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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라 Jan 04. 2020

애버리진의 땅 앨리스 스프링스

섭씨 45도를 웃도는 무더위 속에서


오후 4시 20분, 앨리스 스프링스 공항에 도착하여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곳곳에 새겨진 토착민 애버리지니의 화려한 문양이었다. 비행기는 물론 담벼락, 표지판, 간판, 그리고 심지어는 쓰레기통까지 화려한 애버리지니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 도시의 쓰레기통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쓰레기통이 아닐까? 쓰레기통이라고 하기보다는 방안에 문갑으로도 사용해도 될 만큼 깜찍하고 아름답다. 


"저게 쓰레기통이라니! 너무 예뻐요. 거실에 놓아두고 싶을 정도로 아름답군요!"

“그럼 쓰레기통을 선물로 하나 사줄까?”


앨리스 스프링스에 도착하여 아내는 애버리지니의 예쁜 문양이 새겨진 거리와 쓰레기통을 신기한 듯 바라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원색으로 색칠해진  거리의 모습이 애버리진들의 고향임을 실감케 했다. 


공항버스를 운전하는 운전사는 아마 족히 70을 넘어 보였다. 마음씨가 아주 좋아 보이는 그는 앨리스 스프링스에 대하여 친절하게 안내까지 해주며 우리가 묵을 파이어니어 호스텔 앞에 내려주었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앨리스 스프링스는 원래 '스튜어트(Stuart)'라고 불리며 아웃백의 남북 교통 거점이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이곳에 아웃백 최대의 전보국이 설치되면서 런던에서 시드니까지 연결되는 전보 망의 중요한 기지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 전보국 바로 옆에는 샘이 하나 있었는데, 우정국장이었던 찰스 토드가 아내의 이름인 앨리스 토드(Alice Todd)를 기념하여 앨리스 스프링스라고 명명한 뒤 '앨리스 스프링스'가 일반적인 호칭이 되었다고 한다. 


노 운전사는 오늘 수은주가 섭씨 45도까지 올라가 있으니 더위에 각별히 조심하라고 귀띔까지 해주었다. 열사병에 걸리기 쉬운 무더운 날씨였다. 시원한 에어컨 버스에서 내리자 용광로에 들어온 듯 열기가 화끈 달아올랐다. 조금만 햇볕에 서 있어도 살이 곧 익어 버릴 것만 같았다. 가만히 서 있는데도 온몸에 땀이 주르륵 적셔졌다.


호스텔은 시내 중심부 토드 강변에 위치하고 있었다. 예전에 야외극장이었던 곳에 지어진 호스텔은 배낭 여행자들 위한 저렴한 숙소다. 호스텔로 들어가자 우선 뜰 앞에 풀장이 눈에 띄었다. 호주는 백배커스나 호스텔에도 대부분 풀장을 갖추어 놓고 있다. 짐을 풀어놓고 우리는 우선 풀장에 들어가 땀을 식히기로 했다. 풀장에 들어가니 한국인으로 보이는 한 가족 네 명이 풀장에서 물장구를 치며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울산대학교 P교수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호주에 교환교수로 1년간 와 있다고 했다. 그는 머지않아 한국으로 돌아가는데 호주를 떠나기 전에 울루루를 꼭 와 보고 싶었다고 했다. 


"호주를 떠나기 전에 꼭 와보고 싶었던 곳이 울루루였어요. 애들레이드에서 차를 몰고 여기까지 왔는데 너무 더워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어휴, 대단하시군요. 그 먼 거리를 자동차로 운전을 하고 오시다니……."

"정말 먼 길이더군요, 더구나 오는 길은 대부분 허허로운 사막의 벌판뿐이어서 볼거리도 별로 없어 지루하기만 했어요.” 

"그럼 가실 때도 다시 자동차를 몰고 가셔야겠네요?"

"아이고,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갈 때는 자동차를 화물로 부치고 비행기로 가기로 했습니다. 어릴 때 지도를 보고 호주를 섬으로 착각을 했었는데 이번 여행을 통해서 호주가 섬이 아니라 거대한 대륙이라는 걸 절실히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저 역시 퍼스에서 비행기를 타고 이곳으로 오면서 그걸 느꼈습니다." 

"선생님이 부럽군요. 역시 호주에서 장거리 여행은 배낭여행이 부담이 없고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은퇴를 하면 선생님처럼 세상을 자유롭게 배낭여행을 하고 싶습니다.”


앨리스 스프링스에서 애들레이드까지는 1,500km가 넘는 먼 길이다. 자동차를 화물로 부치고 갈 때는 비행기를 타고 간다는 P교수. 그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학교 선생이 되는 게 꿈이었다고 했다. 그는 선생님이 되기 위해서  정말 지독히도 열심히 공부를 했다고 한다. 그는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하다 보니 교수의 지위까지 올라오게 되었다고 했다. 어쩐지 P교수가 자라온 환경이라든지 생각이 내 처지와 비슷해서 그가 더욱 친근하게 느껴졌다. 


"어린 시절에는 역사공부에 나오는 서울의 남대문이라든지, 경복궁, 경주 석굴암 등 역사유적지를 가는 게 꿈이었어요. 그리고 실지로 이런 꿈을 이룰 때는 한없는 희열을 느꼈습니다. 이제 저의 꿈은 세계의 역사 유적지와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여행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교수직을 은퇴하면 선생님처럼 아내와 함께 세계 일주를 하는 게 제 꿈인데 아직은 멀게만 느껴지는군요."

"우리보다 훨씬 젊으시니 그 꿈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저희들도 특별한 사정이 있어 조기 은퇴를 하고 50을 넘기면서부터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다니기 시작했거든요." 


아직은 P교수는 우리보다 10년 정도나 젊어 보였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세월이 아닌가. 나 역시 P교수처럼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가난에서 벗어나 세상 밖으로 나가는 길은 오직 공부를 열심히 하는 길 밖에 없다는 것을 나는 일찍이 깨달았다. 그래서 내가 생각을 하기에도 지독히도 열심히 책을 읽었다. 눈에 보이거나 손에 잡히는 책은 무조건 읽었다. 덕분에 나는 책벌레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것이 밑거름이 되어 나는 중고등학교를 장학금을 받아가며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취직을 했다. 책벌레가 나로 하여금 넓은 세상 밖으로 진출하는 게기를 만들어준 것이다. "공부만 잘해서 뭐하나"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공부해서 남 주는 것 아니다." 어쨌든 젊은 시절에는 공부를 열심히 해 놓아야 한다. 


풀장에서 나온 아내는 저녁을 준비하러 부엌으로 갔다. 나는 호스텔 데스크로 가서 울루루를 중심으로 한 아웃 백 2박 3일 부시워킹 투어를 신청했다. 텐트에서 야영을 하고 스스로 요리를 만들어 먹으면서 야생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배우는 부시워킹 투어는 생각만 해도 스릴이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부시워킹 투어 비용은 생각보다 만만치가 않았다. 1인당 호주달러로 295달러나 되었다. 부시워킹 투어는 교통비, 입장료, 숙박비, 식사, 가이드 비용 등 모든 것이 포함된 최소한의 비용이었다.


파이어니어 유스호스텔은 토드 강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다. 남녀 혼합용 도미토리인 벙크 배드(bunk bed, 2층 침대)가 하루 밤에 19 호주 달로 저렴했다.  8개의 침대가 있는 방에 아내와 나는 1~2층 침대에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울루루의 바위처럼 진한 밤색으로 칠해진 방에는 알루미늄 빔으로 만든 침대 위에 흰색 줄무늬를 한 밤색 시트를 깔아놓고 있었다. 세계의 젊은이들이 몰려드는 호스텔은 젊은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호스텔 전체에서 무언가 알 수 없는 기운을 받는 느낌이 들었다. 


저녁 식사 후 해가 진 다음에 거리에 나왔지만 여전의 열기는 식지 않고 후끈거렸다. 우리는 호스텔에 인접해 있는 토드 스트리트 몰로 천천히 걸어갔다. 거리는 온 통 애버리지니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여기저기에 애버리지니 들의 문화가 배어 있다. 앨리스 스프링스는 애버리지니 신앙의 중심지나 다름없다. 호주에서 애버리지니 들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 역사적인 문화가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이 앨리스 스프링스이다. 


4만여 년 전 인도네시아에서 호주 대륙으로 건너온 것으로 추정되는 애버리지니 들은 이 땅에서 백인들이 들어오기 전까지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백인들이 정착을 하기 전에는 약 100만 명의 원주민들이 호주 대륙에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백인들이 정착하면서부터 원주민들은 땅을 빼앗기고 노예처럼 살아가는 지옥으로 변했다. 100여 년간에 걸친 탄압으로 원주민 수는 한 때 90% 가까이 줄어들었다. 요즈음은 원주민 숫자가 다소 늘어 약 45만 명의 원주민이 여기저기 흩어져 가난하게 살아가고 있다.


애버리지니 어른 4명 중 1명은 당뇨병을 않고, 여성 사망률은 백인 여성의 6배나 된다고 한다. 인종차별정책으로 어른이 되어도 직장을 구하기가 어렵고, 술과 마약에 찌든 어른들을 바라보면서 아이들은 절망에 빠져 목숨을 버리기도 한다고 한다. 먹고살기가 힘든 아이들은 대부분 초등학교 3~4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길거리로 나가 구걸 행각을 나선다고 한다.


날씨가 너무 더워서 우리는 토드 몰 거리에 있는 레드 독 카페(Red Dog Cafe)로 들어갔다. 카페에는 젊은이들로 시끌벅적했다. 우리는 시원한 아이스크림을 시켜 먹으며 용광로처럼 활활 타오르는 더위를  식혔다. 아이스크림을 먹어도 숨이 턱턱 막히며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숙소로 돌아가 샤워를 하고 휴식을 취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카페를 나와 호스텔로 가는데 두 명의 애버리지니 사내들이 무언가 알아들을 수 없는 고함을 지르며 다가왔다. 술에 취한 듯 그들은 비틀거렸다. 


"여보, 빨리 피해 가요."

"저들도 사람들인데 이 훤한 거리에서 설마 무슨 일이 있겠소."

"그래도 괜히 충돌이 생기면 곤란하지 않아요."


우리는 서둘러 숙소로 돌아왔다. 애버리진들은 구걸을 하지만 강도나 폭력은 휘두르지 않는다는 정보를 나는 사전에 알고 있었다. 그들은 호주 정부에 의해 부모로부터 강제로 분리되어 '토끼 울타리'에 갇힌 후손들이 아닐까? 100여 년 동안 백인들에게 탄압을 받은 애보리진들은 자신들을 '도둑맞은 세대(Stolen Generation)'라고 부르며 우울증 등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 그리고 많은 애버리진들이 술과 마약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다. 호주 대륙의 원주민 애버리진들에게 백인들은 사죄를 하고 보상을 해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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