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찰라 Aug 13. 2019

오래도록 머물고 싶은
녹색도시 멘도사

또다시 안데스를 넘다     


이른 아침 호스텔 2층으로 내려가 아내를 부르니 저혈당으로 혼미상태에 있었다. 위험했다! 급히 설탕물을 타서 마시게 했다. 20여분이 지나자 아내는 겨우 기운을 차렸다. 가슴속에서 깊은 안도의 탄식이 강물처럼 흘러나왔다. 언제나 이런 고통을 면할까? 허지만 이 지구 상의 모든 인간들이 태어나면서부터 고통 하나쯤은 끌어안고 살아가고 있지 않겠는가? 저혈당에서 어느 정도 회복이 되자 아내가 말했다.


"아휴 답답해! 여보, 공해의 도시 산티아고를 빨리 떠나고 싶어요."

"어디로 가고 싶소?”

"어디로든지 공해가 없는 곳으로요."

"그럼 아르헨티나로 넘어가요. 안데스를 넘으면 녹색의 도시 멘도사가 있어요. 칠레의 땅끝 푼타아레나스까지 가려면 너무 멀고...  산티아고는 어차피 나중에 다시 들리게 될 거니까. 그럼 우선 공기가 좋은 멘도사로 갑시다

"좋아요."


정신을 차린 아내가 공해와 소음으로 범벅이 된 산티아고를 빨리 떠나자고 재촉했다. K사장에게 다시 연락을 할까 하다가 나는 마음을 바꾸었다. 초면에 아침 일직 전화를 하기도 조심스러웠다. 어쨌든 이번에는 그와 만날 인연이 아직 닿지 않았나 보다. 사람의 만남이란 억지로 되지 않는다. 물이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만나이어야 한다. 인연이 닿으면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우리는 호스텔 식당에서 토스트와 커피로 아침 식사를 간단하게 하고 배낭을 메고 호스텔을 나왔다. 호스텔에서 가까운 히어로즈 역(Los Heroes)에서 지하철을 탔다. 10분 만에 터어 버스 터미널에 도착을 하니 터미널은 이른 아침인데도 여전히 승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칠레의 장거리 버스여행은 터어 버스(Tur Bus)와 풀만 버스(Pullman Bus0가 대종을 이루고 있는데, 나는 라파스에서 터어 버스를 타고 아리카로 넘어간 뒤 어쩐지 Tur Bus가 좋았다. 풀만 버스도 바로 옆에 있었지만 우리는 터어 버스를 타기로 했다. 터어 버스 버스 매표소 창구에 물어보니 마침 아르헨티나 멘도사로 가는 버스표가 바로 있었다. 14,000페소를 지불하고 멘도사 행 티켓 두 장을 샀다. 


산티아고 터미널 Tur Bus 와 Pullman Bus 터미널


산티아고에서 멘도사까지는 약 7시간 정도 걸 린다고 했다. 어제 30시간을 넘게 버스 안에서 숙박을 하며 버스를 탔는 데 우리는 오늘 나시 버스를 타고 국경을 넘어 아르헨티나로 떠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버스를 타는 것이 그리 지루하지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떠나는 여행이기도 하겠지만, 차창밖에 펼쳐지는 정경이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생소한 풍경이기 때문이리라. 아내도 나도 새로운 곳에 대한 기대와 호기심이 컸다. 그리고 매일매일 가보지 못한 땅을 새로 밟는 여행의 묘미를 느끼고 있었다. 아내가 나보다 훨씬 더했다. 그러니 버스를 하루 이틀 타고 가도 별로 지루하게 느껴지지가 않는다. 특히 둘만 떠나는 여행은 서로 죽이 맞아야 한다. 여행에 관한 한 아내와 나는 궁합이 매우 잘 맞는 편이다.  

 

버스가 출발을 하자 서서히 공해의 도시 산티아고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산티아고를 가로지르는 마포초 강(Mapocho River)을 따라 시내를 벗어나니 곧바로 가파른 안데스 산맥으로 접어들었다. 신선한 바람이 창가로 흘러들어왔다. 버스는 눈 녹은 물이 철철 흘러내리는 계곡을 지나 안데스 산맥의 험준한 계곡을 향하여 올라갔다. 


버스는 뱀처럼 구불구불 돌아가는 오르막길을 타원형으로 몇 번이나 회전하며 곡예를 하듯 가파른 언덕을 기어 올라갔다. 속력을 도저히 낼 수 없는 그런 길이다. 주변에는 안데스의 절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남미 여행 중 버스를 타고 안데스 산맥이 넘는 것이 이번이 네 번째다. 높은 곳으로 올라 갈수록 산세는 점점 더 험해지고 푸른 풀 대신 암벽에서 흘러내리는 눈과 얼음이 나타났다. 


산티아고에서 안데스 산맥으로 오르는 길


이윽고 버스가 정상에 도착을 하니 터널처럼 생긴 건물이 나왔다. 아르헨티나와 칠레의 국경을 가르는 건물이다. "Los Horcones, Altura 2,800m(고도 2,800m, 로스 호르코네스)"란 이정표가 보였다. 칠레에서 아콩카과 산으로 등산을 가거나 스키를 타러 가는 여행자들이 넘는 고개다. 근처에는 뽀르띠죠란 스키장이 있다고 한다. 고개를 넘을 때마다 녹슨 기차 길이 드문드문 보였다. 산티아고에서 멘도사로 가는 기차 길인데 이미 폐선이 된 길이다.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국경


칠레 국경초소에서 간단한 출국 절차를 밟고 바로 아르헨티나 입국 초소에서 입국절차를 밟았다. 모든 여행객들이 버스에서 내려 줄을 서서 여권에 입국 스탬프를 찍었다. 국경을 통과하니 아르헨티나 깃발 하나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산 정상이라 바람이 거세다. 정상에는 간단한 음료를 파는 스낵 코너가 하나 떨렁 서 있었다. 


아르헨티나 국경 스낵코너


운전사는 이곳에서 스낵으로 점심을 먹으라고 했다. 스낵 코너에서는 햄버거와 핫도그, 음료수, 간단한 과자를 팔았다. 우리는 햄버거와 핫도그를 하나씩 사들고 바람이 윙윙 불어대는 아르헨티나 국경초소에서 우직 우직 씹어 먹었다. 버스가 다시 출발하자 이제부터는 계속 내리막길이 시작되었다. 칠레 쪽에서 올라올 때는 굼벵이처럼 기어 오던 버스는 이제 곤두박질치듯 스르르 잘도 내려갔다. 도로 옆에는 갈색과 살색을 띤 이상하게 생긴 산들이 손에 닿을 듯 스치고 지나갔다. 


   

                           

오래도록 머물고 싶은 녹색도시 멘도사 

                                                     

“아, 이제 숨을 쉬기가 한결 편하군요!”


오후 5시, 멘도사에 도착하여 아내가 토해낸 일성이었다. 멘도사는 온 통 푸른 숲으로 덮여 있었다. 황량한 사막 위에 인간의 힘으로 일구어 놓은 아름다운 녹색도시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높은 안데스의 아콩카과 산(Cerro Aconcague, 6,960m)의 만년설이 바라보이는 멘도사는 일대에 광대한 포도밭이 전개된다. 안데스 산맥의 영향을 받아 매우 건조한 지질이지만 안데스의 눈 녹은 물을 이용하여 거대한 그린벨트를 형성하면서 아르헨티나 제1의 와인도시로 탈바꿈을 한 것이다.


온통 숲으로 덮여 있는  사막 위에 녹색도시 멘도사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1061km나 떨어진 아르헨티나의 최 서단에 위치한 멘도사는 안데스 산맥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멘도사 강과 뚜누쟌 강줄기로 변하여 농작을 하기에 적합한 오아시스를 이루고 있다. 여름에는 섭씨 18°~ 33°를 오르내리며, 낮에는 강렬한 태양빛으로 매우 덮지만, 저녁에는 선선한 기온을 유지한다. 도시 전체에는 500km에 이르는 수로를 만들어 맑은 물을 흘러 보내 멘도사 거리는 온통 녹색의 바다를 이루고 있다. 


멘도사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옴니버스 터미널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가는 버스 티켓을 미리 구입했다. 터미널에서 우리가 묵고자 하는 멘도사 유스호스텔까지는 그리 멀지 않아 걸어서 갔다. 호스텔에 들어가니 머리를 박박 깎은 털보가 체 게바라 티셔츠를 입고 함박웃음을 웃으며 우리를 반갑게 맞이했다. 긴 얼굴에 구레나룻을 기른 턱수염이 희극배우를 연상케 했다. 


체 게바라를 가장 존경한다는 호스텔 지배인


"미스터, 체 게바라를 좋아하는 모양이지요?"

"네, 제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입니다."

"아하, 그래서 체 게바라 티셔츠를 입었군요."


단층으로 되어 있는 호스텔은 아담했다. 식당으로 들어가니 체크무늬 핑크 빛 식탁보를 덮은 테이블이 앙증맞게 보였다. 아내는 배가 고프다며 가스렌즈에 불을 켜고 저녁 요리로 수프를 끓이기 시작했다. 칠레 국경을 넘을 때 간단한 스낵으로 점심을 때웠으니 배가 고플 만도 했다. 레스토랑 벽에는 멘도사 와인이 진열되어 있었다. 오늘 밤에는 어쩐지 와인을 한잔 하고 싶었다. 나는 털보에게 어느 와인이 값이 싸고 맛이 좋으냐고 물었다. 


"멘도사 와인은 다 맛이 좋아요. 화이트 와인 테라자스도 값이 싸고 맛이 괜찮아요."

"그럼 그걸 한 병 줘요."


10페소(약 4000원)를 주고 테라자스(Terrazas) 화이트 와인 한 병을 사서 코르크 꼭지를 따고 있는데 아내가 펄펄 끓는 수프를 가지고 왔다. 아내와 마주 앉아 와인을 한 잔 마시고 나니 온 세상이 부럽지 않았다. 알티플라노 고원을 여행하느라 쌓였던 피로가 와인글라스 속으로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싸구려 숙박에 손수 만든 음식이지만 일류 호텔의 부티 나는 침실과 음식이 전혀 부럽지 않았다. 이 호스텔은 어쩐지 오래 머물고 싶어 지는 편한 분위기였다. 


호스텔 부억에서 멘도사 와인 한잔


와인을 한잔 하고 나니 마음이 훨씬 릴랙스 해졌다. 식당에서 2층 작은 방으로 돌아온 나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잠시 명상에 잠겼다.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고맙게만 여겨졌다.  건조한 아타카마 사막, 산티아고의 K사장, 안데스를 무사히 넘어가게 해 준 고마운 버스, 멘도사의 와인, 털보 청년, 작은 방, 그리고 아내의 존재…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의 모든 존재들에게 감사를 드렸다. 와인을 한잔 마신 탓인지 눈꺼풀이 저절로 감겼다. 나는 곧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아침에 일어나니 새들이 창밖에서 노래를 불렀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새들의 노래였다. 여유로운 아침이었다. 호스텔 카페에서 커피 한잔에 빵 한 조각씩을 찢어 먹은 후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강열한 태양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지만 온 통 녹색으로 덮여 있는 거리는 서늘했다. 가로수 사이사이에는 작은 시냇물이 연결되어 있고 물줄기가 졸졸 흐르고 있었다. 안데스 산맥에서 끌어들인 눈 녹은 물이다. 시냇물 주변에는 주민들이 의자에 앉아 신문을 보거나 차를 마시며 여유롭게 앉아 있었다. 


녹색도시 멘도사 산책


자동차는 드문드문 다니고, 대신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자동차의 소음 대신 도랑에 흐르는 물소리가 지나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사람이 걸어 다니는 인도는 나무 그늘로 덮여 있어 마치 숲 속을 산책하는 느낌이 들었다.


산 마르틴 대로를 건너 에스파냐 광장과 이탈리아 광장으로 걸어갔다. 광장은 푸른 숲으로 덮여있고, 컬러풀한 타일로 만든 모자이크 장식이 분수와 어울려 아름다운 조형미를 이루고 있었다. 독립광장에 이르니 한층 더 크고 높이 솟아오르는 분수가 시원하게 더위를 시켜주고 있었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건설한 도시와는 달리 콜로니얼 풍의 건물이 없어 중압감이나 위엄도 덜해 훨씬 자유롭게 보이는 것도 이 도시의 특징이었다. 



"도대체 나는 이런 길이 좋아요!"

"누구나 좋아할 녹색의 길이 나이겠소?"


양쪽에서 아치를 그으며 둥그렇게 쏟아지는 분수 물줄기가 햇빛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거렸다. 분수 사이를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 여유롭게 보였다. 유모차를 밀고 가는 젊은 여인의 모습이 평화로웠다. 분수 가에 앉아 졸고 있는 노인의 표정은 한 폭의 정물화를 보는 듯했다. 


독립광장에서 사르미엔토 거리로 접어들자 쇼핑가와 시장이 나왔다. 사람들은 바쁘지 않았다. 물건을 파는 사람도 사는 사람도 여유 있게 대화를 나누며 거래를 했다. 시끌벅적한 우리나라 시장 풍경과는 퍽 대조적이다. 마치 필요한 물건을 서로 나누어 갖는 그런 분위기다. 



쇼핑백을 들고 차 없는 거리를 걸어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여유 그 자체다. 차림새는 결코 호화스러운 부자처럼 보이지 않지만 마음은 부자처럼 보였다. 입고 있는 옷도 수수하다. 멋진 옷을 입고 백화점에서 몇 백만 원 하는 물건을 거들먹거리며 쇼핑을 하는 풍경은 보이지 않았다. 


가로수와 수로를 따라 걸어가는 길은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나무터널을 걷다 보니 어느새 산 마르틴 공원(Parque General San Martin)에 다다랐다. 산 마르틴 공원은 도시의 서쪽에 위치한 광대한 공원이다. 멘도사 시민의 자랑거리인 이 공원을 설계한 사람은 프랑스의 유명한 조경사 카를로스 타이스다.  


공원 안으로 들어가니 플라타너스와 아라모(포플러)등 키 큰 나무들이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이 공원에는 700여 종이 되는 장미를 심은 화단이 있고,  인공호수, 카레이스 서킷, 야외극장, 축구경기장, 보트경기장, 경마장, 자연과학 박물관 등이 들어서 있어 종합 레저 센터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산 마르틴 공원


공원의 도랑에서는 아이들이 물장구를 치며 익살을 부리고 있었다. 나무 그늘에는 가족 단위로 소풍을 나온 시민들이 함께 옹기종기 앉아 가져온 음식을 먹거나 잔디에 누어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공원 한쪽에는 파타고니아의 진귀한 동물을 만날 수 있는 동물원도 있다.  


글로리아 언덕(영광의 언덕)으로 가면 남미 독립의 영웅인 산 마르틴 장군을 기념하는 브론즈 상과 만난다. 멘도사는 산 마르틴 장군이 5,000명의 안데스 군사를 거느리고 칠레의 독립을 구원하기 위해 향했던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글로리아 언덕에 오르니 멘도사 시와 안데스의 절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매년 3월에는 이 언덕에서 포도 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황량한 불모의 사막을 푸른 도시로 일구어 놓은 아름다운 도시 멘도사는 오래도록 머물고 싶은 그런 도시다. 인간의 지혜와 힘으로 자연환경을 이용하여 도시 전체에 도랑을 내어 물이 흐르게 한 환경 친화적인 멋진 도시다.  포도향기가 그윽한 풍요로움이 가득한 거리는 여유롭고 활기에 차 있었다.  산이 많은 우리나라도 관개수로를  잘 개발하여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을 중소 도시의 도심 요소요소를 흐르게 하면 어떨까? 서울의 청계천이 그 시발이 되겠지만 이는 도심의 한 부분만 흐르는 단순한 개천일 뿐이다. 산 마르틴 공원에서 휴식을 취한 뒤 우리는 다시 걸어서 다운타운으로 돌아왔다. 멘 도사는 오래도록 머물고 싶어 지는 녹색도시다.

매거진의 이전글 74. 파블로 네루다에게 영감을 준 '산티아고'를 가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