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에 티베트에서 살았나 봅니다

-라싸의 뒷골목 순례기

by 찰라


그대, 어디서 왔는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짬빠나 한 그릇 들게나

그대, 어디로 가는가

잠시 숨을 고르고

버터차나 한 잔 들고 가게나


이제 라싸를 떠날 시간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머무는 동안 나는 매일 조캉사원의 코라를 돌았고, 때로는 사원 옥상에 올라 라싸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낮은 지붕 위로 햇빛이 스며들고, 먼 산의 윤곽이 하늘과 섞이는 시간이었다.


문성공주의 사랑이 깃든 이 사원은, 지금도 가장 많은 순례자의 마음을 끌어당긴다. 그래서 조캉사원을 감싸 도는 코라에는 늘 남녀노소의 발걸음이 넘쳐났다. 아이의 손을 잡은 노인도 있었고, 이마에 기도의 먼지를 묻힌 젊은 순례자도 있었다. 모두가 서로를 밀치지 않고, 말없이, 같은 방향으로 돌고 있었다.


부처님 오신 날을 전후해 라싸는 숨이 가빠질 만큼 붐볐다. 티베트 전역에서,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모여든 순례자들이 도시를 채웠다. 그들은 마치 사원이라는 거대한 중심에 이끌리듯, 조캉사원의 블랙홀 속으로 천천히 빨려 들어갔다. 시계방향으로, 멈춤 없이.



라싸에 머무는 동안 내가 가장 좋아하던 시간은 조캉사원 옥상에 앉아 그 흐름을 바라보는 일이었다. 참여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생각은 사라지고, 마음은 저절로 고요해졌다. 오늘도 나는 한동안 옥상에 앉아 사원 앞 광장을 내려다보았다. 광장에서는 사람의 파도가 일렁였고, 사원 바깥 바코르에서는 발걸음들이 시계처럼 느리고 정확하게 원을 그리고 있었다.


그때 문득 깨달았다. 이곳에서 걷는 이는 모두 순례자이지만, 잠시 멈춰 바라보는 이 또한 같은 길 위에 있다는 것을. 라싸는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고, 나는 이미 한 번 더 이곳에 도착해 있었다. 몸은 옥상에, 마음은 그 원의 중심에.


이들이 좀 더 자유롭게 살 수는 없을까? 침묵을 하고 있지만 그들은 나라를 빼앗긴 고통과, 망명을 떠난 지도자를 잃은 아픔, 그리고 자유와 종교를 억눌림 받는 속박 속에 살고 있다. 그러기에 이들의 기도는 더 간절하다. 지도자 달라이 라마는 인도에서 망명정부를 세우고 있지만, 이곳 라싸에는 남겨진 사람들은 매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의 원을 그리며 코라를 돌고 있다. 문득 우리의 역사—일제강점기 상해 임시정부가 떠올랐다. 시간과 장소는 달라도, 상처의 결은 놀라울 만큼 닮아 있었다.



왜 세계는 끊임없이 침략하고 정복하는가. 무슨 권리로 타인의 땅과 자유를 빼앗는가. 신이 있다면, 부처가 있다면, 그 많은 이름의 신들은 왜 침묵하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풀리지 않는 화두였다. 다만, 강해야만 살아남는다는 이 논리는 역사 속에서 늘 증명되어 왔다. 강한 자는 남고, 약한 자는 사라졌다.


그렇다면 정의란 무엇이며, 자비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그 질문을 가슴에 안은 채 옥상에서 내려와 낭코르로 들어섰다. 낭코르는 조캉사원 내부를 도는 가장 좁은 코라다. 마니차를 돌리는 손, 오체투지로 바닥에 몸을 던지는 사람들, 숨이 막힐 듯한 통로 안에서 기도는 오히려 더 깊어졌다.


마니차는 손때로 반질반질했다. 수많은 생의 사연이 그 표면에 스며들어 있었다. 사원 밖 바코르에는 걸인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손을 벌리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러면 순례자들이 1각, 5각, 많아야 1위안을 말없이 쥐여주고 지나갔다. 아내는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코라에 앉아있는 걸사들에게 빠짐없이 1위안씩을 나누어주었다. 나는 그런 아내를 위해서 1위안짜리 잔돈을 충분히 준비해 주었다.



순례자들 역시 대부분 가난해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보다 더 가난한 이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배고픔은 배고픔을 알아보는 법이다. 특히 아이를 업거나 안은 여인들이 많았다. 얼굴이 부어 있었다.


“저 사람들 얼굴이 부은 것 같아요.”

“아마 잘 먹지 못하고 굶어서 그럴 거요.”


그들의 표정을 보면 하루 두 끼도 힘들다는 말이 실감 났다. 아내는 아이들 손에도 1위안씩을 쥐여주었다. 1위안이면 현지인들은 짬빠 1그릇을 사 먹을 수 있다. 우리도 라싸의 골목식당에서 1위안을 주고 짬빠를 사 먹곤 했으니까. 기름때 묻은 옷, 세수도 못한 얼굴, 그러나 눈동자는 놀라울 만큼 맑았다.



바코르를 돌다가 우리는 한국 학생 박 군을 만났다. 한 달째 라싸에 머물고 있다는 그는 골목골목을 티베트 사람처럼 꿰고 있었다.


“저는 전생에 티베트에 살았던 것 같아요. 라싸를 떠나고 싶지 않아요.”


그는 우리를 여행자들이 거의 모르는 곳으로 데려가겠다고 했다. 우리는 그를 따라 좁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그는 티베트인처럼 성큼성큼 걸었고, 아내와 나는 그를 따라가는데 숨이 찼다. 골목 끝에는 작은 사원이 있었다. 마당에는 사람들이 빽빽이 앉아 오른손엔 마니차, 왼손엔 108 염주를 들고 느긋하게 기도를 돌리고 있었다.


창고에서는 큰 솥이 쉼 없이 숨을 쉬고 있었다. 버터차는 끓고, 짬빠는 퍼지고, 손에서 손으로 기도가 옮겨 다녔다. 조건 없는 나눔—무료급식이었다. 우리도 펄펄 끓는 짬빠 한 그릇과 버터차 한 잔을 얻어 들었다. 함께 기도하며 나누어 먹는 짬빠와 버터차. 그것만으로 점심은 충분했다. 우리 절의 공양과 닮았지만, 결은 조금 달랐다. 이들은 받는 마음이 아니라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릇을 들고 있었다.



차를 마시는 순간에도 한 손은 마니주를 놓지 않았다. 씹는 동안에도, 삼키는 동안에도, 마음은 기도의 궤도를 벗어나지 않았다. 음식을 먹으면서도 기도를 놓지 않는 그 자세가—과장이 아니라—거룩해 보였다. 배를 채우는 일이 아니라, 마음을 비우는 식사였다.


옥상으로 올라가니 노인들이 벽에 기대어 앉아 조용히 마니차를 돌리고 있었다. 우리가 다가가자 그들은 아무 말 없이 미소를 건넸다. 설명도 설교도 없는 인사. 모두가 편안한 표정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행복해 보였다. 그들을 바라보는 순간, 내 마음에도 보온병 같은 온기가 돌았다. 어디 먼 고향의 사랑방에 앉아 있는 기분—낯설지 않은 평온.


아내와 나도 박군도 그들 곁에 조용히 앉아 마니주를 돌렸다. 등을 벽에 기댄 채, 호흡을 낮추고, 손목의 원을 믿었다. 그러자 그들의 기도의 온기가—말보다 먼저—내 마음속으로 스며들었다. 노인의 편안한 이마에서, 노파의 깊은 미소에서, 아이들의 순진무구한 웃음 속에서 나는 더할 나위 없는 안온함을 느꼈다. 행복은 이렇게 소리 없이 와서, 사람을 제자리에 앉힌다.


기도는 홀로도 길이 되지만, 함께일 때 더 깊은 울림을 준다. 나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혼자 금강경을 독송한다. 그 고요는 분명하다. 그러나 여러 도반과 함께 독경할 때, 경의 파도는 더 깊고 넓게 밀려온다. 개인의 숨이 모여 합창이 되고, 합창은 다시 침묵으로 돌아간다. 그 침묵이 마음의 바닥을 고르게 다진다.


이곳, 라싸의 이름 없는 사원의 옥상에서 나는 배웠다. 기도는 말의 기술이 아니라, 함께 머무는 기술이라는 것을. 각자의 손은 다른 속도로 마니주를 돌리지만, 마음의 원은 하나로 겹쳐진다는 것을.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보지 않아도 안다. 지금 이 순간이—이미—충분하다는 것을.


행복이란 어디에 있는가.
찾아 헤매는 장소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마음이 머무는 자리 아닐까.
여기, 라싸의 뒷골목 허름한 작은 사원의 공양간에서,

그리고 사원의 볕에 잘 드는 아담한 옥상에서,
짬빠의 고소함과 버터차의 짠 숨 사이에서,
행복은 조용히 나를 앉혀 두고 있었다.



여행지에서는 그들처럼 생각하고, 그들처럼 움직일 때 비로소 손님이 아니라 사람이 된다. 마니차를 돌리다 보니 지구도 돌고, 마음도 돌고, 사람도 돌고, 삶도 돌고 있었다. 윤회의 고뇌가 마니차 속에서 녹아내리고, 번뇌의 강물은 만다라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날 나는 먼 길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기분이었다. 라싸의 뒷골목에서 나는 순례의 안쪽을 만났다.


그대, 어디서 왔는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짬빠나 한 그릇 들게나

그대, 어디로 가는가

잠시 숨을 고르고

버터차나 한 잔 들고 가게나


-라싸의 뒷골목에서 마니주를 돌리며..



월, 수, 금 연재
이전 15화라싸에서 만난 한국인 여행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