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색 영혼이 깃든 구채구 물빛 성소 순례
“황산을 보고 나면 다른 산을 보지 않고,
구채구의 물을 보고 나면 다른 물을 보지 못한다.”
(黃山歸來不看山, 九寨歸來不看水)
한 줄의 옛말이 긴 여정을 대신해 준다.
라싸로 가는 길은 아직도 멀고 험하다. 그러나 후회는 없다. 돌아가는 길에 이렇게 아름다운 물빛을 만나다니 오히려 축복이다. 명상은 앉아서만 하는 것이 아니다.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 語默動靜). 걷는 순간(行) 발바닥과 땅 사이의 작은 떨림까지도 깨달음의 문이 된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어제가 아닌 오늘로, 타인에게 아닌 내면으로 이어지는 길이 된다.
행주좌와가 몸의 네 가지 자세라면, 어묵동정은 마음과 존재의 네 가지 숨결이다. 몸과 마음이 서로 비추고, 움직임과 고요가 서로 이어지는 그 지점에서 깨달음은 번개처럼 오지 않는다. 오히려 물방울 같은 미세한 순간들—오늘은 구채구의 물빛을 따라 행주좌와 어묵동정의 순례를 떠난다.
구채구(九寨溝)! 아홉 개의 티베트 마을이 오지 계곡 속에 숨 쉬고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 중국 쓰촨성 청두에서 북쪽으로 약 435km, 민산산맥 해발 2,000m에서 4,000m에 이르는 석회질 카르스트 담수지대.
Y자 모양으로 갈라진 골짜기마다 민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모여 무려 114개의 호수와 수십 개의 폭포를 이루고 있다. 그 물빛이, 바로 세상 어디에도 없는 오색영롱한 빛의 향연을 펼친다.
쓰촨은 예로부터 “천하의 산수는 촉(蜀)에 으뜸 간다”(天下山水勝在蜀)고 불렸다. ‘촉’이라 불린 이 옛 땅에 대자연은 정말 아낌없이 신비를 풀어놓았다. 세계의 보물 팬더곰의 85%가 이곳에 산다는 사실도 우연이라기보다는 필연처럼 느껴진다. 하늘이 내려준 거대한 보물창고, 그 한가운데 구채구가 있다.
구채구는 입구에서부터 수정구(樹正溝), 좌측 남동쪽의 즉사와구(則査洼溝), 우측 남서쪽의 일즉구(日則溝)로 갈라져 있다. 마치 신선의 정원이 세 갈래로 펼쳐지듯, 각 골짜기마다 다른 표정의 호수와 폭포가 숨 쉬고 있다.
구채구는 너무 넓다. 그래서 사람들은 녹색 셔틀버스를 타고 호수와 폭포 사이를 오르내린다. 입장권을 한 번 끊으면 타고, 내리고, 또 타고—자연과의 긴 산책이 이어진다.
수정구에 이르자마자 이미 물빛이 먼저 사람을 부른다. 바람조차 멈춘 호수 위에 언어로 담기 어려운 색채가 고요한 파동처럼 번져 간다.
“와아…”
저절로 터져 나오는 감탄. 중국 곳곳을 다녀 봤다 한들 이 물빛 앞에서는 누구나 어린아이처럼 서 있게 된다. 캐나다에서 왔다는 리사는 “오 마이 갓, 원더풀!”을 연발하며 눈을 떼지 못했다.
“이곳은 제가 가 본 중국 중에서 가장 신비롭고 아름다운 곳이에요. 이렇게 고운 빛깔의 물은 처음 봐요.”
정말 그랬다.
이 파란 물빛, 이 녹색, 이 황금빛의 번짐—도대체 무엇이 이 색을 빚어내는 것일까? 날씨가 흐려도, 비가 와도 물빛은 거의 변하지 않는다 한다. 그래서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구채구의 물빛은 왜 파랄까?
구채구에는 크고 작은 고산호수 114개가 숲 속에 보석처럼 숨어 있다. 현지인들은 이 호수들을 “바다의 아들”이라는 뜻의 해자(海子)라 부른다. 해자들은 모두 투명하다. 너무나 맑아서 자갈과 수초, 오래전에 떨어진 나뭇가지들까지 손을 뻗으면 잡힐 듯 또렷이 보인다.
색깔은 또 얼마나 변화무쌍했는지—어떤 호수는 푸른 사파이어 같고, 어떤 호수는 깊은 비취색, 또 어떤 곳은 노란빛과 청록빛이 섞여 이 세상 것이 아닌 듯한 색을 띤다.
구채구의 물빛은 단순한 ‘파랑’이 아니라 빛과 물, 돌과 시간, 빙하와 바람이 모두 합세해 만들어 낸 영혼의 색깔이다. 이 신비로운 물빛은 대자연의 조화, 그리고 지질의 역사에서 비롯되었다.
구채구가 자리한 곳은 빙하와 칭장판, 양쯔판이 서로 밀고받으며 지각을 뒤흔들어 만든 땅이다. 석회암, 혈암, 사암이 켜켜이 쌓인 지층 위로 빙하가 흘러내리며 유빙(遊氷)의 흔적을 남겼고, 그 틈과 웅덩이마다 물이 고여 호수가 되었다.
땅의 중요한 특징은 카르스트 지형이라는 점이다. 석회암의 주성분인 탄산칼슘이 비와 눈, 지하수에 녹아들며 칼슘, 마그네슘, 탄산입자가 물속에 다량 녹아 있다.
이 미세한 입자들이 햇빛 속에서 특정 파장—남색과 녹색의 반사를 더 강하게 만들어 호수마다 다른 푸른빛과 초록빛을 내게 한다. 조금 더 과학적으로 말하자면, 탄산칼슘이 물과 만나 탄산수소칼슘으로 변해 용해되고, 그 용해물이 다시 침전되며 수많은 ‘보(洑)’, 작은 자연 댐을 만든다.
이 보들에 물이 채워지면서 여러 깊이와 농도의 호수들이 생겨났고, 호수마다 수심, 침전물, 주변 환경이 달라 마치 카멜레온처럼 제각기 다른 빛을 발한다. 그래서 어떤 곳은 짙은 남색, 어떤 곳은 옅은 옥색, 어떤 곳은 황금빛이 섞인 청록이 된다. 물빛은 지층의 기록이자, 수백·수천 년 동안 쌓인 시간의 색이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과학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다. 이토록 아름다운 곳엔 어김없이 전설이 깃든다. 먼 옛날, 남신 다게는 여신 우뤼세를 사랑했다. 그는 바람과 구름을 모아 한 점의 거울을 만들어 선물했다. 하늘빛과 산빛, 강의 물결과 별빛까지 담긴, 완전무결한 사랑의 거울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우뤼세가 그 거울을 들고 있다가 우연히 이곳, 구채구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거울은 산산이 부서졌고, 그 파편들이 땅 곳곳에 박혀 5개의 여울, 12개의 폭포, 10개의 물길, 그리고 수십 개의 샘과 108개의 명소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구채구의 물빛을 바라볼 때 단순한 호수가 아니라 부서진 신의 거울 조각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어딘가 애틋하고, 알 수 없이 그립다 느끼는지도 모른다.
셔틀버스를 타고 계곡을 오르다 보면 먼저 만나는 거대한 호수가 있다. 장해(長海)다. 구채구에서 가장 크고 깊은 호수, 해발 3,150m, S자형으로 휘어진 호수의 길이가 이십 리에 달한다.
물이 맑아 바닥이 보이지만 멀리서 바라보면 푸른 산과 하늘이 모두 거꾸로 비치며 한 폭의 수묵산수화를 만들어 낸다. 눈 녹은 물은 장해에 모였다가 땅속으로 스며들어 장해 아래에 있는 작은 연못, 오채지(五彩池)로 나온다.
장해에서는 장족들이 전통 복장을 빌려준다. 그날 리사는 장족 옷을 입고 호수 위에 선 모델처럼 포즈를 취했다. 늘씬한 그녀의 모습과 장해의 물빛이 어우러져 한 장의 여행 사진이 아니라 한 편의 꿈처럼 남았다.
장해에서 189개의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마침내 오채지에 닿는다. 작고 아담한 호수. 그러나 그 속살은 너무나 맑고 또렷해서 마음까지 씻어내리는 듯하다.
전설에 따르면 여신 우뤼세는 이 오채지에서 머리를 감았다 한다. 그녀가 얼굴에 바른 연지(분홍빛 화장)가 물에 흘러들어 오늘날의 오색 빛깔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또 남신 다게가 매일 장해에서 우뤼세를 만나러 내려오다 남긴 발자국이 바로 189개의 계단이 되었다고도 한다.
전설은 허구일지 모른다. 그러나 여행에서 전설은 현실보다 더 선명한 한 페이지를 남긴다.
오채지 아래에는 지계해(季節海)라 불리는 세 개의 호수가 있다. 말 그대로 계절마다 모습을 바꾸는 물. 여름에는 물이 가득 차 호수가 되고, 가을에는 늪이 되었다가, 겨울에는 물이 말라 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봄이면 다시 새 물과 빛으로 채워진다. 물은 언제나 흐르고, 모습을 바꾸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 작은 호수들이 보여주고 있었다.
낙일랑(落日朗) 센터에서 점심을 먹고 우리는 일즉구(日則溝)로 향했다. 해발 3,000m가 넘는 고도에서 숨은 조금 가빴지만 원시림은 놀라울 만큼 고요했다. 전나무와 가문비나무가 하늘을 가리고, 저 멀리 설산 봉우리가 흰 기도를 올리는 듯 서 있었다
.
산책로를 따라 내려오니 회백색 자작나무 숲과 초해(草海)가 펼쳐졌다. 녹색의 물빛과는 또 다른, 몽환적인 회색과 흰색의 조화. 마음이 자연스레 느긋해졌다.
대나무가 우거진 전죽해(箭竹海)를 지나면 판다가 산다는 웅묘해(熊猫海)가 이어진다. 한때 40마리 이상의 판다가 이곳의 대나무를 뜯어먹으며 살았다고 한다. 관광객이 많아지면서 그들은 점점 더 깊은 숲으로 숨었겠지.
그리고 마침내, 구채구의 백미라 불리는 호수, 오화해(五花海)에 이른다. 즉사와구의 오채지와 함께 구채구의 2대 호수로 꼽히는 곳. 다량의 미네랄이 녹아 있어 물이 유리처럼 투명하고도 영롱하다.
“이게 하늘빛인가, 물빛인가?”
호수바닥에는 오래전에 쓰러진 나무줄기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보통이라면 이미 썩어 사라졌을 그 나무들이 탄산칼슘과 결합해 수면 아래에서 영원의 풍경처럼 남아 있는 것이다.
오화해에서 이어지는 공작하도(孔雀河道)는 약 300m 길이의 수로. 진녹색, 파란색, 청록색의 물이 물감처럼 흘러 내려가며 빛과 그림자를 흔든다.
바람이 일면 물 위에 비친 나무와 산의 모습이 흔들리며 꼬리를 펼친 공작새 같다고 하여
이름 지어졌다.
해자 속에서 잔잔히 고여 있을 때 구채구의 물은 숙녀처럼 고요하다. 그러다 숲을 뚫고 벼랑을 만나면 성격을 바꾼다. 연초록 숲을 타고 흘러내리며 작은 물방울들이 은방울꽃처럼 튀어 오른다.
울퉁불퉁한 비탈을 타고 흐르던 물은 마침내 진주탄 폭포(珍珠灘瀑布)에 이르러 낙차를 이루며 떨어진다. 수백, 수천 개의 물줄기가 마치 진주발(珠簾)을 드리운 듯 끝없이 쏟아져 내린다.
용이 몸을 비트는 듯한 곡선, 연발탄처럼 이어지는 폭포 소리. 옆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 굉음 속에서 이상하게도 마음은 더 고요해진다.
그 아래로 내려오면 또 하나의 폭포와 만난다. 낙일랑 폭포(落日朗瀑布). 아무렇게나 놓인 바위들 사이로 물은 기어오르고, 떨어지고, 부딪치며 또 다른 형상의 아름다움을 만들어낸다. 겨울이면 폭포 전체가 얼어붙어 거대한 수정 조각처럼 빛난다 한다.
낙일랑 폭포를 지나 아래로 내려오면 접시 모양의 잔잔한 호수 서우해(犀牛海)가 기다린다. 물의 흐름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고요한 곳. 바람조차 잠든 듯, 시간마저 멈춘 듯한 호수다.
길 끝의 절에 이르자 티베트의 기운이 물씬 풍긴다. 마니차 아래로 작은 물레방아가 돌아가고 거센 시냇물을 가로질러 나무다리가 멋스럽게 놓여 있다.
입구에는 크고 작은 깃발들이 바람에 나부끼며 형형색색의 물결을 이룬다. 붉은색, 노란색, 흰색 천 위에 불경이 촘촘히 적혀 있다. 기도문 하나하나가 바람을 타고 계곡을 넘어 산허리를 넘는다.
나부끼는 깃발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한때 토번왕조가 흥성하던 오랜 세월의 숨결이 이곳에 그대로 남아 주변의 기운을 제압하고 있는 듯하다. 중국인들은 구채구를 ‘인간 선경(仙境)’이라 부른다. 이곳은 물빛 색채의 왕국이자 물의 영혼이 쉬어 가는 성소다.
이 지역은 산세가 험하고 지진과 지각 활동이 잦은 곳이다. 2008년 쓰촨 대지진 때 주변 도로와 시설 일부가 파손되었지만 다시 복구되어 오늘도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아름다운 곳에는 언제나 어느 정도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여행자는 안다.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그곳에 서 보고 싶은 풍경이 있다는 것을.
구채구의 물빛 앞에 서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깨닫는다.
왜 사람들은 먼 길을 돌아와 이곳의 물을 한 번 바라보고는 다른 물을 쉽게 잊지 못하는지. 그것은 단지 파란 물이 아니라, 수천 년의 시간, 지질, 전설, 기도가 모두 녹아 있는 영혼의 색깔이기 때문이다.
다물빛 성소, 구채구를 순례하고 나니
내 마음도 어느새 호수처럼 맑아졌다.
바람 한 점 일지 않는 수면 위에
푸른 하늘이 고요히 내려앉듯,
내 안의 번뇌들도 조용히 가라앉았다.
걷는 동안 마주한 오색의 물빛,
그 빛을 따라 흔들리던 내 그림자,
그리고 어스름 속에서 피어오르던 작은 불빛들—
그 모든 것이 오늘 하루,
내게 하나의 긴 호흡이자 기도가 되었다.
나는 걸으면서 불빛을 바라보았다.
어둠을 밀어내는 작은 빛이
마치 마음속의 등불처럼
나를 깊은 명상으로 이끌었다.
그렇게 길 위에서, 물빛과 불빛 사이에서
나는 다시 한번 깨달았다.
사람의 마음도,
사랑도,
길도 결국은
맑아지기 위해 흐르는 것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