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물의 길-
'하심(下心)'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시작하라 - 하롱베이

by 찰라


아오자이와 오토바이의 물결 - 하노이


4월 15일 밤 10시 30분. 우리는 베트남 하노이 공항에 내려섰다. 바로 티베트로 가지 않는 이유는 분명했다. 해발 0미터에서부터 육로를 따라 고도를 서서히 높여가며, 고소병을 예방하기 위한, 나름의 지혜였다.


공항 밖으로 나오자 후덥지근한 공기가 몸을 감싸며 숨이 턱 막혔다. 티베트로 가는 길은 출발부터 쉽지 않았다. 출발 전 귀에서 피가 나 병원을 찾는 소동이 있었고, 당일엔 이유 모를 복통까지 겹쳤다. 약을 삼키고 1시간 넘게 누워 있다가 겨우 일어나 공항에 올 수 있었다. ‘여행은 곧 트러블(travel = trouble)’이라는 말이 떠올라 쓴웃음이 흘렀다.


하노이의 첫인상은 아오자이를 입은 소녀였다. 고운 자태가 바람에 스치듯 지나갈 때, 낯선 이국의 향기가 손에 잡힐 듯 다가왔다. 농(삿갓)을 쓰고 물지게를 멘 여인들의 모습은 열대 특유의 냄새와 함께 전통의 풍경을 그려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를 압도한 것은 오토바이의 물결이었다. 신호등 앞에 빽빽이 서 있다가 불빛이 바뀌자 일제히 튕기듯 쏟아져 나가는 모습은 마치 전쟁터로 나서는 병사들 같았다. 도시 전체가 오토바이의 엔진 소리로 숨 쉬는 듯했다. 그들의 삶이 생존경쟁을 위해서 얼마나 치열한 지 그 단면을 보는 듯했다.




하노이(Ha Noi)는 ‘강 안쪽’이라는 뜻을 지닌 이름이다. 홍강이 도심 외곽을 휘돌아 흐르며 만든 곡류 안쪽에 자리한 까닭이다. 이곳은 호찌민 동상과 능묘, 박물관으로 전통과 보수의 색채를 뿜어내고 있었지만, 골목마다 들어선 인터넷 카페, 휴대전화를 손에 든 사람들의 모습은 변화의 물결을 말해주고 있었다. 전통과 개방이 교차하는 도시. 그러나 그 흐름은 이미 개방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나는 그 모든 풍경 속에서 순례의 첫 장이 열리고 있음을 느꼈다. 티베트를 향한 여정, 그 첫 발걸음은 뜨거운 공기와 불안, 그리고 낯선 매혹이 공존하는 하노이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 하롱베이


다음날 아침 일찍 하노이를 출발해 하롱베이로 가는 홍가이 선착장에 이르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선착장은 벌써 수많은 관광객들로 붐볐고, 배들은 손님을 태우기 위해 숨죽여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국립공원 입장권을 사는 동안, 아내는 물 한 병과 과자 봉지를 들고 돌아왔다.


“물 한 병에 5천 동, 과자 한 봉지에 4만 5천 동이나 하다니. 엄청나요! 너무 비싸지 않나요? 그래도 바다 위보다는 싸겠지요? 호호.


우스꽝스럽게 들리지만, 낯선 화폐 단위에 계산은 늘 혼란스러웠다. 지갑 속에 들어온 두툼한 동(₫)의 다발은 마치 내가 갑자기 부자가 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결국 그것은 삶을 유지하기 위한 몇 모금의 물과 작은 과자 봉지에 불과했다.


맨발의 소년이 다가와 우리를 배로 인도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우리의 손을 잡아주더니, 잽싸게 갑판 위로 몸을 날렸다. 바다에서 살아온 아이의 몸짓은 원숭이보다도 빠르고 가벼웠다. 보트가 출발하자 눈앞에는 장엄한 풍경이 펼쳐졌다. 크고 작은 섬, 섬, 섬… 무려 3천여 개의 석회암 섬들이 병풍처럼 바다 위에 솟아 있었다. 영화 <굿모닝 베트남>과 <인도차이나>의 배경이 이곳이라는 말이 실감 났다.



점심 식탁에선 소박한 쌀밥과 새우, 생선이 나왔다. 맞은편에 앉은 영국인 힐이 서툰 젓가락질을 이어가자, 나는 웃으며 손가락 사이에 젓가락을 끼우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의 천진한 웃음소리가 바다 위에 맑게 번졌다.


섬 사이를 유영하듯 배가 나아가자, 물건을 가득 실은 쪽배들이 따라왔다. 바다 위의 작은 슈퍼마켓, 움직이는 구멍가게였다. 가녀린 허리에 농(삿갓)을 쓰고 노를 젓는 여인의 모습이 바람에 흔들렸다. 두 손으로 무거운 생계를 저어내는 그 모습은 애처롭고도 아름다웠다. 우리는 바나나와 파인애플을 사주었다. 노을빛 바다 위에서 건네받은 과일은 단순한 과일이 아니었다. 그녀의 삶이었고, 희망이었다.



저녁이 가까워지자, 선상 안내를 맡은 청년 얀은 웃통을 벗으며 우리를 향해 외쳤다.

“이 천국 같은 바다에서 수영을 하지 않으면 두고두고 후회할 겁니다!”

그는 말을 마치자 곧장 첨벙 뛰어들었고, 아이들과 청년들이 뒤이어 물속으로 다이빙했다. 다양한 자세로 떨어지는 아이들의 모습은 천진한 개구쟁이들 같았다.


아내는 의자에 누워 황홀한 일몰을 감상하고 있었다. 붉게 타오르는 노을빛이 바다를 물들이고, 바다는 그 모든 것을 말없이 품고 있었다. 어머니 같은 바다, 무한한 사랑의 품. 점점 붉어진 태양이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세상의 모든 사랑이 낮은 곳으로 흘러드는 듯했다. 하늘을 지배하던 태양조차 결국은 고개를 숙여 가장 낮은 곳으로 몸을 맡기지 않는가. 그 순간, 내 마음에 한 글자가 선명히 떠올랐다.


下心(하심)

낮아져야 넓어진다.

낮아져야 품을 수 있다.


아내는 병마 속에서도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나의 두려움을 덜어내는 기적 같았다. 아내의 미소야말로 겸손한 하심이었다. 자신의 고통을 낮추어, 오히려 나를 살려내는 마음. 나는 그 앞에서 깨달았다. 진정한 강인함은 높아짐이 아니라 낮아짐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우리는 늘 높아지기를 꿈꾸며 산다. 더 높은 자리, 더 많은 부, 더 큰 집…. 나 역시 지금까지 그렇게 앞만 보고 달려왔다. 그러나 아내의 병 앞에서, 그리고 지금의 간병의 길 앞에서, 나는 알게 되었다. 낮아지지 않고는 살아낼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것을. 하롱베이의 바다는 나직이 속삭였다.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라.”


그 가르침은 차마고도의 험난한 길에서도, 티베트의 설원에서도, 그리고 오늘 내가 걷는 간병의 길 위에서도 내 삶의 길잡이가 되었다. 모든 길은 결국 낮아짐으로 이어졌고, 낮아짐 속에서만 보이는 풍경이 있었다. 그 풍경은 언제나 나를 다시 살려냈다. 하롱베이의 바다가 내게 건네준 그 한마디는 오늘도 내 곁에서 메아리친다.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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