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례자들의 숨이 머무는 집과 몸을 살리는 집
순례순순례자들의 사랑방 야크호텔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여 세계 각처에서 순례자들이 모여든 야크호텔은 초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말이 호텔이지 시설은 유스호스텔 수준이다. 우리는 1층 도미토리를 얻고자 했다. 방값도 싸고 드나들기도 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배인은 방이 이미 다 나갔고, 그나마 운 좋게 지금 막 여행자가 떠나면서 3층 방이 딱 하나 비어 있다고 했다. 그 방도 지금 들어가지 않으면 곧 나갈 것이라고 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우리는 그 방에 머물기로 했다.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3층까지 몰라가는 데 숨이 찼다.
라싸의 오래된 중심, 조캉사원과 바코르 순례길 가까이에 자리한 야크호텔은 처음부터 여행자를 위한 호텔이 아니었다. 이곳은 순례자를 위한 쉼에서 시작되었다. 조캉사원이 티베트 종교의 심장이고, 포탈라궁이 정치와 역사의 상징이라면, 야크호텔은 길 위의 사람들을 이어주는 또 하나의 중심, 순례자와 여행자들의 사랑방이었다.
국적과 언어가 다른 전 세계의 여행자들이 이곳에 모여든다. 티베트의 정보가 교환되고, 낯선 이들이 동행이 되며,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다시 흩어진다. 이곳에서 만남은 계획이 아니라 우연의 형태로 이루어진다.
라싸의 야크호텔은 숙소이면서 동시에 언론의 현장이었다. 침대는 잠을 재우는 가구였지만, 창문은 세계로 통하는 데스크였다. 이곳에서 기자들은 숨을 고르고, 원고는 숨결처럼 태어났다.
1980~2000년대, 티베트 취재가 제한적이던 시절에 야크호텔은 외신과 국내 언론의 집결지였다. 비자와 허가, 가이드의 동선이 엮이는 동안 기자들은 이곳에서 정보를 교환했고, 바코르의 소음과 포탈라의 고도를 문장으로 증류했다. 공식 브리핑은 적었고, 대신 복도 대화와 식당의 수군거림이 뉴스의 씨앗이 되었다.
순례자들의 사랑방이었던 야크호텔은 중립의 섬 역할을 했다. 순례자의 염송, 군인의 부츠 소리, 상인의 계산기—서로 다른 리듬이 한 로비에서 섞였다. 기자들은 여기서 포탈라궁의 흰 벽을 바라보며 문장을 다듬고, 조캉사원 앞 오체투지의 박자를 메모했다. 야크호텔에서 라싸는 기사로 기록되었고, 기사는 다시 라싸의 침묵을 키웠다.
야크호텔의 오래된 미덕은 서두르지 않음이었다. 확인되지 않은 말은 흘려보내고, 확인된 사실도 한 박자 늦춰 썼다. 이곳에서 언론은 선동보다 맥락을, 속보보다 지형을 배웠다. 고도는 숫자가 아니라 몸의 반응이었고, 종교는 통계가 아니라 호흡이었다.
밤이 되면 복도는 조용해졌다. 원고를 마친 기자의 어깨가 내려가고, 순례자의 발걸음이 낮아졌다. 야크호텔은 말없이 알려주었다. 기록은 정복이 아니라 동행이라고—그래서 기사도, 여행도, 기도도 모두 천천히 가야 한다고. 작게 웃자면, 이곳에선 와이파이가 약해도 이야기는 강했다. 속도는 느렸지만, 문장은 오래 남았다. 라싸의 밤공기처럼.
나 역시 코라를 돌고 사원을 순례한 후 야크호텔로 돌아와 숨을 고르며 그날의 순례기록을 호흡으로 기록했다. 그 몇 줄 안 되는 기록이었지만, 나에게는 소중한 메모였다, 그 메모가 모여서 순간순간 촬영한 사진은 귀한 자료가 되어 나만의 숨 가쁜 순례기록이 되었다. 그 짧은 기록이 지금 순례기로 다시 태어나 세상에 내보내고 있다.
야크호텔은 크게 드러내는 건축이 아니다. 금빛도 없고, 과시도 없다. 두툼한 벽과 낮은 층고, 고원의 찬 바람을 막기 위한 단단한 구조. 이 땅에서 집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생존의 기술이다. 야크호텔의 건축은 티베트 전통 주거 양식에 기반을 두고, 중앙아시아 상인 숙소의 구조를 닮았다. 안으로 품은 공간, 바람을 가두는 벽, 오래 머물도록 설계된 집.
“여기서는 오래 머물러도 된다.”
그래서 이름이 야크다. 빠르지 않고, 많이 말하지 않으며, 무거운 짐을 조용히 옮기는 야크의 존재처럼. 아침이면 오체투지를 마친 순례자들이 차 한 잔을 들고 로비에 모여든다. 누군가는 무릎을 문지르고, 누군가는 말없이 벽에 기대 숨을 고른다. 또 누군가는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도착하여 지친 순례의 무게를 내려놓는다. 언어는 제각각이지만, 대화는 늘 비슷하다.
“어디서 왔는가.”
“얼마나 걸렸는가.”
“오늘은 어디까지 도는가.”
야크호텔은 정보를 교환하는 곳이 아니라 경험을 식히는 곳이다. 여기서 고통은 자랑이 되지 않는다. 그저 조용히 나뉠 뿐이다. 우리가 머문 3층 방 창가에서, 나는 아내의 숨을 살피며 바깥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라싸의 전경이 아니라 사람의 리듬이었다. 걷는 속도, 멈추는 시간, 숨의 깊이.
20세기 후반, 외국인의 티베트 입경이 제한되던 시절, 야크호텔은 공식도 비공식도 아닌 회색지대의 안식처였다. 서양의 여행자, 인도의 수행자, 티베트 순례자, 망명길에 오른 이들까지—이 호텔은 묻지 않았다. 왜 왔는지, 얼마나 머무를지, 무엇을 믿는지.
그래서 이곳은 수많은 이야기의 환승역이 되었다. 누군가는 여기서 라싸에 들어왔고, 누군가는 여기서 생을 마쳤으며, 누군가는 다시 삶으로 돌아갔다. 야크호텔의 역사는 문서로 남아 있지 않다. 대신 사람의 기억 속에 켜켜이 쌓여 있다.
우리에게도 야크호텔은 기억 속에 짙게 남아있다.
우리가 머문 3층 방은 높지도 낮지도 않았다. 바로 그 점이 중요했다. 조캉의 종소리가 들리고, 거리의 발걸음이 닿지만, 그 소음에 완전히 휩쓸리지는 않는 높이. 아내의 숨이 가빠질 때, 나는 창을 열었다. 라싸의 공기는 차갑지만 정직하다. 거짓 호흡을 허락하지 않는다. 야크호텔은 나에게 순례를 요구하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오늘은 여기까지여도 된다.”
데스크의 지배인은 라싸의 밤풍경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옥상으로 올라가라고 했다. 밤이 오면 나는 숨을 고르며 옥상으로 올라갔다. 소형 카메라를 들고, 계단을 천천히 올랐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라싸의 상징인 포탈라궁이다. 포탈라궁은 거대한 돛처럼 솟아 있었다. 그러나 주인을 잃은 배는, 마치 방향을 잃고 표류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반대편에는 티베트 불교의 산실, 조캉사원이 금빛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그 너머로는 어둑한 설산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었다. 일설에 따르면, 달라이 라마는 저 설산을 넘어 인도로 향했다고 한다.
희미한 등불 하나가 비인 하늘에 걸렸다. 와사등(瓦斯燈)처럼 켜진 불빛 너머로 안개와 설산이 겹겹이 포개진다. 그 빛에 비친 라싸는 더 고독해 보였다. 야크호텔 옥상에 서서, 나는 문득 김광균의 「와사등」을 떠올렸다.
와사등 불빛 사이로 마니차가 돌아가는 소리, 가죽신이 돌바닥을 긁는 낮은음, 그리고 밤이 깊어질수록 기도로 변해가는 숨소리들이 들려왔다.
3층 방에서 우리는 기도문을 외우지 않았다. 아내의 숨은 가빴고, 나는 말이 많아질수록 기도에서 멀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약속처럼 숨을 맞췄다.
들이쉴 때,
“여기까지.”
내쉴 때,
“괜찮다.”
아내의 손을 잡고 숨의 오르내림만을 헤아리다 보면, 라싸의 밤은 천천히 우리 쪽으로 누워 들었다.
야크호텔은 숙소가 아니라 숨이 기도가 되는 집이었다.
야크호텔 정문에는 여행자들의 게시판이 걸려 있다. 누군가는 도착을 알리고, 누군가는 다른 곳으로 떠나는 여행을 알리는 곳이다. 우리는 며칠 후에 라싸를 떠나서 간체, 시가체, 초모랑마를 지나서 네팔로 넘어가려고 한다. 나는 게시판에 "육로를 통해서 네팔로 남어가 동행자를 구함"이라는 내용을 적어서 게시판에 붙였다. 지프를 한대 렌트해서 셰어를 하여 넘어갈 예정이다.
누구를 만날지는 알 수 없다. 골무드에서 라싸로 올 때는 이스라엘 두 청년을 만나서 택시를 타고 탕글라 고개를 무사희 넘어왔다. 그러나 앞길은 더 험하고 긴 여정이다,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를 넘어서 네팔 카트만두까지의 여정이기 때문이다.
-사원에서 마음을 씻고, 산성천채관에서 몸을 살렸다.
우리는 오늘 아침에도 뚱보아줌마네 집으로 갔다. 뚱보아줌마는 본명이 아니다. 라싸에서 내가 편의상 붙인 이름이다. 야크호텔 근처, 간판도 소박한 산성천채관은 티베트식 간이음식점이다.
이 집에는 녹두죽이 있고, 쌀밥이 있고, 만두와 뚝빠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을 먼저 배 불리는 웃음이 있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만두가 찜통 위에서 숨을 쉰다. 그 김 속에는 라싸의 아침이 들어 있다.
“따시뗄레!”
내가 손을 들어 인사하자 아줌마는 기다렸다는 듯 싱긋 웃는다.
“따시뗄레!”
이 짧은 인사는, 이 도시에서 가장 따뜻한 언어다.
남편은 반죽을 늘여 면발을 아줌마는 서서 요리를 한다. 의자는 낮고, 천장은 더 낮지만 이곳에서는 마음이 허리를 펴고 앉는다. 우리는 뚝빠와 모모를 시켰다. 붸차(야크 우유로 만든 버터차)를 한 잔 곁들였다.
붸차(བོད་ཇ་, Po Cha) 차가 아니다. 붸차는 살아남는 기술이다. 찻잎에 물을 붓고, 야크버터와 소금을 더해 통에 넣고 오래 흔든다. 거품이 일 때까지— 고원의 바람처럼 질기게. 이렇게 만들어진 붸차는 첫 모금에 당황을 주고, 두 번째 모금에 체온을 주며, 세 번째 모금에서 “아, 여기는 티베트구나” 하고 몸이 알아듣는다.
5위안이면 아침 한 끼가 해결된다. 그러나 티베트 순례자들의 식사에 비하면 이 또한 사치에 속한다. 순례자들의 밥은 단출하다. 짬빠와 붸차. 보릿가루에 버터차를 부어 주먹으로 반죽해 먹는 짬빠는 고원을 건너는 가장 오래된 기술이다.
짬빠는 배를 채우는 음식이 아니라 몸을 오래 버티게 하는 음식이다. 붸차는 만병통치약이다. 마시면 몸이 덥고, 입술에 바르면 립밤이 되고, 뺨에 문지르면 영양크림이 된다. 손발에 바르면 바셀린이 된다.
티베트인들은 몸과 세계를 따로 구분하지 않는다. 먹는 것이 곧 살아가는 방식이다. 식당을 나서며 “투제체.”라고 말하자, 뚱보 아줌마는 손을 흔들며 웃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우리는 이미 정이 들어 있었다.
라싸에 머무는 동안 우리는 매일 이 집 앞을 지났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매일 이 집으로 돌아왔다. 야크호텔 문을 나서면 길 건너 붉은 간판 하나가 보인다. 산성천채관. 사천요리집이라고 적혀 있지만 이곳은 요리보다 생활에 가깝다.
대나무 찜통에서 김이 오르고, 유조가 기름 속에서 천천히 부풀어 오른다. 누군가는 만두를 먹고, 누군가는 국수를 말없이 후루룩 삼킨다. 여기에는 설명이 없다. 그저 먹고, 다시 길을 나선다.
사원에서는 욕심을 내려놓는 법을 배우고, 이 식당에서는 몸을 돌보는 법을 배운다. 티베트의 수행은 굶는 데 있지 않다. 걷고, 기도하고, 그리고 잘 먹는 것까지가 수행이다. 어느 날은 사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버터차 대신 이 집의 뜨거운 국물을 마셨다. 속이 풀리자 마음도 함께 풀렸다.
생각해 보면 여행에서 가장 오래 남는 것은 유명한 사원이 아니라 이런 식당이다. 아무 말 없이 문을 열어두고, 아무 설명 없이 따뜻한 한 끼를 내어주는 곳. 라싸에서의 하루는 늘 이랬다. 사원에서 마음을 씻고, 산성천채관에서 몸을 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