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찰랑 Dec 22. 2019

엔드게임

1인 가구 생활기



용기가 없었다. 죽음을 인정하고 마주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그 시간이 고약하게 느껴져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뤘다.


너는 한 때 생기있었다. 찬란하고 탐스러웠으며 이따금 때가 아닌 때에도 마주하고 싶었다.


무수한 가능성을 품은 씨앗이던 너는 어땠을까. 단단히 뿌리내린 채, 땅의 온기, 바람의 무쌍함, 무르익은 태양을 온 몸으로 맞이했을 것이다.


그렇게 청년이 되어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선택지가 펼쳐졌겠지. 생에 처음으로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위해 기꺼이 다른 선택지들을 포기하는 경험을 해야했을 거다.


아삭함을 강조한다면 보쌈을 감싸는 힘있는 배추가 되었을 테고, 시원함을 중요시했다면 배춧국이 되었을 테고, 차별화를 시도했다면 배추전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너는 정석의 길을 택했다. 민족의 소울푸드, 김장김치가 되는 일이었다.


그 길을 택하며 많은 친구들과 함께 오래오래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 예상했을테지. 하지만 누구에게도 너의 진가를 내보일 기회를 얻지 못하고 끝내 아름다움을 잃었다.


손써볼 틈이 없었다고, 내게 김치 냉장고는 사치일 뿐이라고 말해보아도 위로가 되지 않는 핑계일 뿐이겠지.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오늘은 잠시 호흡을 멈추고 끝내 너를 모두 정리했다.


우리 또 인연이 닿는다면 서로를 포기하지 말자. 네가 품은 대지와 태양의 기운을 받아들여 내 안으로 느껴보겠다. 그러나 이번은 여기까지다.


잘가라, 묵은 김치.




매거진의 이전글 성실히 머무는 것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