했던 것 같다.

“아빠는 이미 기성세대야.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점점 그렇게 될 거야.
그러니 네가 옳다고 믿는 바가 있거든
아빠를 설득시켜 네 세계로 나아가.
반대를 무릅써.”


아빠의 말들이 나의 세계로 인입돼 몇은 사라졌을 테고, 몇은 각인되어 삶의 면면에 모습을 드러내곤 한다. 어쩌면 나에게 이 말은 지금 이 순간, 발아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제 집을 떠나 독립세대주가 된다. 스스로를 온전히 책임지는 어른의 세계로 나아간다. 지금까지는 나를 사랑하는 존재들에게 의무를 양도받지 않고 모르는 척 기대어 살기도 했다. 내가 태어난 순간 주어진 디폴트 값이 부족하지 않았다는 걸, 운이 좋게도 충분했다는 걸 안다.


그럼에도 나는 이 세계를 뚫고 새로운 세계로 넘어간다. 용기 있는 선택에 뒤따를 수많은 책임에 숨 막힐지도, 어쩌면 울렁이는 마음을 다독여야 하는 밤들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후퇴를 모르는 사람처럼 씩씩하게 나아갈 것이다. 그게 내가 받은 사랑에 대한 예의이자 내 두둑한 밑천이므로.





아빠의 어묵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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