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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라 Aug 11. 2019

74. 파블로 네루다에게 영감을 준
'산티아고'를 가다

칠레-산티아고


해발 4,000m가 넘는 미스칸티 호수 등 알티플라노 기행을 다녀온 후 늦잠을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니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오늘은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로 가야 한다. 짐을 싸서 배낭을 걸머지고 아르마스 광장으로 걸어갔다. 우리는 안데스 음악이 흘러나오는 어느 카페에 들어가 늦은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버스 터미널로 가서 오후 7시 30분발 산티아고 행 버스표를 샀다. 출발시간까지는 상당한 시간 여유가 있었다. 우리는  골목시장으로 가서 어슬렁거렸다. 산티아고까지 가려면 멀고 먼 길이어서 물도 사고 간식거리도 샀다.  


아르마스 광장에서는 두 원주민 청년이 차랑고와 북을 울리고, 산포냐를 불며 '엘 콘도 파사'를 연주하고 있었다. 오늘따라 어쩐지 곡조가 더 구슬펐다. 사막의 오아시스에도 독수리는 날아오겠지. 남미를 찾는 여행자라면 이 곡은 좋든 싫든 안데스 산맥을 넘나들며 실컷 들어야 할 운명에 처해진다. 버스가 출발할 시간이 다 되어 우리는 엘 콘도 파사의 애잔한 곡조를 뒤로하고 터어 버스(Tur Bus) 정류장으로 갔다. 이제 아타카마 사막도 떠나가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산 페드로 아타카마에서 산티아고로 출발하는 Tur Bus. 1630km로 30시간이 넘게 걸린다. 


"여보, 이곳에서 산티아고까지는 하루 반나절이나 걸려요. 그러니 화장실도 한 번 더 다녀오고, 저혈당을 준비도 단단히 해야 해요. 초콜릿과 주수는 잘 넣어 두었지요?"

1630km, 버스로 30시간

"네, 작은 배낭에 잘 넣어 두었어요. 염려 마시고 당신 준비나 잘하세요."

"하하, 고맙소. 자 여기 목베개에 바람도 넣었으니 미리 착용을 하세요."


여행자들이 무거운 배낭을 걸머지고 하나 둘 버스에 올랐다. 드디어 여행자들로 만원이 된 버스는 저녁 7시 30분 정각에 출발했다. 산 페드로 데 아타카마에서 산티아고까지는 1,630km의 긴 여정으로 30여 시간이 넘게 걸린다고 한다. 서울에서 목포를 무려 5번이나 왔다 갔다 하는 거리다. 길이 너무나 멀기 때문에 저녁이면 담요도 주고 식사 때가 되면 차장이 식사와 차를 배급해 주었다. 운전수도 2명이 타고 서로 교대를 했다. 


버스는 칼라마를 지나 아타카마 사막을 가로질러 안토파가스타를 향해 달려갔다. 갈색의 사막이 끝없이 이어졌다. 해가 기울자 주변이 점점 어두워지고 이윽고 아타카마 사막에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태양은 대지와 하늘을 붉은색으로 가르며 사막 속으로 사라져 갔다. 


사막에 지는 노을은 여인의 속살처럼 아름다웠다. 짙푸른 하늘 아래 태양이 떨어지고 나면 세상 만물 모두가 어두운 침묵 속으로 잠기고 만다. 태양은 사막의 붉은 입술 속으로 묻혀 버렸다. 사막의 지는 노을은 알 수 없는 그리움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고향의 향수, 어머니의 향수, 오아시스를 갈망하는 향수, 사랑하는 여인을 그리는 향수…… 


아타카마 사막에 지는 노을


사막의 밤을 달리는 버스 안의 여행객들도 하나 둘 고개를 떨어뜨리고 잠이 들기 시작했다. 아내도 유리창에 고개를 기댄 채 잠이 들었다. 모두가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드는 사막의 밤이다. 남미에서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칠레의 여류시인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은 어둠 속으로 묻혀 가는 사막의 '밤'을 이렇게 노래했다.   

   

아가야, 이제는 잠을 자거라 

이제는 석양이 타오르지 않는다.

이제는 이슬밖에 더 반짝이는 것이 없구나.

나의 얼굴보다 더 하얀 그 이슬이……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밤' 중에서-     


버스에서 하루 밤을 자고 일어났는데도 아직 밖은 끝없는 사막이 이어지고 있었다. ‘대지가 끝나는 곳’이라고 하는 칠레. 그러나 아직 대지는 끝이 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만큼 칠레의 땅은 길고 지루하다. 칠레는 북단 아리카에서 최남단 푼타아레나스까지는  4,300 km로 안데스 산맥을 끼고 남북으로 뱀장어처럼 길게 뻗어있다. 칠레는 아무도 넘볼 수 없는 안데스 산맥을 국토방위의 울타리로 이용하고 있는 나라다. 천혜의 요새 속에서 태평양의 바람을 온몸에 안으며 열정과 희망으로 풍요로운 나라를 일구어 나가고 있는 나라가 바로 칠레다. 


버스 차장이 아침 식사대용으로 도시락을 나누어 주었다. 어젯밤 사막 속으로 사라졌던 태양이 다시 강한 빛을 발하며 눈부시게 사막을 비추고 있었다. 라세레나 지역을 통과하자 회색의 민둥산이 사라지고 드문드문 초록의 빛깔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라세레나는 산티아고에서 북쪽으로 470km 떨어져 있는 항구 도시다. 라세레나는 농업과 낙농업의 중심지이며 관광휴양지로도 유명하다. 



끝없는 선인장 지대가 끝나더니 이제 포도밭이 광대하게 펼쳐지고, 채소밭도 보였다. 사막의 불모지가 막을 내리고 드디어 인간의 숨결이 파동 치는 초록의 초원이 펼쳐지고 있었다. 잠을 자고 있던 여행자들도 하나둘 일어나 밖을 바라보며 창밖의 풍경을 즐기기 시작했다. 4,000m가 넘는 알티플라노 고원지대에서 바다와 수평을 이루는 해안선에 도착하니 숨쉬기도 훨씬 수월했다. 


뜨겁던 사막이 마술처럼 사라지고 신선한 바람과 함께 초록의 들판이 여행자의 눈을 즐겁게 하고 있었다. 안데스의 영봉에서 흘러내린 눈 녹은 물은 계곡을 타고 내려와 대지를 적시고 풍요한 토양을 이루어 젓과 꿀이 흐르는 풍요의 대지로 변모시키고 있었다. 안데스 산에서 흘러내리는 눈 녹은 물은 마치 신의 눈물처럼 고귀하고 맑다. 역시 낮은 곳에 먹거리가 풍부하다. 




풍요의 계곡은 좁다. 안데스의 고산 지대와 태평양 해안 사이에 좁은 대지에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계곡들은 멀리 남부의 푸에르토몬트까지 장장 1,000km에 걸쳐 이어진다. 풍요의 계곡은 하얀 눈을 덮어쓴 만년설이 연출해 낸 마술이다. 


버스가 발파라이소에 도착하자 많은 여행객들이 내렸다. 칠레 제1의 항구도시로 가는 여행객들이다. 발파라이소는 '천국 같은 계곡'이란 뜻을 지닌 항구다. 우리는 일단 산티아고로 갔다가 나중에 시간을 내서 발파라이소를 둘러보기로 했다. 산티아고에서는 가까운 거리이기 때문이다. 버스가 산티아고에 도착했을 때에는 벌써 해가 지고 어둠이 짙게 깔리고 있었다. 산 페드로 아타카마에서 무려 30여 시간을 넘게 달려온 긴 여정이었다. 고장이 나지 않고 무사히 우리를 산티아고까지 데려다준 터어 버스와 운전기사에게 감사를 드렸다. 

 

칠레의 수도인 산티아고는 동쪽으로는 아메리카 최고봉인 아콩카과를 비롯하여 안데스의 만년설이 솟아있고, 서쪽으로는 태평양이, 북쪽으로는 아타카마 해안 사막지대가 끝없이 펼쳐져 있다. 또한 남쪽으로는 빙하가 대지를 덮고 있다. 때문에 산티아고는 어느 쪽을 이용해 가더라도 가혹한 자연을 넘어야 한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표고 500m 분지 위에 위치한 산티아고는 황금을 찾아 남미로 왔던 스페인의 침략자 페드로 데 발디비아에 의해 1541년에 건설된 이후, 영광과 비극이 함께하는 칠레 최대의 도시다. 산티아고는 칠레 민중의 불꽃으로 추앙을 받았던 영원한 청춘 시인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로 하여금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를 짓게 한 영감의 도시다. 


파블로 네루다에게 영감을 준 도시 산티아고. 멀리 안데스의 만년설이 보이고 도시 중앙에는 마포초 강이 흐르고 있다.


네루다는 존재의 부조리를 지적하는 초현실주의적 시인으로 1971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독재자 곤잘레스 비델라 대통령을 격렬하게 비판하며 '나는 고발한다'란 의회 연설을 한 후 국가원수 모독죄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가 망명생활을 전전했다. 그는 병상에서 피노체트 독재정권에 격렬하게 항의하는 시를 쓰다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피노체트 정권에 의해 독살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전해지고 있다. 


시내로 접어들자 석양에 물든 산크리스토발 언덕이 보이고, 시내를 가로지르는 마포초 강에는 안데스의 눈 녹은 물이 도도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만년설을 머리에 인 안데스의 봉우리가 그림처럼 도시를 감싸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북쪽에 위치한 터미널에 도착을 하니 숨이 턱턱 막혔다. 버스, 승합차, 중고차 등 자동차에서 내뿜는 매연이 푸른 초원의 분위기를 180도로 바꾸고 놓고 이었다. 산티아고는 도시가 주는 느낌과는 달리 매연으로 악명이 높은 도시다. 공해의 주범은 도시가 분지에 건설된 탓도 있지만 정제되지 않는 연료를 쓰는 자동차들의 매연의 주범이다. 


여행자들로 초만원을 이루고 있는 산티아고 버스터미널


버스 터미널에는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나는 공중전화박스를 가까스로 찾아 한국을 떠날 때 강영숙 여행 작가가 소개를 해준 산티아고 ‘지구촌여행사’ K사장한테 전화를 걸었다. 삭막한 남미 여행에서 김치 냄새도 맡고 싶고 말이 통하는 한국인을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강 작가의 말에 의하면 K사장은 남미를 찾는 배낭여행자들에게 남미 배낭여행자의 아버지로 불릴 만큼 따뜻한 배려를 해준다고 한다. 그녀도 남미를 여행할 때 K사장의 신세를 톡톡히 졌다고 하면서 산티아고에 들리면 꼭 한 번 찾아보라고 권하며 연락처를 알려주었다.


여행 중에 남의 신세를 진다는 것은 매우 조심스러운 일이다. 그런 아내가 김치찌개도 좀 먹고 싶고 하니 가능하면 연락을 한번 해보라고 했다. 체면 불고하고 전화를 했더니 소문대로 K사장은 생면부지의 여행자의 전화를 아주 반갑게 받아주었다. 터미널에는 자동차를 세우기가 어려우니 북쪽으로 100m쯤 가면 교회가 하나 있는데, 그 교회 앞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그러면 회사 직원이 하얀색 봉고차를 타고 픽업을 하러 갈 것이라고 했다. 지친 나그네에게 얼마나 반가운 소리인가! 


아내와 나는 긴 여행의 피로도 잊은 채, 터미널 밖으로 나와 교회건물 앞으로 걸어가서 그가 일러준 자동차를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자동차는 오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뿜는 매연과 소음으로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무려 1시간여를 기다리다가 공중전화박스를 찾아(내가 여행을 할 당시에는 나는 핸드폰도 없었다) 사무실로 그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으나 통화가 되지 않았다. 


사무실 문을 닫고 그가 우리한테 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우리가 엉뚱한 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기다리고 기다려도 하얀색 봉고차는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길이 엇갈린 것 같았다. 공해에다 긴 여정으로 긴 여정으로 녹초가 된 우리는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어 일단 산티아고 유스호스텔로 가기로 했다. 


자동차의 공해로 가득 찬 산티아고 시내


호스텔에 도착하니 남녀가 따로 자는 도미토리밖에 없다고 했다. 너무 지쳐버린 우린 다른 숙소로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내는 2층으로 나는 3층에서 따로따로 헤어져서 잠을 자야만 했다. 이런 일은 게스트 하우스나 호스텔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다. 


나는 여정을 풀고 누에 고추처럼 네모진 상자 안에 웅크리고 누워 잠을 청했지만 잠이 잘 오지 않았다. K사장이 지금도 터미널에서 우릴 찾으려고 헤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매연과 소음이 난무하는 터미널이 가물거렸다. 나는 피노체트의 서슬 퍼런 독재정치에 항거한 파블로 네루다를 좋아한다. 내 서가에는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가 지금도 꽂혀있다. 오늘 나는 마치 그의 '한 편의 절망의 노래'처럼 동틀 녘 부두에 버림받은 신세가 되어 몸부림치다가 새벽녘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동틀 녘의 부두처럼 버려진 사내. 

떨리는 그림자만이 내 손아귀에서 몸부림치고 있다. 

아 모든 것의 피안으로! 아아 모든 것의 피안으로!

떠나야 할 시간이다, 오 버림받은 이여! -파블로 네루다의 '절망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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