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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라 Dec 25. 2019

하늘에서 맞이한 크리스마스이브와
성탄절

내 생에 가장 긴 비행 속에서 맞이한 성탄절 회상

남미의 땅 끝 푼타 아레나스 아르마스 광장의 산타할아버지


남미의 땅 끝 파카고니아  푼타아레나스 아르마스 광장에서 크리스마스 캐럴을 불러주는 할머니들과 산타할아버지

    

오늘은 크리스마스 전야인 12월 24일이다. 아침 일직 일어나 밖을 내다보니 역시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아침을 커피 한잔과 빵으로 간단하게 먹고 짐을 챙겼다. 12시 40분 발 산티아고 행 비행기 시간까지 아직 여유가 있었다. 우리는 아르마스 광장으로 가서 마젤란 동상 밑에 있는 원주민 발등을 한번 더 만져 보기로 했다. 우리는 기념품 숍과 등산 장비 숍을 돌아보고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아르마스 광장으로 갔다. 크리스마스이브지만 바람이 강하게 부는 푼타아레나스의 거리는 어쩐지 황량하고 쓸쓸해 보였다. 


푼타 아레나스 마젤란 동상 앞에서 크리스마스 캐럴을 불러주는 할머니들과 산타할아버지


아르마스 광장으로 다가가니 마젤란 동상 앞에는 산타할아버지가 아이들과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다. 그 주변에는 한 청년이 연주하는 기타 반주에 맞추어 할머니들이 산타모자를 쓰고 크리스마스 캐럴을 부르고 있었다. 아마 지역 주민들로 구성된 합창단인 것 같았다. 할머니들의 캐럴은 마치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았다. 음정과 박자도 잘 맞지 않았지만 그런 노래를 열심히 불러주는 할머니들의 다정하고 따스한 느낌을 주었다. 지나가는 아이들에게 산타할아버지는 케이크를 나누어 주었다. 평화롭고 사랑스러운 풍경이었다.  


아내와 나는 손을 잡고 지구촌의 땅끝 푼타아레나스에서 잠시 사랑스러운 크리스마스이브 풍경을 바라보는 망중한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마젤란 동상 밑으로 가서 반질반질한 ‘원주민 발등’을 다시 한번 만져보며 행운을 기원하는 이별의 키스를 했다. 그 짧은 순간 행복한 전율이 온몸으로 들어왔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행운을 준다는 원주민의 발등을 만져보고 파타고니아를 떠났다.


"여보, 우리 건강한 몸으로 다시 이곳에 올 수 있을까요?"

"글쎄, 저 원주민이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면 언젠가는 다시 올 수도 있지 않겠소."


아르마스 광장에서 민박집 마뉴엘의 집으로 돌아온 우리는 마뉴엘 부부와 긴 포옹을 하며 이별의 아쉬움을 나누었다. 파타고니아에 머무는 동안 정이 듬뿍 들어버리고 말았던 마뉴엘 가족이었다. 


"마뉴엘 그동안 고마웠소."

"미스터 초이, 우리 다시 만나요."

"우리가 살아생전에 마뉴엘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아마 아르마스 광장의 원주민 발등이 당신의 소원을 들어준다면 갈라파테 꽃이 피는 이곳에 다시 올 수 있을 것이오."

"하하하, 제발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마뉴엘, 올라!"

"올라! 올라!"


정들었던 민박집 마누엘 부부

눈물이 터질 것만 같은 감정을 겨우 추스르고 마뉴엘 가족과 헤어졌다. 파초코 버스를 타고 공항에 도착하니 11시였다. 12월 24일 12시 40분. 이윽고 ‘란 칠레 080’ 비행기가 바람이 강한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푼타아레나스를 이륙한 란 칠레 항공기의 좌석은 만원이었다. 비행기 좌석도 아내와 같은 자리에 배정이 되지 않아 기내에서 승무원에게 부탁을 하여 가까스로 아내와 나란히 앉을 수 있었다.


기내에서 서비스한 점심에 레드와인을 한잔을 하고 잠시 눈을 붙이고 나니 푸에르트 몬트였다. 오후 3시. 비행기는 잠시 푸에르트 몬트에 기착을 하여 손님을 태우고 다시 이륙을 했다. 두 시간 후에 공항에 착륙을 했다. 산티아고 국제공항에 도착하여 체크인을 하는데 비행기 좌석을 다시 배정해야 한다고 했다. 푼타아레나스에서  수속을 할 때 시드니행까지 좌석을 예약을 했지만, 체크인 담당자는 어떤 일인지는 몰라도 좌석을 재배정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다 호주는 전자 비자를 발급받아야 하는데 비자를 발급받는데 무려 1시간 정도가 소요되었다. 


이럴 경우를 대비해서라도 국제공항은 3시간 전에는 반드시 도착을 해야 한다. 특히 국내가 아닌 외국의 국제공항은 잘 통하지가 않는다. 자기네들 규정대로 움직이므로 좌석 확인을 미리 예약해 두고, 적어도 이륙시간 3시간 전에는 도착하여 느긋하게 공항 일을 보아야 착오가 없다.


잃어버린 여행가방


비자 발급을 끝내고 큰 배낭을 부쳤다. 배낭이 컨베이어 벨트를 통해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는 데 왠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저 배낭은 오클랜드, 시드니를 거쳐, 퍼스까지 갈 짐이었다. 갈아타기를 할 때는 사람도 짐도 함께 갈아타기를 해야 하는데, 간혹 짐이 늦게 도착을 하거나 엉뚱한 곳으로 가버리는 수가 종종 일어난다. 이번 여행기간 중에도 모스크바-런던-베를린으로 갈아타기를 하면서 짐이 늦게 오는 바람에 애를 먹은 적이 있었다.  


짐을 부치고 나서도 탑승시간은 2시간 정도나 남아있었다. 산티아고 공항은 밤이 되면 거의 모든 면세점이 문을 닫았다. 아직 칠레 돈 14,000페소가 남아있는데 쓸데가 없었다. 공항 내를 잠시 서성거리다가 우리는 광장에 쌓아놓은 여행 가방을 만났다. 지난번 이스터 섬에 갈 때에도 마주쳤던 가방 탑이었다.


여행가방 탑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페루 리마에서 도둑을 맞아 잃어버린 아내의 여행 배낭이 떠올랐다. 아내 역시 그 생각이 나는 모양이었다. 잃어버린 아내의 여행 가방은 어디로 갔을까? 아슬아슬하게 쌓아놓은 여행가방 조형물은 마치 여행자들이 잃어버린 여행 가방을 모아서 쌓아 놓은 것처럼 보였다. 형형색색의 여행 가방이 주인을 기다리듯 홀 한가운데 탑을 이루고 있었다.


산티아고 공항의 잃어버린 여행가방 탑

“백 개가 넘는 주사기와 약이 잔뜩 들어있는 여행 가방을 훔쳐간 도둑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마, 허망하기도 했겠지만 주사기를 보고 당신이 마약을 하는 사람으로 착각을 했을지도 모르겠지. 그리고 혹 히로뽕 같은 마약이 있는지 가방을 구석구석 뒤져 보았는지도 모르지.”

“호호, 그럴 수도 있겠군요.”


배낭 여행자에게 있어서 여행 가방이란 어쩌면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때 묻은 여행 가방은 여행자에게 꼭 필요한 필수품을 저장하여 세상의 이곳저곳으로 옮겨주며, 때로는 베개로, 때로는 잠자리로, 삶의 저장고 같은 역할을 해준다. 그러니 여행 가방은 배낭여행자의 영혼까지도 담고 다니는지도 모른다.  

    

“내가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이 육신이란 여행가방 안에 깃들었던 내 영혼을, 절대로 기만할 수 없는 엄정한 시선, 숨을 곳 없는 밝음 앞에 드러내는 순간이 아닐까.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내가 일생 끌고 온 이 남루한 여행 가방을 열 분이 주님이기 때문일 것이다.”-박완서, '잃어버린 여행가방'-   

   

박완서 작가의 '잃어버린 여행가방'에 나오는 구절이다. 나 역시 작가의 말처럼 육신이라는 여행 가방을 지금까지 끌고 다니고 있었다. 때로는 내 육신의 여행 가방을 기만하며 오만 불순을 떨 때가 많았다. 그러나 이제 나는 내 여행 가방을 기만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내 인생의 땀과 영혼을 송두리째 담아주어 세상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게 해주는 여행 가방을 어찌 기만할 수 있단 말인가? 


공항의 홀에 높이 쌓아 올린 여행 가방을 바라보며 잠시 상념에 젖어있는데, 시드니행 란 칠레 비행기를 탑승하라는 방송이 울려 나왔다. 우리는 부랴부랴 탑승구로 향했다. 우리는 육신이란 여행가방과 등에 맨 작은 여행 배낭을 걸머지고 또 다른 긴 여정 속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었다.


하늘 길 실크로드를 오가는 사람들

     

12월 24일 23시 25분, 시드니 행 란 칠레 801호 점보기의 육중한 기체가 태평양을 향해 솟아올랐다. 컴컴한 밤에 하늘에서 내려다보이는 산티아고는 은하계의 별처럼 무수한 불빛이 반짝거렸다. 안데스 산맥을 뒤로하고 태평양 상공으로 날아가는 거대한 점보기는 초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세계일주 항공권을 이용하는 동안 가장 좌석을 받기 어려운 노선이 바로 산티아고-시드니 노선이었다. 이유를 알고 보니 미국 비자를 받기 어려운 동양인들이 모두 이 노선을 이용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내가 여행을 할 당시 한국에서 남미는 물론이거니와 동양에서 남미까지는 거의 직항노선이 없었다(지금은 대한항공이 상파울루로 취항을 하고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항공노선이 미국의 LA나 다른 미국 도시를 경유하여 비행기를 갈아타고 남미로 오게 된다. 911 사태 이후 미국 비자를 받기가 하늘에 별 따기처럼 어렵기 때문이다.


내 옆 좌석에는 동양인으로 보이는 30대 여인이 앉아 있었다. 갸름한 타원형의 얼굴에 날씬한 몸매를 가진 그녀는 전형적인 한국 여인처럼 보였다. 혹시 한국 사람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내가 먼저 웃으며 눈인사를 했다. 그러자 그녀가 한국말로 “안녕하세요?”라고 반색을 하지 않는가! 난데없이 들려오는 한국말에 아내 역시 반색을 했다. 그녀는 아까부터 한국말로 주고받는 우리들을 눈여겨보았다고 했다.

 

“어디까지 가시지요?”

“저는 중국 상해까지 갑니다.”

“아주 긴 비행기군요. 저희들은 호주 퍼스까지 갑니다.”

“선생님 역시 긴 비행을 하시는군요.”


그러고 보니 두 사람 다 며칠이나 걸리는 긴 비행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미국을 경유하는 비자를 받기가 까다로워 산티아고-오클랜드-시드니-서울-상해로 연결되는 복잡한 우회 항로를 이용하고 있다고 했다. 상하이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5시간이나 달려가 저장성 이우(Yiwu, 義烏)라는 생산도시에서 잡화 상품을 구입하여 배편으로 산티아고로 보내고, 다시 왔던 노선을 이용하여 산티아고로 돌아간다고 했다. 이우는 항저우에서 남쪽으로 10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경공업제품 생산 및 유통 중심지로 세계적인 소상품 시장으로 중국은 물론 세계 각지에서 소매상들이 몰려드는 곳이다. 


남미 산티아고에서 이우를 한 번 왕복하는데 보통 10일 정도 소요되는데, 2~3개월마다 한 번씩 상품을 구입하러 온다고 했다. 이렇게 길고 비싼 항공료를 지불하고도 장사가 되느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그냥 씩 웃었다. 장사가 된다는 대답이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20년 동안 해왔던 사업을 그녀가 대물림으로 이어받아 계속하고 있다고 했다.

이렇게 머나먼 항로를 왕래하며 장사를 하는 그녀의 용기가 참으로 가상했다. 중국에서 서역으로 오가는 고대 실크로드는 중앙아시아 내륙을 통해서 유럽으로 횡단을 했었다. 이제 그 실크로드가 하늘길을 통해서 세계 각국으로 연결되고 있었다. 그녀는 중국에서 남미로 통하는 현대판 하늘 길 실크로드를 오가며 무역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태평양을 날아가는 비행기에서 크리스마스이브를 맞이하고 있었다. 자정이 되자 "Joy to the World" 란 크리스마스 캐럴을 틀어주며 여자 승무원들은 초콜릿으로 만든 산타 할아버지를 승객들에게 돌렸다. 바로 옆 좌석에는 젊은 서양인 한 쌍이 앉아 있었다. 자정이 넘자 그들은 테이블을 펴고 촛불을 켜더니 서로 선물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입술을 붕어처럼 내밀고 키스를 했다. 여기저기서 포도주 잔을 마주치며 아기 예수 탄생을 축복하고 있었다.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우리도 붉은 포도주 잔을 마주치며 성탄을 축하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하루를 까먹는 날짜 변경선


모니터에 날짜변경선을 통과한다는 시그널이 들어왔다. 날짜변경선을 통과하면 눈 깜박할 사이에 하루를 까먹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25일이었는데 똑딱하는 사이에 26일이 되었으니 말이다. 기내에 조명이 켜지고 승무원들은 아침 식사를 배급해 주었다. 크리스마스 성탄절을 하늘에서 보내며 새벽 3시에 아침을 먹는 기분이 묘했다. 날짜변경선을 통과하다 보니 날짜와 시간 개념이 혼돈되어 도대체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26일 새벽 4시, 비행기는 뉴질랜드 오클랜드 공항에 착륙했다. 비행기가 이륙을 하기까지는 1시간 30분의 여유가 있었다. 밤새 좁은 비행기 좌석에 쪼그리고 앉아온 우리는 다리 운동도 할 겸 스트레칭을 하면서 면세점을 어슬렁거렸다. 공항 면세점을 어슬렁거리다가 아내는 뉴질랜드 산 양털 내의를 한 벌 사고 나는 서점에서 론니 플레닛 호주 편을 샀다. 앞으로는 이 가이드북을 등불 삼아 호주를 여행할 계획이었다. 오클랜드 공항을 어슬렁거리다가 탑승을 하니 비행기는 다시 시드니를 향해 이륙했다. 시드니까지는 3시간 반 정도가 걸린다고 했다. 12월 26일 아침 7시 30분, 란 칠레 항공기는 긴 비행을 끝내고 시드니에 무사히 착륙을 했다. 


“앞으로 큰 무역상이 되어 부자가 되길 기원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열심히 해야지요. 두 분께서도 남은 여행기간 동안 건강하세요.”


시드니 공항에서 하늘길 실크로드를 통해 무역을 하는 한국 여인과 헤어졌다. 그녀는 칠레산 고추장과 과자를 우리에게 선물로 건네주었다.  그녀는 상하이로 가는 비행기를 갈아타기 위해 손을 흔들며 사라져 갔다. 다부진 몸매에 야무진 그녀의 표정에서 한국인의 끈기와 생활력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남미와 중국을 오가는 하늘 길 실크로드를 날아다니는 자랑스러운 한국 여인이었다! 나는 사라져 가는 그녀를 바라보며 행운과 성공을 간절히 기원했다. 


내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샌드라의 크리스마스 카드

    

시드니에 도착을 하니 문득 시드니에 살고 있는 샌드라가 생각이 났다. 나는 샌드라에게 전화를 했다. 뚜뚜 신호음이 들리더니 이윽고 샌드라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샌드라네 집입니다." 

"샌드라, 여긴 한국에서 온 초이에요."

"뭐? 초이라고? 이거 얼마나 오랜만인가! 지금 어디지요?"

"시드니 공항."

"미시즈 팍은요?"

"함께 있어요."

"그럼 우리 만날 수 있겠네요!"

"허지만 우린 오늘 퍼스로 떠나야 해요."

"저런, 섭섭해서 어떡하지요?"

"다음에 또 만나면 되지요."

"그래도… 하여간 여행 잘하시고, 사간이 나면 다시 전화 주세요. 정말 만나고 싶어요."

"네 그렇게 할게요. 바이 바이~ 샌드라."

"굿 바이."


맥스와 샌드라 부부는 미국 서부 여행길에서 만난 인연을 가지고 있다. 1999년 6월 미국 로키 마운틴 여행길에서 우리는 우연히 만났다. 우리는 그녀의 남편 맥스와 함께 한 달 동안 미국 로키와 캐나다 로키를 여행을 하게 되었다. 그때 우리는 서로 위로하고 위로를 받으며 각별한 사이가 되었다. 아픈 아내에 대한 두 부부의 관심과 보살핌은 너무나 감동적이었다. 


여행을 마치고 귀국한 이후에도 우리는 매년 카드를 주고받으며 서로 연락을 취해왔었다. 그러다가 2002년 시드니 올림픽이 치러졌던 해 크리스마스 날 저녁 맥스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자동차에 앉은 채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샌드라의 편지를 통해서 뒤늦게 들었다. 


그 해에 맥스는 전화로 우리 부부를 시드니 올림픽에 초청을 하고 우리가 묵을 방을 손수 도배를 하고 핑크 빛 페인트를 칠해 놓았다고 전했다.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맥스의 '라스트 크리스마스'였다. 샌드라의 편지엔 맥스가 운전석에 마치 잠을 잔 듯이 평온하게 앉아있었다고 했다.


우리는 2002년도에 시드니 여행을 가지 못하고, 그다음 해인 2003년 7월 시드니로 가서 샌드라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졸지에 미망인이 되어버린 샌드라는 홀로 직장생활을 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샌드라는 맥스가 손수 도배를 한 핑크 빛 방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그 핑크빛 방은 그때까지도 우리를 기다리듯 비어 있었다. 샌드라는 시드니에 오거들랑 언제든지 우리들한테 이 방에 머물라고 말했다. 그 방을 보는 순간 우리는 콧날이 시큰해지고 눈물이 핑 돌았다. 맥스의 핑크 빛 영혼을 보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나는 매년 샌드라로부터 크리스마스 카드와 편지를 받기 전에 내가 먼저 카드를 보내야지 하고 벼르기를 몇 년을 해왔지만, 매년 역시 샌드라의 카드가 도착했다. 핑계는 많다. 나는 샌드라의 정성에 비하면 형편없이 부족한 사람이다. 아마 샌드라는 10월부터 편지를 쓰고, 선물을 고르고, 미리미리 준비를 해온 모양이었다.


어느 해에 우리는 남대문시장에 가서 우리나라 고유 무늬가 새겨진 앞치마 한 개, 식탁보 한 장을 사서 샌드라에게 부쳤다. 3만 원 정도 되는 작은 선물이었다. 그리고 우리 부부가 살아온 지난 1년간의 사연을 장문으로 타이핑을 해서 동봉을 했다. 우체국 직원의 말로는 12월 15일이면 아마 시드니에서 소포를 받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소포를 부치며 선물을 받고 즐거워할 샌드라를 생각하니 늦었지만 그래도 마음이 뿌듯하고 편해졌다.


그해 겨울 우리는 샌드라로부터 카드 한 장과 선물을 받았다. 보내준 크리스마스 카드와 선물을 보내주어 너무 감사하다고 하며 그 카드와 선물을 받는 순가 너무 행복하다고 적혀 있었다. 호주로부터 전해온 샌드라의 포근한 휴매니티가 흐르는 카드와 편지, 그리고 선물에 흠뻑 젖게 된다. 카드 한 장이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행복하게 감싸줄 수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는 순간들을 나는 알았다. 


내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샌드라의 크리스마스 카드. 처음으로 먼저 보낸 크리스마스 카드와 선물(앞치마)을 두른 사진을 크리스마스 카드와 함께 보내왔다.


힘들고, 어려운 때일수록 누군가 그리운 사람에게 크리스마스 카드라도 한 장 써서 보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얼마나 행복한가! 아무리 인터넷으로 메일을 주고받는 초 스피드 시대라고는 하지만, 육필로 글씨를 써서 작은 선물이라도 함께 동봉을 하여 주고받는 마음에야 어떻게 비길 수가 있겠는가? 글을 쓰는 정성, 선물을 준비하는 정성, 부치는 즐거움과 받는 기쁨. 그것은 매우 신선하고 행복한 일이다. 보내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에게나……. 신문이나 방송에서도 어두운 뉴스보다 따뜻한 희망을 주는 뉴스가 더 많이 채워졌으면 좋겠다.      


시간을 내어 샌드라를 만나고 싶었지만 우리는 이미 세계일주 항공권으로 퍼스까지 티켓팅을 해놓은 상태라 그럴 수가 없었다. 또 시드니는 두 번이나 들렸던 곳이라 그냥 지나치기로 미리 여행 계획을 세워두었었다. 시드니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샌드라와 맥스에 대한 추억을 상기하다가 우리는 다시 12시 25분에 출발하는 퍼스 행 비행기를 갈아탔다. 퍼스는 '지상에서 가장 고립된 도시'란 수식어가 붙어 있을 정도로 호주 대륙의 서단에 멀리 떨어져 있다. 12월 26일 현지시간 오후 2시 30분, 콴타스 항공기는 호주 대륙을 횡단하여 4시간의 비행 끝에 퍼스에 무사히 착륙했다. 공항 밖으로 나오니 섭씨 40도를 웃도는 폭염이 질식시킬 듯 온몸을 휘어 감았다.


칠레의 푼타아레나스를 이륙하여 푸에르토몬트-산티아고-오클랜드-시드니-퍼스에 이르기까지 무려 여섯 번이나 이착륙을 하는 비행기를 갈아타며 꼬박 이틀간의 비행 끝에 우리는 호주 대륙의 퍼스에 도착하고 있었다. 남미의 땅 끝 파타고니아 푼타 아레나스에서 호주 대륙의 최서단 퍼스에 이르는 비행은 크리스마스이브와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보냈던 내 생애 가장 긴 비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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