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청춘 시인 파블로 네루다를 찾아서...
산티아고에 머무르는 마지막 날 우리는 발파라이소로 갔다. 그곳에는 영원한 청춘 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잠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라메다 버스 터미널에서 버스를 탄지 1시간 반 정도를 달려가니 긴 내리막길이 나타났다. 내리막길을 지나자 구불구불한 언덕길에 갑자기 바다를 끼고 있는 아름다운 시가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산티아고 북서쪽 130km 지점에 발파라이소는 칠레는 물론 태평양에 면한 남아메리카 제1의 무역항이다.
발파라이소(Valparaiso)는 '천국 같은 계곡'이란 뜻이다. 잉카제국의 지배는 이 지방에까지 미쳐 1536년 스페인 정복자 디에고 디 알마그로 (Diego de Almagro) 일행이 이곳에 처음 들어와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Valpariaso(천국 같은 계곡)라고 이름을 지었다. 정복자들은 이곳을 산티아고로 들어가는 현관으로 정했고, 현재까지 칠레의 제1항구도시로서 무역과 어업의 중요한 기지 역할을 하고 있다.
발파라이소는 2003년 역사지구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관광산업도 활성화되었다. 노란색·분홍색·초록색·파란색으로 칠한 알록달록 집들이 언덕 위에 옹기종기 자리 잡은 모습은 ‘천국의 계곡’이란 이름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언덕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들이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의 집합소처럼 보였다. 칠레 사람들이 언젠가는 살아보고 싶다는 독특한 매력을 지닌 발파라이소는 이제 칠레 서민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도시로 변해가고 있다.
‘영원한 청춘 시인’ 파블로 네루다도 나처럼 버스를 타고 이렇게 발파라이소를 찾았을까? 노벨문학상은 받은 시인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는 말년을 이 지역에서 보냈다. 그는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란 시집으로 우리에게도 알려진 칠레의 영원한 청춘 시인이다. 산티아고를 사랑했던 시인도 말년에는 이 지역에 있는 이슬라 네그라의 바닷가에서 저작에 몰두하며 생애를 마쳤다. ‘한 여자의 육체’에서부터 ‘절망의 노래’까지 시인의 노래는 절절하게 지금도 우리들에게 다가오고 있지만, 그는 이제 가고 없다.
버스터미널에서 내려 시내로 걸어가니 시원한 야자수 나무가 도로 중앙에 하늘로 쭉 뻗어있고, 툭 터진 태평양에서 바닷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왔다. 아내와 나는 야자수 그늘이 드리워진 도로의 중앙을 따라서 길을 걸어갔다. 도중에 우리는 시장에서 잘 익은 귤과 바나나를 샀다. 바나나 껍질을 벗겨 아이스크림처럼 입에 물고 우리는 야자수 그늘 밑에 쉬기도 했다.
거리는 해안선을 따라 쭉 뻗어 있고, 해안선의 반대편에는 모두 언덕배기로 되어 있었다. 언덕에는 원색을 칠한 집들이 닥지닥지 붙어 있었다. 발파라이소는 오래된 엘리베이터들이 41개나 있다. 아센소르 콘셉시온(Asensor Concepcion)이라 부르는 엘리베이터는 언덕을 기어 올라가는 일종의 케이블 카 같은 것이다.
우리는 해안을 따라 거리를 걸어갔다. 빅토리아 광장을 지나 시청사를 끼고 골목으로 걸어가니 거리는 좁고 지저분하나 사람들은 활기가 있어 보였다. 도시의 그림자들이 좁은 거리를 가리고 있었다. 소토마요르 광장에 다다르니 다소 숨통이 트였다. 넓은 광장은 프라트 부두로 이어지고 부두에는 역시 컨테이너 박스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우리는 소토마요르 부근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언덕을 기어 올라갔다. 상자처럼 생긴 낡은 엘리베이터는 덜커덩 거리며 삐거덕삐거덕 소리를 내면서 천천히 언덕을 기어 올라갔다. 이 엘리베이터는 1833년 크리스마스 때부터 사용되어오고 있다고 하는데, 어떤 것은 100년이 넘은 것도 있다고 한다.
엘리베이터를 탄 순간부터 나는 향수에 젖어들어갔다. 시간이 멈추어 버리고 모든 것이 느리게 흘러갔다. 오래된 엘리베이터 때문인가? 아니면 언덕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낡은 집들 때문인가? 그곳은 어쩌면 내가 중고등학교를 다녔던 목포시의 유달산 기슭을 연상케 했다.
내가 다녔던 목포 유달산 기슭에 위치한 덕인중고등학교도 항구의 언덕을 오르락내리락하는 가난한 동네였다. 유달산 기슭 죽동, 달성동, 유달동의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들도 유달리 언덕이 많아 한 참을 오르락내리락해야만 했다. 발파라이소의 지형이 목포 유달산 기슭과 너무나 흡사했다. 나는 지구의 반대편 칠레의 발파라이소에서 유달산의 추억을 떠올리며 고향의 향수를 달래고 있었다. ‘천국 같은 계곡’의 향수보다는 가난했던 시절의 고통스러운 추억을....
이런 언덕배기를 오르내리는 것은 힘들기는 하지만, 그렇게 싫증나지는 않는다. 걸으면 걸을수록 매력이 묻어나기도 한다. 세탁물을 걸어놓은 창문도 구경을 하고, 다정한 구멍가게도 기웃거리기도 하고, 갈매기들의 끼룩거리는 소리를 듣기도 하고…
미술관이라고 쓰인 간판이 있어 들어가 보니 단출하지만 정감이 가는 작은 갤러리였다. 몇 점의 그림들이 놓여있고, 발파라이소를 상징하는 역사물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콜럼버스가 첫 번째 항해를 했던 기함인 산타마리아호를 비롯한 배들의 모형을 만들어 놓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를 즐겁게 한 것은 이 박물관에서 내려다보는 항구의 풍경이었다. 멀리 태평양이 탁 트인 바다는 내 속에 있는 모든 찌꺼기들을 확 쓰러 내려갈 만큼 시원했다.
우리는 좀 더 언덕을 걸어 올라가 산토도밍고 언덕에 도착했다. 이 언덕은 발파라이소의 발상지라고 한다. 1559년에 발파라이소에서 가장 오래된 라 마트리즈(La Matriz) 교회가 세워졌고, 그 후 교회 주변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면서 발파라이소라는 마을을 형성해 나갔다고 한다. 가파른 언덕이나 좁은 골목을 걸어가면 유달리 시간이 느리게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급경사인 곳에 세워진 집들도 매우 독특하다. 여기가 천국 같은 계곡인가!
나는 이 산토도밍고 언덕을 오르며 다시 내 젊은 날의 초상을 떠 올렸다. 유달산 기슭에 돌 틈으로 난 밭길을 따라 학교를 다녔던 추억.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엔 미끄러웠다. 그 눈길 옆 밭에서는 시금치가 자라고 있었다. 그 언덕길은 늘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그런 길이었다. 한 가닥 희망이 다가오다가도 고흐의 까마귀 나는 밀밭처럼 출구가 없는 길이 막혀버린 듯 절망이 가로막기도 했다. 그래도 그 추운 겨울에 압해도에서 불어오는 삭풍을 이겨내고 시금치는 자라났다. 그것은 뜨거운 사랑이었다. 절망 속에서 눈밭을 이겨내는 사랑과 희망....
발파라이소를 떠나며 나는 다시 영원한 청춘 시인 파블로 네루다를 생각했다.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를…
‘…… 그러나 이제 복수의 시간이 다가왔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 벗은 몸, 이끼의, 갈망하는 단단한 밀크의 육체! 그리고 네 젖가슴 잔들! 또 방심으로 가득 찬 눈들! 그리고 네 치골의 장미들! 또 네 느리고 슬픈 네 목소리!……’(한 여자의 육체 중에서)
시인은 첫머리를 이렇게 사랑의 시로 장식을 했고, 그 스무 편의 사랑의 시 끝에 '절망의 노래'를 읊었다. 사랑의 시만 노래했더라면 시는 그저 평범하게 사랑의 노래로만 그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맨 마지막에 '절망의 노래'로 장식을 했다. 사랑과 절망, 그리고 희망... 이 모든 것들은 그리 멀지가 않다. 절망의 노래가 있기에 사랑의 시가 빛이 나고, 사랑의 노래가 있기에 절망의 노래가 솟아난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면서도 이처럼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새벽의 부두처럼 버려진 이별의 시간을 노래한 시인. 등대처럼 반짝이는 마법의 시간, 조타수의 두려움, 눈먼 잠수부의 격렬함…… 오, 버려진 자여!…… 절망 뒤에는 사랑과 희망이 오지 않겠는가? 네루다의 '절망의 노래' 속으로 천국 같은 계곡 발파라이소가 멀어져 갔다.
통틀 녘의 부두처럼 버려진 사내. 떠나야 할 시간이다, 오 버림받은 이여! 내 심장 위로 차가운 꽃비가 내린다. 오, 폐허의 쓰레기 더미, 조난자들의 흉포한 동굴. 네 위로 전쟁과 날개가 쌓여 갔다. 노래하는 새들은 네게서 날개를 거두었다. 마치 머나먼 무엇처럼 너는 그 모든 것을 삼켜 버렸다. 바다처럼, 시간처럼, 네 안에서는 모든 것이 조난이었다!.... 중략.... 동틀 녘 부두처럼 버려진 사내. 떨리는 그림자만이 내 손아귀에서 몸부림치고 있다. 아 모든 것의 피안으로! 아아 모든 것의 피안으로! 떠나야 할 시간이다, 오 버림받은 이여! -파블로 네루다, 절망의 노래 중에서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 1904 - 1973)
시인 파블로 네루다는 젊어서는 외교관을 자청하여 동남아시아 등 그의 고국인 칠레의 정반대를 유랑하듯 떠돈 시인이었다. 또한 그는 칠레의 독재자에게 대항하다 이탈리아로 망명을 떠나 오랫동안 망명자 생활을 했다. 이때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바로 <일 포스티노>이었다.
칠레 공산당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가 살바도르 아옌데와 후보 단일화를 통해 세계 최초로 선거에 의해 사회주의 정부를 탄생시켰다. 미국의 사주를 받은 피노체트의 군부 쿠데타로 아옌데 정부가 붕괴된 얼마 후 그마저 세상을 등지자 칠레 국민은 물론 전 세계의 양심적 시민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는 스무 살이나 위인 연상의 여인 델리아와 함께 망명생활을 했지만, 그녀와 이혼을 하고 마틸데와 결혼을 하여 말년을 이슬라 네그라에서 보내다가 세상을 떴다. 그의 유해는 발파라이소에 멀지 않은 이슬라 네그라의 집 앞 바닷가에 그의 아내와 함께 안장되어 있다.
산티아고로 돌아와 파타고니아로 떠나는 날 K사장은 두꺼운 옷가지와 라면, 그리고 김치를 듬뿍 배낭에 넣어 주었다. 남극이 가까운 파타고니아는 한 여름에도 얼음이 얼고 바람이 강해 우리가 가진 옷으로는 견디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하면서… 리스본에서 무거운 겨울옷을 한국으로 보내버린 우리들은 두꺼운 옷이 필요했다.
"옷이 좀 멋은 없지만 이 두꺼운 옷이 필요할 겁니다."
"이거 멋진 옷인데요. 정말 가져가도 되나요?"
"그럼요. 더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씀하십시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K사장은 한국에서 남미로 배낭여행을 가는 여행자들로부터 '남미 배낭여행자의 아버지'로 불릴 정도로 한국의 배낭여행자들을 챙겨준다고 했다. 멀리 고국에서 온 배낭 여행자를 만나면 먹 거리는 물론 이것저것 챙겨주고 때로는 여비가 떨어진 한국인에게 차비까지 주기도 한다고 했다. 정말 그는 배낭여행자의 아버지 같았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먹여주고 재워주고, 옷까지 주니 말이다. K사장 집을 떠나면서 우린 너무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파타고니아에 가시거든 푼타아레나스에서 땅 끝으로 가는 것을 잊지 마세요."
"아니 그곳엔 뭐가 있지요?"
"한 여름에만 땅에 바짝 엎드려 피어나는 남극의 아름다운 야생화들이 두 분을 반겨 줄 겁니다."
"오, 그래요! 거긴 꼭 가봐야겠군요."
"돌아오시면 꼭 연락을 주세요."
"이거… 너무나 감사합니다. 옷까지 챙겨주시니… 뭐라 할 말이 없군요."
그는 파타고니아 여행지에 대한 정보까지 자세히 알려주며 우릴 배웅해 주었다. 사람의 인연이란 알 수가 없다. 오늘 만난 인연이 언제 다시 지구촌 어디에서 만날지…. 그러니 선하게 살고 베풀 수 있을 때 선행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났다.
아마 K사장은 먼 과거 생에 우리한 테 신세를 왕창 졌을까? 나는 K사장의 따듯한 영접을 인연법으로 밖에 해석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국 만리타향에서 이렇게 생면부지의 여행자를 이리도 따뜻하게 맞이해 줄 수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