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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라 Sep 24. 2022

인생은 단 한 번의 여행이다

-세계일주 짐 꾸리기

                

난치병으로 내일의 삶을 기약할 수 없는 아내가 어느 날 죽기 전에 세계일주 여행이나 했으면 원이 없겠다고 말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오대산을 찾았다. 온통 눈으로 덮인 오대산은 흰 도화지처럼 깨끗했다. 방아착! 전나무 숲길을 걸어 눈 속에 묻힌 고풍스러운 산사를 보자 마음이 가라앉았다. 나는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을 걸어 적멸보궁으로 올라갔다. 적멸보궁에서 나는 몸을 던져 오체투지로 절을 하기 시작했다. 일 배, 이 배, 삼 배……. 나를 짓누르고 있는 삶의 무게를 벗어던지기라도 하듯 정신없이 절을 했다. 천 배를 넘겼을까? 온몸이 땀에 흠뻑 젖은 채 나는 고목처럼 툭 쓰러져 잠이 들었다.


“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꿈과 같고, 허깨비 같으며,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으며,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으니, 그런 줄로 생각하라.”


금강경 마지막 사구게(四句偈)가 벼락 치듯 들려왔다. 나는 무엇인가에 뒤통수를 된통 얻어맞고 잠을 깼다. 깨고 나니 꿈이었다. 인생은 뜬구름과 같은데 나는 무엇에 집착하고 살아왔는가? 기껏해야 100년도 살지 못하는 것이 인생인데…….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것이 인생이다. 그래,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 아내의 소원대로 여행을 떠나자. 그렇게 마음을 바꾸어 생각하니 홀가분해졌다. 밖으로 나오니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첫 여행지는 한 달간의 유럽이었다. 배낭을 메고 여행을 떠나자 아내는 마치 산소통을 짊어진 사람처럼 생기발랄해졌다. 컨디션도 몰라보게 좋아졌다. 여행은 아내를 치료하는 명약이었다. 여행 약발이 떨어질 때가 될 무렵이면 아내는 또 다른 여행을 주문했다. 나는 주로 세계의 숲과 기가 충만한 여행지를 찾아 여행을 떠났다. 여행을 하면 할수록 신기하게도 아내는 점점 더 건강해졌다. 아내에게 여행은 그 어떤 약보다도 효험이 좋은 예방약이자 치료제이며 동시에 회복제였다.


건강이 좋아진 아내는 내친김에 세계일주 여행을 하자고 했다. 세계일주는 아내의 로망이자 나의 꿈이기도 했다. 지금까지는 한 달 정도의 여행 약을 복용했지만, 세계일주는 훨씬 장기적인 여행 약이었다. 솔직히 두려웠다. 아픈 아내와 세계일주를 떠난다는 것은 미친 짓이나 다름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후회 없는 인생과 미련이 남는 인생,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은 말했다. “당신이 가기를 주저하는 바로 그곳에 보물이 있다. 당신이 들어가기를 두려워하는 바로 그 동굴 속에 당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는 보물이 있는 것이다.” 그의 말은 마치 여행을 떠나기를 두려워하고 있는 나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았다.


삶에서 가장 후회되는 일은 하고 싶은 일을 하지 않는 것이며, 가장 후회되는 여행은 하고 싶은 여행을 하지 않는 것이다. 지금 떠나지 않으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만 같았다. 어차피 인생은 단 한 번의 여행이다! 돈으로는 어제라는 시간을 살 수 없다. 그래, 떠나자! 아내와 나는 머리를 맞대고 세계일주 여행루트와 일정을 짜기 시작했다.    

 

여행루트 짜기

나는 지도를 놓고 이미 다녀온 여행지와 중복을 피해 아내를 위한 치유 여행 일정을 연필로 그려보기 시작했다. 북유럽에서 오로라를 관측하고 러시아와 동유럽을 거쳐, 유럽의 서쪽 끝 포르투갈로 간 다음, 남미대륙으로 건너가 칠레의 땅끝 파타고니아를 돌아서 이스터섬을 돌아서 호주 대륙으로 가는 여정이 그려졌다. 세상 끝에서 세상 끝으로 가는 긴 여정이었다. 여정 표를 아내에게 보여주었더니 낯선 여행지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아내도 대환영이었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멋진 루트였다.


여행은 항공 루트가 매우 중요하다. 웹투어의 도움을 받아 나는 원월드 세계일주 항공권(www.oneworld.com 참조)을 구매했다. 원월드 세계일주 항공권은 오른쪽으로 돌든 왼쪽으로 돌든, 어느 한 방향을 택해 대서양과 태평양을 건너 지구를 한 바퀴 돌아오도록 규정하고 있다. 역방향으로는 돌아갈 수는 없다. 1년간 총 20회를 탑승할 수 있고, 항공권 유효기간은 1년이었다. 우리는 대륙 간 이동과 한 대륙에서 아주 먼 거리를 비행하는 것만 원월드 항공권을 이용하고, 나머지는 여정은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했다. 우리가 설계한 세계일주 항공 여정은 다음과 같다.


•인천공항~홍콩 : 캐세이퍼시픽 항공

•홍콩~암스테르담 : 캐세이퍼시픽항공

•모스크바~런던~베를린 : 브리티시항공

•뮌헨~마드리드 : 이베리아항공

•리스본~마드리드~리마 : 이베리아항공

•리우데자네이루~산티아고 : 란칠레항공

•산티아고~이스터섬~산티아고 : 란칠레항공

•산티아고~파타고니아 : 란칠레항공

•파타고니아~산티아고~오클랜드~시드니 : 란칠레·콴타스항공

•시드니~퍼스~엘리스스프링스 : 콴타스항공

•엘리스스프링스~브리즈번 : 콴타스항공

•브리즈번~홍콩 : 캐세이퍼시픽항공

•홍콩~인천 : 캐세이퍼시픽항공

•기차 : 북유럽 플랙시 패스, 동유럽 플랙시 패스     


짐은 이렇게 꾸렸다.

배낭의 무게는 곧 삶의 무게와 같다. 배낭의 무게가 10kg을 넘기면 여행은 힘들어진다. 큰 배낭(50ℓ)과 작은 배낭을 하나씩 준비하고, 한두 번밖에 쓰지 않는 물건은 모두 빼냈다. 침낭은 부피와 무게를 고려해서 빼기로 했다. 노트북을 가지고 갈까 하다가 무게를 고려하여 빼기로 했다. 짐이 무거우면 즐거워야 할 여행이 고통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여행 중 꼭 필요한 것은 현지에서 구입하고, 필요가 없는 물건은 현지인에게 기부하거나 버리기로 했다.


리스트를 만들어 하나하나 체크를 하고, 배낭의 아랫부분에는 가벼운 물건을 넣고, 무거운 것은 윗부분에 차곡차곡 챙겨 넣었다. 그런데도 큰 배낭과 작은 배낭을 저울에 올려놓고 보니 15kg이나 되었다. 카메라와 캠코더, 충전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스마트 폰 하나면 족하지만, 스마트 폰이 없었던 당시에는 카메라가 필요했다. 우리가 준비했던 여행 물품은 다음과 같다.    

 

•큰 배낭(50ℓ), 작은 배낭(큰 배낭에 들어갈 수 있는 크기)

•의류 : 긴바지2, 반바지1, 재킷1, 긴셔츠1, 반셔츠1, 팬티3, 내의1, 수영복, 모자

•잡화 : 신발, 슬리퍼, 세면도구(물비누, 샴푸, 치약, 칫솔, 면도기), 손톱깎이, 만능칼, 비닐지퍼팩, 빨랫줄, 화장품, 복대, 자물쇠(철끈 자물쇠, 번호키 열쇠), 자명종, 손전등, 우산, 비옷, 기념품(끈 달린 볼펜 등)

•의약품 : 아내 영문진단서와 영문처방전, 아내 약(인슐린, 주사기, 혈압약, 이뇨제), 변비약, 말라리아예방약(독시사이클린, 메플로퀸, 클로로퀸), 고산병 예방약(아세타졸아마이드, 휴대용산소), 감기약, 지사제, 아스피린, 소화제, 후시딘연고, 밴드, 붕대, 모기약, 빈대약

•카메라, 안내서 등 : 휴대용 디카, 캠코더, 메모리칩, 충전기, 여행일정표, 지도, 론리플래닛, 여행수첩, 소형금전출납부, 계산기, 6개국 회화집

•비상식량 : 컵라면, 튜브 고추장, 소금

•국가별 비상대응 전화번호 리스트 : 구급차(Ambulance Cell Numbers, 휠체어 여행 사이트 https://wheelchairtravel.org 참조)

•각종 증명서 : 여권, 비자, 항공권(원월드 세계일주 항공권), 유레일패스, 국제운전면허증, 황열병과 말라리아 검역증명서, 여행보험증, 여행자수표, 신용카드, 국제현금 카드, 현금(달러, 유로, 원화 약간), 유스호스텔회원증 등

마지막으로 아이들에게 유서 한 장을 남겼다. 인생은 단 한 번뿐이지만 후회 없이 올바르게 산다면 한 번이라도 족할 것이다. 아내와 나는 모든 것을 훌훌 던져버리고 둘만 떠나는 여행길에 올랐다.    


 

세계일주 여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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