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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라 Dec 24. 2019

오, 놀라운 그레이 빙하의 속살!

고려청자 빛깔을 닮은 그레이 빙하의 속살

아름다운 청자 빛깔!


고려청자 빛깔을 빚어내는 아름다운 그레이 빙하


그레이 빙하 하류에 위치한 그레이 산장에서 빙하로 가는 보트를 타기 위해 밖으로 나가니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지척에는 유빙(遊氷)들이 둥둥 떠내려 오고 있었다. 이곳 빙하의 특징은 겨울에도 최저기온이 비교적 높아 빙하가 녹아내리는 것과  재결정이 짧은 사이클로 반복된다. 따라서 빙하의 끝자락에는 거대한 얼음덩어리가 굉음을 내며 호수로 무너져 내리는 절경을 볼 수 있다.


비가 그쳤다 내렸다를 반복했다. 다행히 비가 많이 내리지를 않아 걸어가는 데는 지장이 없었지만 바람이 어찌나 심하게 불든지 몸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곧 숲 사이로 강물이 나오고 강을 건너는 출렁다리가 나타났다. 출렁거리는 다리 밑으로 차가운 물이 콸콸 흘러내리고 있었다. 강한 바람에 비틀거리며 출렁다리를 가까스로 건너갔다. 사진을 찍느라 비틀거리는 아내를 부축하지 못해 조바심이 났다.


"여보, 조심해요! 옆에 줄을 잡고 가세요."

"이 정도는 괜찮아요."


하하, 용기 있는 아내다 언제나 호기심 만발하는 아내의 이런 태도가 좋았다. 출렁다리를 지나니 흑갈색의 모래사장이 나오고 청잣빛 색깔을 띠는 유빙들이 강물에 떠내려 오는 모습이 보였다. 아내는 모래사장을 힘차게 걸어갔다. 무려 3시간을 걸어오느라 그로기 상태까지 갔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어 보였다. 새로운 멋진 절경에 대한 호기심만 가득 차 보였다. 놀라운 풍경은 이렇게 사람의 기분을 변화시킨다. 저 놀라운 풍경 속에 아내의 난치병이 점점 치유가 되겠지. 엔도르핀이여, 팍팍 솟아나라!


그레이 빙하 속으로


출렁다리를 건너서


 'Lago Grey'라는 이정표가 나오고 우리는 절벽 밑으로 가서 구명조끼를 입은 우리는 작은 보트가 오기를 기다렸다. 본선은 호수 가운데 정박을 하고 있었는데 그 본선까지 구명보트 같은 작은 보트를 타고 가야 했다. 줄을 서서 순서대로 구명조끼를 입고 본선으로 가는 고무보트를 탔다. 선원이 손을 잡아주어야 흔들거리는 보트를 탈 수 있었다. 보트가 바람에 심하게 흔들렸다. 빙하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무척 차가웠다.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은 일 년 내내 강한 바람이 분다고 한다. 호수 가운데로 갈수록 바람이 심하게 불어왔다. 유빙도 점점 거대하게 다가왔다. 본선에 오르니 제법 큰 배였다. 이윽고 유람선이 빙하를 향해 출발했다. 


구명보트를 타고 호수 중앙에 정박한 본선으로 가고있다.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축축한 바람은 안데스 산맥에 부딪쳐 엄청난 눈을 내리게 하고, 산골짜기에 쌓인 눈은 거대한 빙하를 만들어 낸다. 그 결과 칠레와 아르헨티나에 걸쳐 있는 이 지역의 안데스 산맥에는 수십 개에 달하는 거대한 빙하가 동서로 흘러내리고 있다. 지구 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빙하 국립공원이 있는 곳.  그중에서도 칠레 쪽에 위치한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의 '그레이 빙하'와 아르헨티나 측의 '페리토 모레노 빙하'는 절대로 놓칠 수 없는 빙하 중의 하나이다.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 주변에 형성된 빙하는 12개나 된다. 그중에서  그레이 빙하는 길이 28km,  넓이 270㎢로 가장 크고 길다. 


빙하로 가까이 다가 갈수록 사나운 바람이 배를 집어삼킬 듯 몰아쳤다. 파도가 배 꼭대기까지 퉁겨 올라왔다. 튕겨 오르는 파도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엎드렸다. 뱃멀미가 심한 아내는 아예 배 뒷전에 엎드려 있었다. 이러다가 빙하 호수에 묻히는 건 아닐까? 빙하 속에 박제되어 투명인간이 되는 것은 아닐까? 그래도 나는 이런 모험이 좋았다. 


강풍으로 파도가 솟구쳐 올라와 앞이 보이지 않는다.


강풍에 배가 뒤집힐듯한 위험 속에서도 창밖으로 비추이는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의 풍경은 너무나 놀랍도록 아름다웠다. 우뚝우뚝 솟아올라 있는 미사일 같은 산봉우리, 코앞으로 둥둥 떠내려가는 거대한 유빙. 내 평생 언제 이런 절경을 볼 수 있겠는가. 배가 빙하의 본체에 가까이 다가가자 바람이 언제 불었냐는 듯 잠잠해졌다. 희한하다. 빙하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 짙은 푸른색으로 변했다. 태곳적 빙하의 빛깔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꼭 고려청자 빛깔을 닮았어요!"

“정말 아름다운 빛깔이군요!”


빙하에 도드라지는 색깔이 너무나 비현실적이고 인공적인 느낌마저 들었다. 빙하 속살은 곱디고운 고려청자의 빛깔 같았다. 푸른 하늘을 얼려 놓은 것 같은 푸른색! 엄청난 눈의 무게로 포개지며 형성되는 빙하는 얼음 속 공기가 점점 빠져나오게 되는데, 공기가 많이 포함되어 있는 빙하일수록 흰빛을 띄고  순수한 물에 가까운 빙하일수록 푸른빛을 낸다고 한다. 빙하를 손으로 만져볼 수도 있었다. 빙하를 만져보는 아내의 모습이 마치 고려청자에 조각을 해 놓은 것처럼 보였다.


빙하 속에 박제된 듯한 아내의 모습


"자, 빙하 고려청자에 당신의 모습을 조각해 볼까?"

"혹시 빙하에 박제하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하하, 겁나는 모양이지? 이렇게 찰칵하는 순간 그레이 빙하 속에 당신을 담을 수 있어요." 

"호호호, 그럼 저는 냉동인간이 되겠네요."

"아마, 빙하가 녹지 않는 한 천년 후, 아니 영원히 그대로 있겠지요. 하하하." 


그레이 빙하 속에 박제된 냉동인간 된다면 어떻게 될까?


아내의 모습이 고려청자에 박제를 해 놓은 듯 카메라에 잡혔다. 냉동 인간! 빙하 속에 박제된 냉동 인간은 천년 후에도 다시 살아난다고 하는데…. 현대의학으로 치료가 불가능한 난치병을 않거나 노령으로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들을 냉동 캡슐 등에 넣어서 냉동인간으로 보존을 해둔다고 한다. 


그리고 치료법이 개발된 미래의 시간에 다시 꺼내서 되살려 내어 난치병을 치료하는 방법을 활발히 연구를 하고 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다. 과연 냉동인간의 심장과 뇌를 다시 정상으로 되돌려 놓을 수 있을까?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인간은 영원히 죽지 않고 수명을 연장할 수 있을까? 그런 상상들이 빙하 속에 박제를 하듯 아내의 모습을 닮으며 스치고 지나갔다. 아내도 냉동인간이 되면 않고 있는 난치병을 치유할 수 있는 미래의 시간까지 생명을 연장할 수 있을까?   



빙하들 사이로 뾰쪽하게 솟아오른 '파이네 그랑데'와 '퀘르노스 델 파이네'가 한 자루의 칼이나 야수의 이빨처럼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빙하 위에 두 겹으로 겹치는 파이네 산봉우리 모습은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이었다. 유람선은 빙하 사이를 서서히 떠 다녔다. 여행자들은 빙하를 만져보기도 하고 으깨서 맛을 보기도 했다. 


"여보, 우리 빙하를 한 조각 먹어봐요."

"엄청 차가울 텐데요."

"언제 우리가 이런 청정한 빙하 맛을 볼 수 있겠소?


빙하를 한 조각 깨물어 맛을 보니 역시 차가운 얼음 맛이다. 아니 얼음보다 훨씬 차갑다. 빙하조각을 삼키자 내가 냉동인간이 되어 곧 빙하와 한 몸이 되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몇 천만년 동안 얼어 있던 빙하조각이 내 몸속으로 들어가자 나는 점점 냉동인간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빙하를 보는 것만으로도 신기한데 빙하를 깨물어 먹다니 정말 꿈속에 있는 것은 아닐까? 


놀랍고도 아름다운 그레이 빙하 절경


윤회의 사슬 속에 다시 인간으로 태어난다면 천년 후가 되더라도 다시 찾아오고 싶은 놀랍고도 아름다운 절경이다! 빙하 유람선은 빙하 주변을 천천히 한 바퀴 돌다가 가끔 멈춰 서서 빙하를 만져보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타임을 주었다. 안내자는 지구온난화로 빙하가 녹아내려 점점 작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빙하에서 떨어져 나온 유빙들이 이를 입증해주고 있었다. 유람선에서는 커피를 서비스해주었다. 


"저 멋진 빙하를 바라보며 뜨거운 커피를 마시는 맛이 어떻소?"

"빙하 속에서 커피를 마시다니 커피 맛이 기가 막혀요!"


정말 빙하 속에서 마시는 뜨거운 커피 맛이 죽여주었다. 비는 계속 부슬부슬 내렸다. 독일 TV 방송국에서 빙하를 취재하고 있었다. 유빙들은 서서히 녹으면서 하류로 흘러내려가고 있었다. 우리는 호수로 밀려가는 유빙처럼 오던 길을 다시 되돌아왔다.


지구온난화 현상으로 점점 녹아내리는 빙하와 유빙


해가 지지 않는 백야를 트럭을 타고 돌아오다


그레이 산장에 돌아오니 오후 3시 반이었다. 우리는 푸에르토 나탈레스로 돌아가기 위해 산장 데스크에 가서 푸에르토 나탈레스로 가는 버스가 언제 출발을 하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러나 데스크의 여직원은 오늘 여기서 출발하는 버스는 없다고 했다. 버스는 공원 입구에서 출발을 하는데 이미 늦었다고 했다. 그것도 정규노선이 없고 승객이 많을 때만 운행을 한다고 했다. 


파타고니아의 백야


데니카의 말을 믿고 왔던 우리는 아연실색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며 내가 잘 못 들었을까? 그레이 산장은 이미 여행객들로 초만원을 이루어 방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다가 하루 방값이 300달러 정도 엄청 비쌌다. 아내는 비싼 방값에 눈을 크게 뜨며 놀랬다. 방이 있더라도 하루에 10달러 이하 게스트하우스에서만 묵어온 우리 같은 배낭여행자들에게는 머물 수 곳이 아니었다. 


“어떻게 하지요? 우리는 오늘 꼭 푸에르토 나탈레스로 돌아가야 하는데요. 혹시 나탈레스로 가는 다른 자동차가 없는가요?”

“글쎄요. 지금으로선 없습니다.”

“비용을 지불할 테니 한 번 알아봐 주시겠습니까?”


산장의 여직원은 딱한 듯 나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하든지 도와주려고 하는 마음이 엿보였다. 그려는 여기저기   전화를 걸었다. 그러더니 마침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마침 나탈레스로 들어가는 트럭이 한 대 있군요. 그런데 시간이 좀 걸린다고 하네요. 운전사가 이곳으로 오기로 했으니 그분한테 잘 이야기해보세요.”

“아이고, 늦어도 괜찮습니다. 오늘 중으로만 가면 되니까요. 정말 감사합니다.”


시간이 걸렸다. 우리는 토스트에 커피를 한잔 마시면서 마냥 트럭을 기다렸다. 오후 8시경이 되자 작은 트럭 한 대가 산장 앞에 나타났다. 운전대에 앉아 있는 운전사는 마음씨가 좋아 보이는 40대의 원주민이었다. 그는 기꺼이 우리의 요청을 들어주었다. 우리는 산장의 여직원한테 누 차례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트럭에 올라탔다. 밤이 되었는데도 주변은 대낮처럼 훤했다. 백야현상이 밤을 밝히고 있었다. 구름 속으로 지지 않는 햇빛이 계속 밤을 밝히고 있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 했던가? 아내와 둘이서 트럭을 타고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 백야의 밤을 달려가는 추억은 영원이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버스를 놓친 덕분에 백야의 풍경을 제대로 만끽을 하네요."

"그러게 말이요. 좋은 인연을 많이 만나서 우리가 이렇게 편하게 트럭을 타고 가면서 아름다운 밤 풍경을 볼 수 있으니 이 또한 얼마나 좋은 추억이요."

"산장의 여직원이 너무 고마워요. 이 트럭 운전사도요."

"세상은 참 좋은 사람들이 참 많아요. 오늘 우리는 너무 좋은 인연을 만난 것 같아요. 모두에게 감사드려야지요."   


운전사는 과묵했다. 라디오를 틀어놓고 묵묵히 운전만 했다. 마침내 푸에르토 나탈레스 시가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나탈레스에 도착하니 밤 11시였다. 자정이 다 되어가는 데도 하늘은 대낮처럼 훤했다. 고맙게도 트럭 운전사는 우리를 데니카 호스텔까지 바래다주었다. 나는 그에게 5,000페소와 한국에서 가져온 기념 볼펜 한 자루를 건네주었다. 그는 괜찮다며 돈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미스터, 너무나 고마워요. 덕분에 백야도 구경하고 참으로 감사합니다. 이거 우리 성의이니 받아두세요."

"고맙소. 좋은 밤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그는 만면에 미소를 띠며 천천히 백야 속으로 사라져 갔다. 좋은 사람이었다. 그와 우리는 전생에 어떤 인연을 가졌을까? 늦었지만 우리는 좋은 기분으로 호스텔 문을 열고 들어갔다. 데니카가 우리를 웃으며 우리를 맞이했다.


“미스터 초이, 많이 늦었네요? 그레이 빙하 구경은 잘했나요?”

“데니카, 빙하 구경은 잘했는데 하마터면 빙하 속에서 얼어 죽을 뻔했어요.”

“호호호, 그게 무슨 말이지요?”

“4시에 출발한 버스는 없었어요. 산장은 초만원인 데다 엄청 비싸고요. 저 트럭이 아니었더라면 큰 일 날 뻔했어요.”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내가 잘 못 알았나요? 이거 정말 미안합니다.”

“하하하. 이미 지나간 일인데요. 덕분에 백야 속의 풍경을 실컷 구경하고 왔어요.”

“오, 그래요? 백야 속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정말 아름답지요. 미스터 초이, 오늘 저녁 식사를 내가 대접하지요.”


데니카는 좋은 여자였다. 야밤에 떡이라고 했던가? 우리는 그녀가 차려준 늦은 저녁을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곧 깊은 잠 속으로 곯아떨어졌다. 긴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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