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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랑 May 30. 2019

스무살처럼 사랑하는 삼십대

우리 모두 바보가 되어보아요



불과 일주일 전까지, 세상에 사랑은 없다고 부르짖던 친구가 전혀 다른 눈빛으로 나타났다. 수화기 넘어 콧소리가 콧소리가 잔뜩 묻은 게 범상치 않았다. 통화 대신 집으로 오라고 했더니 평소 타지 않던 택시까지 타고 냉큼 달려왔다.


식탁에 앉자마자 봇물이 터진다. 입이 간지러워 참을 수가 없었다며, 지난주 소개팅 이야기를 시작했다. 소개팅 다음날, 그다음 날도 연이어 만났다고 했다. 그리곤 이내 손을 잡았다고 말했다. 술도 한 모금 없이 양볼은 이미 발그레 해졌다. 와우. 만난 지 3일 된 남녀가 손을 잡았다는 사실은 그리 놀랍지 않았다. 다만, 그 언젠가 저 표정을 본 적이 있었는데… 데자뷔처럼 떠오른 기억 때문이었다.


바야흐로 중2, 질풍노도 시절부터 서로를 보아왔다. 각자에게 펼쳐진 인생의 관문을 기꺼이 함께 해주었다. 서로가 빚어낸 영광과 암흑의 역사, 그리고 그 이면을 기억해주고 있는 나의 벗. 그 시간 동안 보았을 수 만 가지 모습 중, 마치 처음 사랑에 빠지던 스무 살 그때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랑의 도파민 때문일까. 식탁 의자를 앞뒤로 깔닥대며 앉아있던 그녀가 의자와 함께 발라당 뒤로 넘어졌다. 그러다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나 다시 자리에 앉았다. 거의 완벽한 슬랩스틱 코미디였다. 정신을 되찾고 우리는 마주 보며 정신없이 깔깔거렸다. 아… 정상적으로 사회생활을 하는 30대 여성이 분명한데… 나사가 거의 풀린 바보가 되어 있었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사랑에 풍덩 빠진 사람을 퍽 오랜만에 보았다. 이렇게 온 세상이 다 알도록 두근거려하는 바보들은 20대에서 30대로 건너오며 모두 멸종된 줄 알았는데, 여기 버젓이 살아 내 앞에 있다. 일주일 사이 이렇게 바보가 되다니! 남녀관계의 오묘함과 사랑의 위대함 앞에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신기한데 웃기고, 한오백년 놀려먹을 흑역사를 잔뜩 남겼으면서도 축하하는 밤이었다. 우리는 생수로 끝없이 잔을 부딪히며 군만두와 떡볶이에 취해가고 있었다.

우리가 스무 살이던 시절, 사랑의 기회는 도처에 널려 있었다. 기꺼이 바보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능숙하게 굴기 시작했다. 내 마음을 숨기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상대의 마음을 가늠하는 일도 마찬가지였다. 더 이상 바보가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거나, 아니 어쩌면 더 이상은 바보가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면서.


나의 바보 친구는 열렬히 사랑하겠노라 선포했다. 분주하고 횡설수설하지만 행복해하는 친구와 함께 그의 카톡 사진을 이리저리 보았다. 앞으로 종종 듣게 될 친숙할 그의 이름, 직업, 거주지 그리고 그분이 남긴 주옥같던 멘트들도 귀담아 들어주었다.

사랑하는 내 친구가 내게 보여준 모습들은 내 삶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좀 다른 구석이 있었다. 내가 연마하고 있는 기술은 들어온 소개팅을 보다 정중히 거절하는 방법. 하지만 친구는 그 사이 꽤 열심히 소개팅을 했다. 아무리 실망스러운 일들이 있어도 그다음 사람은 다를 것이라 기대했다.


이따금 나의 등짝을 때리며 “야! 밥 한 번 먹는 게 대수냐?”라는 잔소리를 해댔다. “너나 잘해”라는 나의 응수에 진짜 짝을 만나 돌아왔다. 내 마음에 퍼지는 잔잔한 파동들. 그 후 만난 또 다른 친구가 건넨 소개팅 제안에 흔쾌히 응, 해보았다. 아마 이번 생에 세 번째 소개팅이 될 것이다.



지금 듣는 음악 Nujabes <After Hanab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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