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뇌는 깨달음이요, 재난은 오히려 행복이다

허운대사의 숨결을 따라간 서산 순례길

by 찰라

쾌청한 쿤밍의 하늘 아래, 봄빛은 고요히 숨을 쉬고 있었다. 그러나 나의 몸은 아직 완전하지 않았다. 귀에서 흘러나온 피, 알 수 없는 복통, 하노이에서 깨진 어금니 — 여행 초입의 연이은 불편은 마치 누군가가 내게 묻는 듯했다.


“너의 이 순례는 단순한 여행이 아니다. 그대는 고통을 등에 지고 걸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나는 그 물음 앞에서 한동안 눈을 감았다. 몸은 아팠지만 마음은 서서히 깨어나고 있었다. 고통은 나를 깎아내리지 않았다. 오히려 길 위에서 나를 비워내는 도구가 되어 주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이것은 액운을 미리 털어내는 일일지도 모른다.’ 여행이란, 결국 예기치 못한 일의 연속 아닌가. 나는 예정된 순례길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내 몸은 여전히 완전치 않았지만, 다행히 아내의 얼굴은 점점 생기로 빛나기 시작했다. 그녀의 미소를 보는 순간, 나의 컨디션도 서서히 회복되는 듯했다.


허운대사가 머물렀던 서산(西山), 그곳은 단순한 산이 아니었다. 천년의 선풍이 깃든, 수행자들의 숨결이 겹겹이 쌓인 성스러운 터전이었다. 멀리서 보면 서산은 부처가 누워 있는 형상이라 하여 ‘와불산(臥佛山)’이라 불리고, 아쇼카왕의 아들이 봉황을 보았다는 전설로 ‘백계산(碧鷄山)’이라 일컬어진다.



나는 그 산의 품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곳 어딘가에, 중국 근대 불교를 다시 일으킨 한 거목의 숨결이 남아 있었다. 그의 이름, 허운(虛雲).


허운 스님은 청나라 말기 1940년 복건성 천주에서 태어나 1959년 120세에 입적을 했다. 어머니는 허운을 낳자마자 사망하여 양모품에서 자라났다. 허운은 17세 무렵 호남성 남악산 상봉사로 몰래 출가하였으나, 아버지의 간곡한 만류로 집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허운의 출가를 막고자 도교 서적을 권하고 도인을 불러다 수행법을 배우게 했다. 그러나 허운은 19세에 복건성 용천사로 몰래 출가하여 묘련화상으로부터 구족계를 받고 고암(古巖)이라고 하였다


허운대사의 생애는 수난과 고행의 연속이었다. 그는 43세에 보타산에서 오대산까지 3년 동안 4,000km의 삼보일배를 하였다. 눈보라 속에서도 절을 멈추지 않았고, 굶주림 속에서도 서원을 놓지 않았다.


스님은 바람 불고 눈비가 오든, 춥든 덥든 가리지 않고 낮에는 절을 했고, 밤에는 잠시 누울 자리에서 쉬다가 절을 계속하며 오대산으로 향해갔다. 산서성에 들어섰을 때는 동짓달이었고, 눈이 내려 인적이 끊긴 허름한 초막에서 쉬게 되었다. 바람조차 막지 못하는 초막에 쉬면서 좌선하며 눈이 그치기를 기다렸으나 하염없이 눈이 내렸다. 사람 키만큼 눈은 내려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다 날씨는 춥고, 먹을 것조차 없었다. 스님은 며칠을 굶어가며 추위에 떨다가 7일째 되는 날, 결국 병이 들어 쓰러지고 말았다.


그 길 위에서 문길이라는 걸인을 만났다. 허운은 걸인 문길의 도움을 받아 오대산까지 무사히 삼보일배를 마칠 수 있었다. 그 문길은 문수보살이라는 화신이었다. 허운이 삼보일배를 하는 목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출가한 지 20여 년이 넘도록 도업(道業)을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참회요, 두 번째는 태어나나 마자 돌아가신 어머니와 본인의 출가로 인해 화병으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은혜를 갚기 위해서였다.



그 후 스님은 티베트·부탄을 거쳐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인도·스리랑카·미얀마 성지를 순례했다. 순례 후 여러 곳을 행각 하며 참선 정진하다가 지장도량 구화산에서 3년간 머물렀다. 이때 스님은 고민사(高旻寺) 주지 월랑으로부터 “고민사에 곧 법사(法事)가 있을 예정이니 와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스님은 고민사로 가는 도중 배를 타야 하는데 돈이 없다고 뱃사공이 스님을 태워주지 않았다. 스님은 뱃사공에게 사정을 하던 중 그만 발을 헛디뎌 물에 빠져 하루 밤낮을 강물에 떠다녔다. 사람들이 겨우 구해 인근 사찰인 보적사(寶積寺)에 모셔다 놓았다. 스님은 며칠간 보적사에서 머물며 입, 코, 항문에서 피를 흘리며 앓았다.


스님은 병이 점점 깊어졌고, 식사를 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홀로 누워 죽음을 기다리면서도 오로지 화두를 들었다. ‘고통받고 있는 이 몸이 어떤 물건인가.’ 화두를 드는데, 몸은 아팠지만 정신은 점점 또렷해졌다. 이렇게 20여 일이 지나면서 기적적으로 몸이 점차 회복되었다.


허운은 인생의 모든 고난을 ‘법의 훈련장’으로 삼았다. 고통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그 속으로 들어가 한 송이 연꽃을 피워냈다. 그의 생애는 수행자의 피와 눈물로 쓴 불멸의 경전이었다.



해발 2,350미터, 쿤밍 시내보다 400미터나 높은 고도. 나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올라갔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 마치 절을 하듯, 땅에 내 마음을 붙였다. 서산의 입구에서 두 시간 남짓 오르니, 허운대사가 80세 무렵 중건했던 화정사(華亭寺)가 나타났다.


절의 연못 위로 부드러운 햇살이 흩어지고, 고요한 물결 사이로 허운대사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듯했다. 그는 이곳이 외국인의 별장으로 팔렸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관청에 청원하여 다시 불사를 일으켰다.



그 시절, 80이 넘은 노승이 삽을 들고 무너진 기와를 다시 얹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가 길에서 주운 금과 옥을 주인에게 되돌려주어, 그것이 화정사의 중창 자금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사람들의 입에 전해진다. 하늘의 뜻이 아니고서야 어찌 이런 인연이 있을까. 고통 속에서도 자비를 놓지 않은 그 마음이, 결국 사찰을 다시 일으켰던 것이다.


나는 화정사의 돌계단을 천천히 올랐다. 그 옛날 허운대사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그 구절이 떠올랐다. 스님이 56세 때, 사미가 다관으로 따라 주는 차를 받다가 뜨거운 찻물이 손에 튀어 찻잔을 떨어뜨렸다. 이때 잔이 깨지는 소리에 깨닫고 다음 오도송을 읊었다.


“잔이 바닥에 떨어져 깨지는 소리,

허공이 산산이 부서지고,

허황된 마음 그 자리에서 고요히 쉬었네.”



삶이란 그 깨진 찻잔과 같다. 깨져야 비로소 비어지고, 비워야만 참된 향기가 피어난다. 나의 병, 나의 불편함, 그 모든 것은 나를 깨뜨리기 위한 부처의 방편이었음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삶에는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이 있는 법이다. 내 뜻대로 되고 좋을 수만은 없는 것이다. 몇 년 후 스님은 또 물에 빠지는 곤란을 겪은 적이 있었다. 그가 남긴 한 마디는 내 가슴에도 깊이 새겨졌다.


“번뇌는 곧 깨달음이요, 재난은 오히려 행복이다.


그러나 허운대사의 고난은 끝나지 않았다. 1949년 모택동(毛澤東)에 의해 중화 인민공화국이 들어선 이래 종교탄압과 숙청이 시작되었다. 1951년 112세의 허운이 광동성 운문산 대각사(大覺寺)에 머물 때였다. 2월 어느 날 공산당 병사들이 들이닥치더니 불사금으로 받은 돈이나 금괴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노승은 그들이 휘두르는 몽둥이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들은 갈비뼈가 부러진 허운을 ‘반혁명분자’라고 부르며 방장실에 가둔 뒤 음식도 주지 않았다. 그들은 허운대사가 죽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2~3일에 한 번씩 들여다보며 구타를 계속했다. 스승이 보는 앞에서 제자 스님들을 고문했다. 그 사건으로 많은 스님들이 뼈가 부러지거나 목숨을 잃었다. 이것이 중국불교사에서 알려진 운문사변(雲門事變)이었다.



1954년 115세 나이임에도 스님은 진여사에 내려와 중일전쟁으로 파괴된 가람을 복구했다. 전 대중이 직접 땅을 개간하고 해외 화교들의 도움으로 진여사의 불사는 원만히 진행되었다. 허운대사에 의해 진여사가 웅장한 가람의 모습을 되찾고 찾아오는 신도들이 많아지자 공산당 병사들이 수시로 들락거리며 감시했다.


그날도 불시에 들이닥친 병사들은 대중들을 한 곳에 모았다. 그리고 허운대사를 중앙에 앉힌 후 제자들에게 스승을 비판하라고 강요했다. 제자들은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허운대사에게 총을 들이대며 자아비판을 하라고 요구했다. 그렇게 공산당으로부터 모진 수모와 핍박을 받아오면서도 수행과 중국 불교중흥을 멈추지 않았던 허운대사는 1959년 진여사에서 자리에 누운 후 10월 13일 120세로 입적했다.


100세를 넘긴 나이에도 스님은 원력을 세우고 실천에 옮겼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 것일까? 실로 목숨이 끊어질 듯 말 듯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화두를 놓지 않고 수행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장렬한 삶이었다.



화정사에서 더 올라 태화사와 용문석굴까지 다다랐다. 깎아지른 절벽 위에서 바라본 뎬티호의 푸른 물결은 허운대사의 깊은 법문처럼 고요하고 깊었다. 그는 그 생애 끝까지 박해를 받았고, 고문 속에서도 “계정혜를 닦고, 탐진치를 없애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삶은 고통으로 점철되었지만, 그 고통이 곧 법문이었고, 그 눈물이 곧 자비였다. 나는 절벽 끝에 서서 두 손을 모았다. 그리고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허운대사여, 당신의 길은 아직도 누군가의 발길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저 또한 이 불완전한 몸으로, 기도를 이어가겠습니다.”


내려오는 길, 햇살은 더없이 따뜻했다. 몸의 통증은 여전했지만, 그것은 더 이상 짐이 아니었다. 고통은 깨달음의 징검돌이 되고, 불편은 자비의 문이 되어 주었다. 나는 그날, 서산의 바람 속에서 깨달았다.


“수행과 순례는 언제나 불완전한 몸으로 떠나는 기도와 같은 것이다.”


난치병 아내가 그랬고, 내 몸이 그랬다. 그 길 위에서 나는 허운대사를 만났고,

그의 법문 속에서 나 자신을 다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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