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싸에서 만난 한국인 여행자들

-아리랑 식당에서 펼쳐진 티베트 여행 무용담

by 찰라


바낙숄 호텔에 자리한 중국국제여행사에서 우리는 네팔로 넘어가는 여정을 예약했다. 라싸에서 얌드록초 호수를 지나 간체와 시가체를 거쳐,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를 밟고 장무 국경을 넘어 네팔로 향하는 4박 5일의 길. 운전사가 딸린 지프차 한 대를 통째로 빌리는 일정이었다. 이 길에는 반드시 여행허가서가 필요했다. 일행은 우리 부부와 H, 그리고 Y군—넷이었다.


라싸에 도착하던 날 나는 야크호텔 게시판에 네팔로 넘어가는 여행자를 구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영문 메모를 손글씨로 싸서 붙여 놓았다.


스티카를 표시한 것이 내가 붙인 메모장이다.


〈5월 24일 출발〉

-구함 (Wanted):네팔로 가는 4박 5일 여행 동행자 모집

-경로: 얌드록초 호수 경유 → 간체(Gyantse) → 시가체(Shigatse) →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롱북) → 구 띵리(Old Tingri) → 장무(Zhangmu, 네팔 국경)

-비용: 1인당 3,600위안 (현금)

-모집 인원: 비용을 함께 나눌 추가 3명 필요

-연락처: 야크 호텔(Yak Hotel) 방 번호 3306호
-출발 희망일: 5월 24일

-문의 전화: 6374397, F.I.T. 바낙숄(Banakshol)
작성일: 2005년 5월 18일

※ 하단 메모: 한국인 2명 이미 참여 중(한글로 표기)


이 광고를 보고 맨 처음 야크호텔 내방으로 찾아온 사람이 S사진작가였다. 노크 소리를 듣고 방문을 여니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 한국인이 카메라를 목에 걸고 서 있었다. 그는 "한국인 2명 확보"란 내용을 보고 반가워서 찾아왔다고 했다. 그는 네팔과 티베트를 여행하며 주로 인물사진을 전문으로 찍는 사진작가였다. 그는 조캉사원 앞에서 바코르를 도는 순례자들을 매일 찍는다고 했다. 그의 모습이 꼭 티베트인을 닮아 보였다. 그는 전생에 티베에서 살았을까 할 정도로.


그는 며칠 전 카트만두에서 비행기를 타고 라싸에 도착했는데, 일주일 후에 다시 비행기를 타고 카트만두로 갈 예정이라고 했다. 지프를 타고 전에 육로를 통해서 네팔로 간 적이 있었는데, 경치는 너무 좋았지만 너무 힘든 여정이어서 다시 갈 염두가 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가 다녀간 뒤 또 다른 한국인 H와 Y가 다녀갔고, 인도 여행자와 독일 여행자 한 사람도 다녀갔다. 결국 다른 사람은 일정이 맞지 않아 함께 하지 못했고, H와 Y는 합류를 하겠다고 했다. H는 중년의 방속국 영상작가였고, Y는 군대를 제대한 후 무작정 티베트로 떠나온 젊은 여행자였다.


사진작가 S는 비행기로 곧장 카트만두로 날아가겠다고 했다. 나는 S의 카트만두 항공권을 우리 4명의 일정과 묶어 계산해 비용을 할인해서 구매해 주었다. 그는 덕분에 항공권을 싸게 샀다며 남은 돈으로 저녁을 사겠다고 했다. 여행이란 원래 이렇게 계산되지 않은 몫이 사람을 배부르게 한다.


그날 FIT 여행사에서 뜻밖의 얼굴을 다시 만났다. 윈난성 다리 다리문 게스트 하우스에서 잠시 스쳐 지나갔던 중년의 털보였다. 캐나다에서 홀로 떠돌다 여기까지 흘러온 방랑자였다. 낯선 땅에서의 재회는 언제나 숙연하다. 우리는 모두 근처 한국식당 아리랑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리랑 식당은 라싸 시내 중심, 동북경거리 한복판에 있었다. 주인은 길림성에서 온 조선족 동포 이동화 사장. 그는 운동신경 마비라는 불치병을 고치기 위해 ‘신들의 땅’ 라싸로 왔다고 했다. 부인의 등에 업혀 병원을 전전하던 세월 끝에, 2000년 아무 연고도 없이 이곳에 도착해 고산의 약이란 약은 모조리 먹어보았다고 했다. 그리고 기적처럼, 그는 혼자 걷기 시작했다. 종합검진 결과도 이상이 없었다. 기적은 어쩌면, 끝까지 떠나지 않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상일지도 모른다. 건강을 되찾은 그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한국식당을 열었다. 그날이 2004년 8월이었다고 한다.


삼겹살이 불판 위에서 지글거리고, 김치찌개와 토장국이 테이블을 채웠다. 소주가 한 병 놓이자 이야기는 자연스레 길 위로 흘러갔다. 그 자리에는 수미산을 향해 가는 시인도 있었다. 술잔이 오르내릴수록 각자의 무용담이 꽃처럼 피어났다.


털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다리에서 리장을 거쳐 샹그리라로, 그곳에서 중국 여행자들과 우연히 합류해 차마고도를 타고 라싸로 들어왔다는 이야기였다. 지프차 한 자리가 비어 있었고, 중국인 틈에 섞이자 검문은 거짓말처럼 수월해졌다. 길은 늘 그렇게, 용기를 가장한 우연에게 열린다.


시인의 이야기는 더 극적이었다. 시닝에서 골무드까지 기차를 타고 내려오자, 버스터미널에서 낯선 사내가 접근했다. 공안원이었다. 라싸로 가느냐고 묻더니, 500위안만 내면 태워주겠다고 했다. 버스에 오르니 좌석은 없었고, 운전사는 바닥을 가리켰다. 그가 다시 공안원을 찾으려 했을 때, 사내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버스 통로에 벌렁 누웠다. 그리고 오직 수미산만을 생각하며 잠들었다. 눈을 뜨니 라싸였다. 사각진 얼굴, 단단한 눈빛. 그는 한 구절 시처럼 말했다.


“수미산이 나를 기다리고 있네.”


허가 없이, 일반 버스를 타고 순례자들 틈에 끼어 수미산으로 가겠다는 시인의 말에 우리는 잠시 말을 잃었다. 무모하다고 해야 할지, 가상하다고 해야 할지 모를 용기였다.


Y군의 사연도 비슷했다. 시닝에서 가진 돈을 모두 도난당해 허가서를 받을 수 없던 그는, 역시 500위안으로 골무드에서 라싸로 들어왔다. 비자 만료가 다가오던 참에 우리를 만났고, 내가 아는 지인의 도움으로 한국의 부모님으로부터 송금받아 네팔행에 합류했다. 길 위에서 사람은 사람으로 살아남는다.


원래 골무드나 청두에서 라싸로 들어오려면 4박 5일짜리 허가서에 적지 않은 비용이 든다. 그러나 때로는 눈을 감아주는 시선 하나로 길이 열린다. 합법과 불법의 경계는 이곳에서 늘 숨을 고르고 있었다. 우리도 이스라엘 여행자 두 명과 합류하여 택시를 타고 금단의 땅 라싸의 경계를 넘어왔다.


밤은 깊어가고, 소주병은 비어갔다. 알고 보니 S 사진작가는 부안에서 대대로 염전을 해온 소금부자였다.


“나는 아마 전생에 네팔이나 티베트에서 살았던 모양입니다. 다른 여행지는 눈에도 보이지 않고요, 자꾸만 자석처럼 이곳에 끌려서 여행을 오곤 합니다. 처음에 아무런 정보도 없이 무작정 수미산으로 여행을 갔었어요. 티베트의 순례자들 틈에 끼어서 수미산을 오르다가 고산병 때문에 죽을 뻔했어요. 그래도 참고 또 참으로 수미산 아웃코라를 돌았어요.”


그는 수미산 아웃코라를 돌다 고산병으로 들것에 실려 내려온 적도 있다고 했다. 그래도 다시 가고 싶다고 했다. 체력이 허락하는 날까지, 몇 번이고. 시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외쳤다.


오, 나의 수미산이여! 내 그대에게 다가가리라! 선생님 수미산에 여행대하여 좀 더 자세히 들려주세요.”


시인은 고개를 들고 수미산을 바라보듯 외치며, S에게 수미산 여행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들려주라고 졸라댔다.


S선생이 조용히 수미산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네 개의 종교가 함께 신성시하는 성산, 네 개의 대하가 태어나는 자리. 한 바퀴를 돌면 일생의 업이 씻기고, 열 번이면 오백 년의 윤회가 지워지며, 108 번이면 해탈에 이른다는 믿음. 그는 해발 4,670미터에서 시작해 5,470미터의 고개를 넘는 53킬로미터의 순례길을 걸었다고 했다. 티베트인들은 하루 만에 돌지만, 우리에게는 목숨을 건 길일 수도 있는 길이라고 했다.


“오, 저기 수미산이 보입니다. 내 결코 수미산을 오르고 말리라! 선생님 감사합니다.”


시인은 감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당장이라도 수미산을 향해 걸어 나갈 기세였다. 아리랑 식당 밥값은 계산은 S가 했다.


“선생님, 오늘 소금 몇 가마 값은 쓰셨겠네요? 하하하.”


털보의 농담에 모두 웃었다.


“이런 자리라면 소금 몇십 가마라도 아깝지 않지요.”


아리랑 식당을 나서며 우리는 각자의 숙소로 흩어졌다. 라싸의 밤공기는 차고 맑았다. 그날, 우리는 모두 같은 것을 안고 걸었다. 각자의 길이 달라도, 마음속에는 같은 산 하나가 서 있었다. 내일 새벽 우리는 그동안 정들었던 라싸를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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