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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라 Oct 07. 2019

이스터 섬의 황홀한 일몰

칠레 - 이스터 섬 : 우도를 닮은 항가로아 마을에서

우도를 닮은 항가로아 마을

     

항가로아 마을 어귀에는 돌하르방을 닮은 모아이 석상이 먼 하늘을 쳐다보고 서 있었다. 


"어쩌면 이렇게 제주도 돌하르방과 비슷하게 닮았지요?"

“돌하르방과 사촌지간이 아닐까?” 


모아이 석상은 돌하르방과 사촌이라도 된 듯 닮아 보였다. 이스터 섬에는 오직 이 항가로아 마을에만 사람들이 모여 산다. 마을이라고 해 보아야 조그마한 동네에 지나지 않지만 이스터 섬의 수도이자, 유일한 쇼핑지역이다. 

그래도 마을에는 슈퍼마켓, 선물가게, 학교, 우체국, 교회, 은행, 병원 등 있을 것은 다 있다. 우리는 마치 제주도의 우도의 낯익은 마을을 돌아다니듯 동네 집들을 기웃거리며 돌아다녔다. 


제주도 돌하르방을 닮은 석상


항가로아 마을에서 Te Pito Te Henua 거리 끝으로 걸어가니 섬의 유일한 가톨릭 교회인 Holy Cross Church가 있었다.  1937년 12월 설립된 성 십자가 교회는 이스터 섬의 토착종교를 흡수한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교회 기둥에는 롱고롱고 문자, 새 그림 등이 그려져 있어 겉모습부터 라파누이 문화 색채가 짙게 풍겨왔다. 


교회 안으로 들어가니 입구 왼쪽에 아시시의 성자 프란시스코 조각상이 놓여 있는데, 팔을 뻗은 모아이 상을 연상케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앞면 제단에는 화산석으로 만든 십자가에 조개껍질과 생선뼈로 만든 머리 장식을 한 그리스도 상이 놓여 있었다. 제단의 촛불을 켜는 나무 촛대에는 라파누이의 창조신 마케마케의 조각이 새겨져 있었다. 


오른쪽 제단에는 라파누이를 닮은 목각 성모 마리아 상이 머리에 새를 이고 아기 예수를 안고 있었다. 이스터 섬사람들은 성모상을 자신들을 보호해주는 '산타 마리아 데 라파 누이(Santa Maria de Rapa Nui-라파누이의 성모)'라고 부른다. 


재미있는 것은 얼굴 모양과 몸통이 모아이 상을 닮아있는데 전체적으로는 라파누이들이 최고로 신성시하는 마케 마케(Make Make) 신을 표방하고 있다. 또 머리에 이고 있는 왕관위에는 마누타라 새의 모습이 새겨져 있고, 눈동자는 모아이 석상의 눈과 같은 물고기 껍질로 만든 흑요석으로 만들어 마나(Mana-영적인 힘)의 영적인 힘을 투영하고 있다. 토착신앙을 접목시킨 그리스도 선교사들의 절묘한 유인책이다. 섬사람들은 예배를 보는 날에는 입추의 여지없이 교회를 가득 메운다고 한다. 


"호호호, 나무로 만든 상들이 너무 재미있군요."

"하하하, 정말 너무 코믹하게 보여요. 예수 그리스도나 성모 마리아상이 이스터 섬사람들의 토착 신앙에 맞게 변화시켜 섬사람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을 했다고 해요. 이 교회에서 기도를 하면 특별한 효험이 있다고 하는데 당신도 소원을 한 번 기도해 보시지?"
"저는 그냥 교회 안의 신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좋아요. 저 모습들이 너무 흥미롭고 무척 평화스럽게 느껴져요."


이스터 섬 교회 모습. 교회안에는 새를 닮은 성모상과 예수그리스도 상이 여기 저기 결려있다.


교회를 나와 우리는 다시 바닷가를 산책했다. 주변의 꾸밈없는 풍경은 마치 자신들을 훔쳐가라는 듯 우리들을 유혹했다. 우리는 마을의 아름다운 풍경들을 슬금슬금 훔치며 걷고 있었다. 항가로아 다운타운의 모습은 어쩐지 우도 중앙동의 마을을 연상케 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모든 게 낯설지가 않았다.


"여긴 제주도의 우도 같은 기분이 들어요."

"맞아요. 항가로아 마을은 우도의 중앙동과 비슷해요.”


은행에 들려 마스터 카드로 돈을 인출하니 CD기에서 지폐가 기적처럼 좌르르 쏟아져 나왔다. 문명의 이기는 이스터 섬에서도 안방처럼 제공되고 있었다. 우리는 우체국에 들어가 아이들에게 엽서를 부치고 이스터 섬의 기념스탬프를 찍었다. 500페소를 주면 이스터 섬 방문 기념 스탬프를 찍어준다. 기념스탬프에는 모아이 석상이 그려져 있다.


선물가게에 들어가서 이것저것 구경하다가 아내는 목각으로 새겨진 모아이 석상 기념품을 하나 샀다. 이곳 이스터 섬에서 우리들의 유일한 쇼핑이었다. 돌로 만들어진 것은 너무 무거워서 배낭에 넣고 다니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나무로 새겨진 모아이는 가벼웠다. 25cm 정도 되는 목각 모아이는 긴 귀에, 굳게 다문 입술, 그리고 배꼽 밑으로는 다소곳이 두 손이 모아져 있다. 투박하고 못생겼지만 어쩐지 듬직한 믿음이 갔다.


목각 모아이 석상과 기념 스탬프


"저 긴 귀로 우리들의 소원을 들어주고, 굳게 다문 입술이 영원토록 비밀을 지켜줄 것만 같아요."

"무슨 비밀을?"

"우리들의 밀월여행에 대한 비밀…."

"허허, 우리가 뭐 부정한 사이라도 되는가?"

"허지만 저 모아이는 긴 귀로 모든 소리를 다 들어주고 침묵하며 누군가를 지켜줄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 들어요."

"아하, 그래. 그럼 이 목각 모아이에게 당신의 소원을 매일 빌어봐요."


그러고 보니 나 역시 목각 모아이가 어쩐지 정감이 들었다. 아내는 목각으로 새겨진 모아이 상을 포장지에 싸서 신주를 모시듯 조심스럽게 배낭에 집어넣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어쩐지 모아이가 난치병을 앓고 있는 아내를 지켜 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거리에는 라파누이들이 식료품들을 길바닥에 늘어놓거나 자동차를 세워 놓고 팔고 있었다. 아내가 시장을 보는 동안 나는 슈퍼마켓에 들려 포도주를 한 병 샀다. 오늘 밤은 그냥 잠이 들기엔 너무 아쉬울 거만 같았기 때문이다. 마을을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해가 바다로 가까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마르타네 집으로 돌아오니 누렁개가 꼬리를 치며 우리를 반겼다. 누렁이는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우리들을 잘 따랐다. 마르타가 웃으며 여행이 즐거웠냐는 표정을 지었다. "Good, Very Good!" 아주 좋았다는 표정을 짓자 그는 마치 다정한 오누이처럼 씩 웃었다. 샤워를 하고 나오니 마르타가 곧 저녁상을 차렸다. 


"아니, 웬 생선이지요?"

"로져가 바다에서 낚시로 잡아온 생선이래요. 로져 덕분에 우린 싱싱한 생선요리를 먹을 수 있게 되었네!" 

"와인을 사기를 잘했네요."


하얀 식탁 위에는 로져가 낚시로 잡아온 싱싱한 생선구이가 올라와 있었다. 생선구이에 포도주 한 잔! 우리는 마르타와 함께 포도주 잔을 마주치며 건배를 했다. 마르타는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여러 가지 말로 축배 외쳤다.


"알레!"

"친!"

"마누이야!"

"건배!"


무슨 말인지는 모르지만 마르타가 외치는 대로 우리도 "알레, 친, 마누이야!" 하며 따라 외쳤다. 그리고 내가 다시 "건배!"를 외치자 이번에는 반대로 마르타가 그 말을 따라서 "건배"하고 외쳤다. 


"호호호, 재미있군요!"

"하하하, 포도주 맛이 더욱 색다르게 느껴져요!"


오늘 저녁 만찬은 티파니에서 만찬을 먹는 것보다도 멋진 만찬이었다. 아침을 빵 한 조각에 커피 한 잔으로, 점심은 우유에 빵 한 조각을 먹었지만, 우리는 언제나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처럼 멋진 아침과 저녁을 맞이했다. 나는 가난한 여행 작가 '폴'이었고, 아내는 언제나 여행을 꿈꾸는 '홀리'었다. 


아내의 이마에는 언제나 '여행 중'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는 것 같았다. 홀리가 들고 다녔던 "여행 중"이란 명암이 아내의 이마에 붙어 있었다. 비록 화려한 보석가게 앞을 기웃거리며 겨우 빵 한 조각과 커피 한잔으로 아침을 때우더라도, "여행 중"에 있는 그 순간만큼은 아내는 아픔이 없었고, 모든 것을 초월한 듯 행복하게만 보였다.

 

마르타의 딸 미히노아는 하루 종일 웃었다. 우리들을 보기만 하면 미히노아는 그냥 까르르까르르 소리를 내며 웃었다. 건강한 웃음, 티 없는 웃음, 재롱 넘치는 웃음, 행복한 웃음… 검게 탄 얼굴이었지만 소녀는 너무도 귀엽고 순진무구했다. 순진무구란 이런 아이를 두고 한 말일 게다. 


언제나 미소를 짓는 마르타와 딸 미히노아 

마르타네 집에는 언제나 웃음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마르타도 로져도 우리와 마주치면 그저 씩 웃었다. 웃음이 가득한 바닷가의 오막살이 집 한 채, 행복이 가득 찬 집……. 그들은 가난했지만 언제나 웃음이 넘쳐흘렀고, 행복의 파도가 넘실거렸다. 어찌나 웃어대던지 바람소리도 파도소리도 때론 웃음소리로 들릴 지경이었다. 


마르타가 헬멧을 쓰고 완전무장을 한 차림으로 모터사이클을 탔다. 시장을 보러 간다고 했다. 모터사이클을 탄 그녀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검정 바지에 하얀 헬멧을 쓴 마르타. 그러나 표정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와우, 언더 우먼!" 


아내가 그런 마르타를 보고 외치자 그녀는 그저 씩 웃기만 했다. 그녀는 외출을 할 때면 늘 모터사이클을 타고 나갔다. 마르타네 집 한구석에는 자전거가 한대 넘어진 채로 누워있는데, 녹이 슬어 거의 탈 수 없는 상태였다. 아마 전에는 이 자전거가 마르타네 교통수단이었을 것이다. 미히노아가 마르타의 모터사이클 뒤에 타며 까르르 웃었다. 


"올라, 올라(안녕, 안녕)" 



이스터 섬의 황홀한 일몰


미히노아는 계속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모터사이클은 하얀 연기를 품으며 사라져 갔다. 누렁이가 힘껏 달리며 모터사이클 뒤를 따라나섰다. 행복한 풍경이다. 마르타가 사라진 길에 태양이 바닷속으로 가라앉으며 붉은 물감을 바다에 풀기 시작했다.


"정말,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답군!" 


"바라만 보아도 그냥 눈물이 날 것만 같아요! 저건,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노을이에요!" 

                

'바라만 보아도/눈물이 날 것 같은/하늘이 열리고/산 아래 노을이 누우면/바람도 가는 길을 멈추고/숨을 죽인다/비단 날개로/마지막 남은 햇살을 보듬은/잠자리 몸통도 노을에 젖어/더욱 빨갛게 익어가고/아내 속눈썹처럼 가벼운/날개를 편다/그러면/금빛으로 물든 가을 하늘/불타는 고추잠자리 두 눈에/잠겨 있다'(김정호의 시 '고추잠자리').


이스터 섬의 황홀한 일몰


시인의 노래처럼 지금 이스터 섬의 아름다운 노을은 바라만 보아도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멀리 수평선에 하늘과 바다가 맞닿아 있는 곳에 이글거리며 떨어지는 태양. 바다에 노을이 누우니 정말 바람도 가는 길을 멈추고 숨을 죽이는 듯 잠잠했다. 


아내의 손을 잡고 노을을 향해 바닷가로 걸어가자 언제 왔는지 누렁이가 꼬리를 치며 따라왔다. 누렁이는 어느새 우리들의 친한 친구가 되어 있었다. 이스터 섬에 있는 동안 누렁이는 늘 우리를 보호라도 하려는 듯 따라다녔다. 오래전 컴컴한 새벽에 그리스 올림포스 산을 오를 때에는 흰 백구가 우리들의 길을 안내해 주었는데 이곳 이스터 섬에서는 누렁이가 반겨주었다. 


늘 반겨주는 누렁이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수평선에 태양이 잠기자 바다는 순식간에 붉은 물감을 풀어놓은 듯 빨갛게 변했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답다는 남태평양의 황홀한 일몰이었다. 노을은 순식간에 다가왔다가 바닷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아름다운 풍경은 그렇게 때와 장소에 따라 잠깐 동안 진한 감동을 준다. 눈물이 날 것만 같은 감동,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놀라운 감동! 그 감동이 병을 치료하는 의사이자 명약이다.


사람의 마음은 놀라운 풍경 속에 다시 피어난다. 진한 감동은 아픔을 잊게 하고, 세월을 잊게 하며, 스트레스를 잊게 한다. 아내가 늘 그랬다. 집에 있으면 아픈 곳이 너무 많은 데, 여행을 떠나오면 언제 아팠느냐는 듯 아픈 것을 잊어버린다. 오늘은 저 노을이 명의처럼 아내를 치료하고 있었다.   

   

바다에 노을이 누우니 

붉은 물감을 풀어놓은 듯

온 세상이 핑크빛으로 변하고 마네

바라만 보아도 눈물이 날 것만 같은

남태평양의 황홀한 일몰!

아, 이 세상이 모든 고통 보듬는

아름다운 노을이여!     


노을이 지고 나니 사방에 어둠의 장막이 깔리고 들리는 것은 파도 소리뿐이다. 어두운 공간에 별들이 하나 둘 반짝거리며 나타나기 시작했다. 남십자성이 "十字" 모양으로 뚜렷하게 보였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별이다. 남십자성은 남위 30도 이남에서만 보이기 때문이다. '十字'모양이 정남 쪽 방향을 가리키고 있어 대항해시대 이래 뱃사람들이 방향의 길잡이가 되었던 별이다. 하늘이 맑아서인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이는 별들이 반짝거렸다. 별똥이 길게 꼬리를 물며 밤하늘을 나르다가 사라져 갔다. 


밤이 깊어지자 사금파리가 반으로 쪼개진 듯한 반달이 어두운 밤하늘에 떠올랐다. 달빛은 마치 강을 이루듯 은은하게 세상을 비추고 있었다. 나는 아내의 손을 잡고 달빛이 흐르는 바닷가를 산책했다. 파도가 연달아 하얀 물거품을 물고 와 바위에 부서졌다. 우리는 모아이가 서 있는 항가피코 선착장까지 걸어갔다. 그곳엔 모아이 상이 달빛을 받으며 말뚝처럼 외로이 서서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우리 여기 좀 앉을까?" 

"좋지요." 


우리는 모아이 석상에 기대어 앉아 바다를 바라보았다. 부서지는 파도가 달빛에 반짝거렸다. 파도는 마치 다이아몬드처럼 빛을 발했다. 수많은 다이아몬드가 명멸하는 바닷가, 모아이 석상에 기대앉은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부자였다. 자연이 주는 다이아몬드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존재였다.


묵묵히 하늘을 응시하고 있는 모아이 석상


아내의 따뜻한 체온이 나에게 전달되어 왔다. 삶이 고통스러울 때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고 싶은 여인. 몸에 다이아몬드를 걸치기보다는 빵 한 조각에 커피 한잔을 마시고라도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여인. 화려한 침실보다는 길가에서 노숙을 하더라도 좋으니 이 세상 어디라도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여인. 아내는 언제나 그렇게 여행을 떠나고 싶어 했다. 우리들의 등을 받치고 있는 모아이가 마치 아내의 꿈을 실현시켜 주기라도 할 듯 묵묵히 우리를 굽어보며 서 있었다. 


노을이 진 자리

달빛이 흐르는 강

파도가 다이아몬드 보석처럼 

반짝거리는 바닷가

이스터 섬의 거대한 모아이 석상에

기대어 앉아있는 우리는 

지구촌을 돌고 돌다가 표류하듯 

부활의 섬에 도착한 방랑자

가진 것은 없지만 마음은 행복하다네. 


"당신이 어디를 가든지/나도 그 길을 따라가겠어요/세상을 알기 위해 길 떠난 두 표류자/세상엔 볼거리들이 너무 많거든요/우리는 같은 무지개를 좇고 있어요…" 세상에는 볼거리들이 너무 많았다. 마치 ‘Moon River'의 가사처럼 아내가 가는 길엔 내가 있었고, 내가 가는 길엔 아내가 따라나섰다. 결국 우린 같은 무지개를 찾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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