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날의 은총
12월 15일 월요일, 흐림
오늘은 나름대로 바빴다.
아침에 재활치료사가 시간표를 가져왔다. 재활치료는 7층 치료실에서 진행되고, 아내의 시간은 오후 2시 25분부터 4시 25분까지였다. 시간표를 바라보는 아내의 얼굴에 잠시 생기가 돌았다. 집에서 혼자 하던 재활보다, 전문가의 손끝에서 받는 치료가 더 효과적일 것이라는 기대 때문일 것이다.
아침 7시에 식사를 마치고 병원 건너편 마트에 다녀왔다. 드럼세탁기 세제 2.7리터, 수건 열 장, 화장지, 종이컵, 단감, 왕뚜껑 우동. 병실로 돌아와 보니 이 병원의 세탁기와 전자레인지는 동전을 넣어야 작동한다. 세탁기는 500원, 전자레인지는 100원. 낭비를 줄이기 위한 장치일 것이다.
병실 침대시트 교환은 물론 화장실 청소도 간병사가 해야 한다. 좋은 제도지만, 몸보다 먼저 마음이 적응해야 했다. 매일 아침 병실을 쓸고 닦는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하니까.
아내가 목욕을 하자고 했다. 공동욕실 사용 요일이 정해져 있는데, 우리에게는 월요일이 배정되어 있었다. 준비를 마치고 샤워기를 틀었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미지근한 물뿐이었다. 간호사에게 말하니 조금 기다리라고 했다. 5분쯤 지나서야 겨우 따뜻하다 할 만한 물이 나왔다. 아내는 그 물로라도 서둘러하자고 했다. 그러다 감기라도 걸리면 어떡하지? 최고의 요양병원이라고 선전한 것과는 많이 다르다.
이게 한국 요양병원의 현실이다.
비누칠을 하고 거품타월로 몸을 씻기고 있는데, 아내가 갑자기 큰 것이 급하다고 했다. 잠시 멍해졌다. 선택지는 없었다. 욕실 바닥에 기저귀를 깔고 급히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샤워를 마치고 아내를 병실로 데려다준 뒤, 다시 욕실로 돌아와 바닥을 쓸고 닦고 말끔히 청소했다. 불구부정. 따지고 보면 더럽고 깨끗한 것이 따로 없다.
앉아서 하는 수행만이 수행은 아니다.
이런 순간들이야말로 진짜 생활 속의 수행이다.
문득 생각했다. 밀라레파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
목욕을 끝낸 후 아내를 침대에 눕히고 젖은 내의와 수건을 들고 세탁실로 갔다. 500원짜리 동전을 넣고 전원을 누르고 작동버튼을 눌렀지만 세탁기가 작동하지 않는다. 기계마다 방식이 달라 당황스러웠다. 지나가던 간병사 아주머니에게 도움을 청했다. 청바지 코스를 선택한 뒤 작동 버튼을 누르라고 했다. 이윽고 드르륵, 세탁기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건조기는 없다. 세탁물을 실내에 널어 건조했다.
점심을 먹고 아내를 휠체어에 태워 7층 재활치료실로 갔다. 이미 많은 환자들이 대기 중이었다. 아내도 조용히 줄에 섰다. 운동치료, 작업치료, 전기치료, 다시 운동치료까지 이어졌다. 아내는 생각보다 잘 적응했다.
치료 중간에 내려와 병실에서 침대 시트를 갈고 있는데 간호사가 들어왔다. 내일 옆 침상에 새로운 환자가 입원한다고 했다. 며칠간은 둘만 쓰는 병실에서 호사를 누렸지만, 내일부터는 다른 환자와 함께 지내야 한다. 늘어놓았던 살림을 정리하고 병실을 깨끗이 청소했다. 잘 지내야지.
오늘도 잘 지냈다.
바쁘게 지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날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로, 은총을 받은 날이었다.
나의 스승 밀라레파여,
오늘 하루도 무사히 보냈습니다.
한 마디 가르침을 주소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날을
헛되다 여기지 마라.
그날은 업이 쉬고, 마음이 숨을 고른 날이다.”
— 밀라레파의 가르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