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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라 Dec 23. 2018

5. 미운 오리 새끼와
살아있는 인어공주

▶안데르센의 나라 덴마크 코펜하겐

미운 오리 새끼의 꿈


다음 날 아침 부엌으로 가니 둘리자매가 먼저 나와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내가 손을 들고 인사를 하자 그들도 손을 들어 안사를 하면서 함께 자리를 같이 하자고 손짓을 했다. 토스트가 담긴 접시를 들고 합석을 하자 둘리자매가 웃으며 반겼다. 


“어젯밤에는 너무 고마웠습니다.”

“별말씀을, 잠은 잘 잤나요?”

“네, 여긴 며칠이나 머물 건가요?”

“우리는 한 도시에 최소한 3일 정도 머무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데 코펜하겐엔 5일 정도 머물 예정이지요. 두 분은요?”

“우린 이틀간 머물 예정입니다. 북유럽으로 가는 길이지요. 코펜하겐 다음 여행지는 어디지요?”

“우리도 북유럽으로 가는 중이에요. 여행코스가 같군요.”

“그럼 또 만날 수 있겠네요. 그 차는 무슨 차지요?”

“아, 이 차요? 마떼라고 불리는 아르헨티나 차지요.”

“차 그릇이 참 예쁘군요.”

“우린 여행 중에도 매일 마테차를 마시지요. 좀 마셔볼래요?”


언니가 찻잔을 내게 내밀었다. 커피포트에 뜨거운 물을 담아 마테차를 넣은 차 종지에 부어 파이프처럼 생긴 빨대로 돌아가며 마신다고 했다. 금발 머리를 곱게 빗어 내린 언니는 영화배우 맬 깁슨을 닮았다. 긴 얼굴에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큰 눈을 가지고 있었다. 타원형에 백발을 한 동생은 마냥 웃기만 했다.


▲매일 마테차를 마시는 둘리


물담배를 피우듯 파이프를 빨자 따뜻한 차가 구수하게 미각을 자극하며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차 맛이 마치 둘리자매의 마음처럼 따스했다. 그들의 청에 못 이겨 우리는 번갈아 가며 마테차를 연거푸 몇 잔을 마셨다. 차를 번갈아 마시고 나니 그들과 금방 더 친숙해진 느낌이 들었다. 차 한 잔의 선율이 이렇게 친한 친구처럼 사람의 마음을 가깝게 이어주고 있었다.


"미스터 초이의 여행은 어떻게 되지요?"

“네, 우린 북유럽에서 러시아를 거쳐서 남미까지 갈 예정이랍니다.”

“와우, 아주 긴 여정이군요. 우리는 북유럽을 3개월간 여행할 예정이랍니다.”

“짧지 않은 여정이네요.”

“미스터 초이,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에리스에 오거들랑 꼭 연락하세요.”

“아마 12월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할 것 같은데, 도착하면 꼭 연락드리지요.”


동생 둘리가 주소와 연락처까지 적어주었다. 너무 고맙고 멋진 둘리자매. 이번 여행길에 만난 우리들의 첫 은인들이었다. 아내와 나는 그들을 ‘에인절 할머니’라고 부르기로 했다. 나이를 잊고 배낭여행을 다니는 그들을 보니 우리는 아직도 젊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구 반대편에 살고 있는 둘리 자매는 우리와 전생에 무슨 인연이 있었을까? 두 분에게 신의 축복이 내리길 기원하며 그들과 헤어졌다.     


덴마크는 어쩐지 장난감 같은 나라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아마 내가 어릴 적에 읽었던 안데르센 동화 때문이리라. 코펜하겐은 시가지가 의외로 작다. 아침을 먹으며 시내 지도를 보니 산책을 하기에 딱 알맞은 거리다. 우리는 중앙역에서 내려 인어공주 동상이 있는 곳까지 천천히 걸어가기로 했다. 중앙역에는 여전히 담배를 피워 물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연가기 자욱했다. 다시 미찌꼬의 말이 생각났다. 


“정말 담배를 많이 피우는군요.”

“덴마크의 여왕도 끽연 가라고 하던데 정말 열심히들 피어대고 있군.”


담배연기가 자욱한 중앙역을 나오니 티볼리 파크가 보였다. 코펜하겐에 오면 티볼리 공원을 찾아가라는 말이 있다. 티볼리 파크는 세계 최초의 테마파크다. 각종 놀이기구는 물론 넓고 푸른 공원에는 오락장과 고적대, 댄스홀과 맥줏집, 야외 오픈 무대, 포장마차와 멋진 레스토랑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이 고전적인 놀이공원을 최고로 즐기는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덴마크 인들이다. 티볼리 공원은 어린이뿐만 아니라 덴마크 남녀노소가 모두 즐겨 찾는 국민의 놀이터 역할을 하고 있다.


“용감한 바이킹의 후손들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놀이에만 열중하는 사람들만 남은 것 같군요.”

“글쎄. 세상이 그렇게 변해가는 것 아닐까?”


한 때 덴마크는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거느리기도 했으며, 스웨덴을 통합하고 노르웨이까지 합병을 하여 스칸디나비아 전체를 통치했던 대제국을 구가했던 나라다. 티볼리 공원을 나와 시청사 앞에 이르니 안데르센 동상이 티볼리 공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데르센 동상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갑자기 어린 시절이 생각나 가슴이 뭉클해졌다. 


“당신이 그렇게도 좋아했던 안데르센 아저씨를 드디어 만났군요.”

“오, 나의 안데르센 아저씨!”


비록 동상이지만 안데르센을 만나게 되니 실제 인물을 만난 것처럼 감회가 컸다. 해방 후와 6.25전 혼란한 시기에 가난한 농부의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나는 이 세상에 나오지 말았어야 할 미운 오리 새끼 같은 존재였다. 내가 태어난 후 6개월이 되던 날 아버님은 급환으로 돌아가셨다. 그래서 어머님 혼자 어린 6남매를 키워야 했다. 그때 큰 형님이 14살, 둘째 형님 12살, 그리고 10살, 6살, 2살의 어린 형들… 그중에서도 갓난아기로 태어난 나는 우리 어머니에게 가장 힘든 멍에를 지게 했던 골치 덩어리였다. 농사를 짓고 집안일을 꾸려 나가기도 힘든데, 허구한 날 젖을 달라고 울어대는 내 존재는 정말 귀찮은 미운 오리 새끼일 수밖에 없었다.


▲안데르센 동상


어머니는 막내인 내가 열한 살이 되도록 학교에 보낼 생각을 하지 않으셨다. 농사일이 바쁜데 학교는 가서 뭘 하느냐는 것이다. 그런데다가 큰 형님이 장가를 가서 첫 아이를 낳았는데, 집안에 잔심부름도 하고 아이보개를 하라는 것. 나는 집에서 어린 조카아이를 보다가 젖을 먹을 때가 되면 아이를 업고 밭에서 일을 하는 형수님께 가서 젖을 먹이는 일을 해야 했다. 


형들이 모두 학교에 가고 나면 집안일을 도맡아 하고 논밭으로 술참을 가지고 가는 심부름을 모두 내가 했다. 그렇게 집안에 갇혀 살던 나는 견딜 수가 없도록 학교에 가고 싶었다. 열한 살이 되던 봄, 나는 어머니 치맛자락을 잡고 학교에 보내달라고 졸라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막무가내였다. 농사일을 배워야지 학교에 가서 무얼 배우냐는 것이었다. 나는 매일 어머니 치마를 붙들고 사정을 했지만 어머님은 내 청을 들어주지 않으셨다. 


궁리 끝에 나는 작전을 좀 바꾸기로 했다. 나는 학교에 보내줄 때까지 밥을 먹지 않고 단식투쟁을 하기로 했다. 그러나 어머님은 "밥을 안 먹으면 너만 손해지." 하시며 끄떡도 하지 않으셨다. 정말 배가 고파서 견딜 수가 없는데도 나는 밥을 먹지 않았다. 그러다가 나는 그만 앓아눕고 말았다. 어머님은 눈이 십리나 들어 가 있는 나를 보더니 마침내 항복을 하시고 학교에 보내줄 테니 제발 밥을 먹으라고 하셨다. 그렇게 해서 나는 열한 살에 초등학교를 들어갈 수 있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 내가 우연히도 가장 먼저 읽었던 동화가 바로 이 ‘미운 오리 새끼’였다. 한국의 ‘미운 오리 새끼’가 안데르센의 ‘미운 오리 새끼’ 동화를 읽은 샘이었다. 안데르센의 ‘미운 오리 새끼’는 나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그 주인공 오리가 어쩌면 나하고 똑같은 신세이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도 언젠가는 백조처럼 훨훨 날아서 넓은 세상으로 가고 말 거야” 


그 동화를 읽은 후 나는 늘 입버릇처럼 중얼거리며 백조가 되는 꿈을 꾸었다. 안데르센 동화는 어린 나에게 꿈의 날개를 달아주었고, 그 꿈은 늘 나의 잠재의식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미운 오리 새끼’를 읽은 지 50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에야 마침내 나는 백조처럼 날아와 안데르센을 만나고 있었다. 얼마나 감개가 무량하겠는가! 꿈은 노력하는 자에게 이루어진다!


나는 왼손에 지팡이를 들고, 오른손에는 동화책을 들고 앉아있는 안데르센 아저씨에게 마치 어린아이처럼 안겼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만졌던지 발등은 물론 손이 닿는 무릎 언저리는 반질반질했다. 


“호호, 그러고 있으니 꼭 미운 오리 새끼 같군요.”

“그래, 난 아직도 미운 오리 새끼 라오.”

“전 인어공주가 더 좋은 걸요.”

“미운 오리 새끼보다는 왕자가 더 좋다 이거지요?”

“호호, 그래요. 미운 오리 새끼보다는 멋진 왕자가 훨씬 근사하지 않을까요?”

“하하, 그럼 이곳에서 왕자를 한번 찾아보시지?”


보행자들의 천국인 스트로이어트 거리는 덴마크에서 가장 화려한 쇼핑가이다. ‘스트로이어트’는 덴마크어로 ‘걷는다’는 의미이다. 시청 앞 광장과 콩겐스뉘토르 사이를 연결하는 다섯 개의 도로는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보행자 천국이다. 


내가 가장 잘하는 것 중의 하나는 걷는 것이다. 6년 동안 하루에 매일 12km를 걸어 다니며 기차 통학을 했던 나는 걷는 데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시골 우리 집에서 임성리역이라는 기차역까지는 3km이 거리다. 기차를 타고 목포역에 도착을 하면 학교까지 또 3km를 걸어가야 했다. 그 덕분에 어떤 여행지를 가던지 걸을 수 있는 환경이라면 굳이 차를 타지 않고 걸어 다닌다.


보행자 거리엔 팬파이프를 연주하는 남미의 악사에서부터 판토마 연기자, 기타 연주자 등 갖가지 악사들이 묘기를 부리고 있었다. 젊은 미녀 주부들은 유모차를 굴리며 이 가게 저 가게를 기웃거리며 쇼핑을 하고 있었다. 유모차 안에 앉아 있는 아기들은 모형 젖꼭지를 빨고 있거나 소리 나는 인형을 들고 있었다. 유모차를 끌고 다니며 쇼핑을 하는 주부들의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다. 그 모습이 마치 동화 속의 한 장면처럼 보였다.

 

▲버스 안 유모차에서 편안하게 우유를 막고 있는 아기


코펜하겐은 모든 시설이 보행자 위주로 편하게 되어 있다. 도로에는 계단이나 육교가 없다. 지하도도 없다. 버스 문턱은 유모차를 밀고 바로 들어가게끔 보도와 수평으로 설계되어 있다. 또한 버스에는 유모차를 싣는 전용공간이 따로 있다. 도시 전체가 노약자나 장애인들도 걷기에 불편이 없도록 설계되어 있다. 보행자는 어떤 거리에서나 우선적으로 안전하게 보호를 받으며 걸을 수 있다. 주부들은 집에서부터 유모차를 끌고 나와 버스를 타고 약속 장소로 가거나 쇼핑을 한다. 그러니 굳이 차를 몰고 다닐 필요가 없다. 조금 먼 거리는 자전거를 타고 간다.


지척에 있는 마트를 가더라도 자동차를 타고 가는 우리나라 풍경하고는 퍽 대조적인 모습이다. 걷는 것이야 말로 공해를 몰아내고 심신의 건강을 지키는 최고의 명약이다. 우리나라도 인사동이나 명동, 대학로 등 전통문화의 거리에서부터 자동차의 출입을 억제하고 보행자 거리를 늘려가는 것이 어떨까? 시장이나 백화점은 자전거를 타고 가고, 주부들이 마트를 가거나 친구를 만나러 갈 때에도 유모차를 끌고 가는 코펜하겐의 여유로운 거리의 풍경은 마음을 풍요롭게 해 준다. 걷기에 편하도록 여러 가지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선 걷는 낭만과 습관을 가질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안데르센도 생시에 이 보행자 거리를 따라 ‘뉘하운 항구’까지 자주 산책을 했다. 그는 방값을 내지 못해 한 때 뉘하운거리를 전전하면서 동화를 썼다고 한다. 항구로 들어서니 소박한 선술집과 카페들이 줄지어 들어서 있었다. 안데르센은 아마게르토르 거리를 걷다가 곤경에 빠져있을 때에는 니콜라이 교회의 첨탑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달랬다.


▲뉘하운 부두에 정박해 있는 유람선


‘ㄷ’ 자형으로 굴곡이 져 들어온 뉘하운의 부두에는 돛대를 길게 단 작은 어선들이 정박을 하고 있었다. 운하 주변에는 그림처럼 색깔이 예쁜 낮은 옛집들이 아기자기하게 들어서 있었다. 사람들이 운하의 난간에 아무렇게나 기대앉아 칼스버그 맥주를 마시거나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웃통을 벗은 채 문신을 드러내 놓고 맥주를 마시는 사람도 보였다. 금발의 미녀들이 옥외 테이블에 낮아 햇빛을 즐기며 재잘거리고 있었다. 아직도 다소 방탕한 항구의 흔적이 남아 있는 자유스러운 곳이다. 


에스프레소의 진한 향기가 코를 찔렀다. 나는 다리도 쉴 겸 포장마차처럼 생긴 선술집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는 맥주는 물론 커피도 팔았다. 하얀 거품이 반쯤 덮여있는 뜨거운 에스프레소를 들고 운하의 난간 근처에 있는 옥외 테이블에 기대앉았다. 아내가 배낭에서 빵을 꺼냈다. 우리는 점심으로 뜨거운 에스프레소에 빵을 뜯어먹으며 정겨운 항구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가난한 안데르센도 여기 선술집에 앉아 술을 한 잔씩 마셨겠지?”

“당신은 안데르센이 그리도 좋은가 보죠? 그렇게 앉아있으니 당신의 그 깡마른 모습이 안데르센 아저씨하고 좀 닮은 것 같기도 하군요. 호호.”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닮아간다고 하잖소.”


어디선가 갈매기 한 쌍이 날아오더니 우리들을 슬금슬금 쳐다보았다. 먹던 빵을 조금 떼어서 던져주었더니 이를 잽싸게 낚아챈 갈매기 부부는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이제 슬슬 인어공주를 만나러 가실까요?”

“당근이지요! 나의 인어공주님.”



앗, 살아 있는 인어공주다!


해변을 따라 인어공주가 있는 방향으로 걷고 있는데 피리와 드럼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소리의 진원지를 따라 가보니 아말리엔보르 궁전에서 때마침 위병 교대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유럽의 궁전에서는 거의 대부분 정오에 전통복장을 한 위병 교대식이 진행된다. 


▲왕궁 앞의 위병교대식. 마치 안데르센 동화 장난감 병정 같다


아말리엔보르 궁전의 위병 교대식은 꼭 장난감 병정놀이를 방불케 했다. 털이 부숭부숭한 곰털모자를 쓴 위병들의 행진은 위엄보다는 우스꽝스럽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궁전도 화려하지가 않고 그저 평범한 건물이다. 18세기 말 크리스티안보르 왕궁에 화재가 발생하자 네 명의 귀족이 살던 건물을 왕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궁전 느낌보다는 큰 저택으로만 보였다. 낡은 상자처럼 보이는 건물에서 20~30명의 병정들이 쏟아져 나오는 모습은 정말이지 꼭 장난감 병정을 방불케 했다.


위병들의 뒤를 따라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는 관광객들도 왠지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어떤 꼬마 아이는 병정들을 따라가며 계속 외발로 깡충깡충 뛰며 장난감 병정 흉내를 냈다. 그 모습을 보니 안데르센의 ‘장난감 병정’이란 동화를 연상케 했다. 관광객들도 그 아이의 모습을 보고 모두 까르르 웃었다. 곰털모자를 쓴 병정들 중에서도 웃음을 참는 모습이 보였다. 저렇게 유약하게 보이는 군대를 앞세우고 어떻게 한 때 스칸디나비아 제국을 호령하는 열강이 되었을까? 


2차 대전이 일어났을 때 히틀러의 탱크가 어둠을 뚫고 국경을 넘어 덴마크로 진주했다. 그리고 새벽녘에 덴마크를 접수했다. 전쟁은 단 하루도 지속되지 않았다. 시민들은 저녁 무렵에 다시 선술집과 음식점으로 돌아가 술과 음식을 먹었다. 덴마크는 그런 나라였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전쟁이 끝났던 것이다.


“병정들의 모습이 너무 우스꽝스러워요.”

“아마 저런 병정들의 모습을 보고 안데르센이 ‘장난감 병정’이란 동화를 쓰지 않았을까?”


안데르센 동화는 슬프지만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코펜하겐은 그렇게 편안한 도시였다. 사람들이 점심시간에 나와 공원의 벤치나 잔디에 누워 일광욕을 했다. 위압감을 주는 높은 건물도 없고 총칼을 들고 말을 탄, 위협적인 동상도 별로 눈에 띠지 않는다. 동화책을 든 안데르센 아저씨와, 인어공주 동상이 해변에 앉아 손님을 반기는 동화 같은 도시. 코펜하겐은 나그네에게 그렇게 편안하게 다가왔다.


건축물은 낮고 낡아 보인다. 코펜하겐에서는 좀처럼 건물을 마음대로 철거할 수 없다고 한다. 아주 낡아서 수선을 필요로 할 때에도 내부는 수리할 수 있으나 외관은 옛 모습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 부득이 건물을 새로 지을 때에도 주변 건물과 조화를 고려해야 한다. 


덴마크 사람들은 아주 바보스러울 만큼 법을 우직하게 잘 지킨다. 절도범 뉴스 살인사건에 대한 뉴스는 거의 들어볼 수가 없단다. 치안상태가 너무 좋아서 마르그레테 여왕도 아말리엔보르 궁에서 스토뢰이어트 상점가까지 시민들과 함께 매일 아침 걸어가 꽃과 야채를 산다고 한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마르그레테 여왕이 줄담배를 피운 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하루에 담배를 줄잡아 3갑 가량을 너끈히 피운다는데, 그것도 필터가 없는 그리스 산 담배를 좋아하다는 것. 담배를 피우는 동안 시종은 늘 재떨이를 들고 쫓아다녀야 할 정도여서 '재떨이의 여왕'이라는 칭호까지 붙게 되었다고 한다. 히야, 그래서 덴마크 사람들이 담배를 그렇게 피워대는 것이로구나.      

 

▲인어공주 동상이 사라진 바위에서 요염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살아있는 인어공주


인어공주 동상이 있는 곳에 도착한 우리는 그만 아연실색을 하고 말았다. 있어야 할 인어공주는 없고 텅 빈 바위만 떨렁 남아 있었다. 


"아니, 도대체 인어공주는 어디로 가고 없지요?"

"거품이 되어 바닷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나 봐."

"아유, 그런 억지 말이 어디 있어요?"


겨우 80cm 밖에 되지 않는 작은 인어공주를 보려고 온 사람들 모두가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인어공주 동상이 설치되었던 바위 앞에 작은 안내간판이 하나 세워져 있었다. 누군가가 인어공주를 파괴하여 바닷속에 빠뜨렸다는 것. 다행히 바닷속에 가라앉은 인어공주는 경찰에 발견되었고 크레인으로 건져내 원상회복 수리 중에 있어 조만간 재설치를 한다는 내용이 게재되어 있었다. 


▲인어공주 동상이 파괴되었다는 안내문

범죄율이 가장 적은 나라에서 어찌 이런 일이 발생할까? 인어공주에 대한 발칙한 테러 행위는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다. 어떤 때는 목이 잘려나가기도 했고, 팔이 떨어져 나가기도 했으며, 페인트를 여섯 번이나 뒤집어쓰기도 했다. 이렇게 수난을 당하기 때문에 인어공주는 더욱 사랑을 받는 것일까? 


외관으로 보기엔 인어공주는 볼품이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코펜하겐의 ‘인어공주’를 브뤼셀의 ‘오줌싸개’, 독일 라인 강에 있는 ‘로렐라이 언덕’과 함께 유럽의 3대 ‘썰렁 명소’로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도 해마다 1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이곳을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들은 인어공주를 외관의 규모나 풍경을 보기 위해서 오는 것은 아니다. 어린 시절 읽었던 안데르센 동화에 얽힌 애틋한 사연을 상상하면서 인어공주에 대한 어떤 향수에 젖어 찾아온다. 그러나 인어공주 이야기는 너무도 슬프다. 


“엇, 저기 살아있는 인어공주가 있네요!”

“어머, 정말이네요!”


인어공주를 볼 수 없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는지 어떤 여행자 아가씨 한 사람이 인어공주를 설치 해 놓은 바위 위로 올라가더니 인어공주와 똑같은 포즈를 취했다. 긴 머리에 날씬한 몸매가 정말 인어공주처럼 예뻤다. 사람들은 모두 이 살아있는 인어공주를 향해 카메라 세례를 퍼부었다. 


“아이고, 이번에는 왕자님이 출현하셨네!”


그 아가씨가 바위에서 내려오자 이번에는 한 청년이 인어공주의 바위로 올라가 요염한 포즈를 흉내 냈다.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그만 폭소를 자아내고 말았다. 


“자, 기회는 단 한번, 당신도 저 바위에 올라가 인어공주가 되어 보실까?”    

“아이고, 아서요 아서.”

“엄지공주님, 죽어있는 인어공주보다 살아 숨 쉬는 저 인어공주가 더 멋있고 생동감이 있지 않습니까?”
“호호호, 정말 너무 재미있군요.”


많은 사람들이 살아 있는 인어공주를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하늘에 회색 구름이 잔뜩 끼더니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비를 맞으며 우리는 다시 중앙역으로 돌아왔다. 비록 비를 흠뻑 맞아 옷이 다 젖었지만, 아울 러 안데르센의 동화 속에 흠뻑 젖어서 흥미로운 하루를 보낸 날이었다. 


중앙역에서 아내와 나는 다음 여정지에 대한 이견으로 티격태격 말다툼을 했다. 나는 안데르센 탄생지인 오덴세를 방문한 후 유틀란트 반도를 거슬러 올라가 배를 타고 베르겐으로 가자는 것이었고, 아내는 코펜하겐에서 바로 기차를 타고 그냥 베르겐으로 가자는 의견이었다. 


결국 나는 아내에게 져주고 말았지만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아쉬운 구석이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다. 한 번 지나쳐 온 여행지를 다시 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일생 동안 다시 가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아내를 위한 여행길이 아닌가? 


오덴세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베르겐행 기차표 좌석을 예약하러 갔더니 좌석 예약비를 148 크로네(약 29,000원)나 달라고 했다. 스칸 레일 패스를 사용하는 첫 기차였다. 북유럽의 기차는 만원이다. 좌석을 예약하지 않으면 서서 가는 수고를 감수해야 한다는 여행자들의 충고를 따라 나는 예약비를 주고 좌석을 예약했다. 기차표를 예약하고 아마게르 호스텔로 돌아와 저녁을 준비하기 위해 냉장고에 넣어둔 음식을 꺼내러 갔던 아내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여보, 냉장고에 우리 음식이 하나도 없어요.”

“설마….”

“같이 가 봐요. 한국에서 가져온 김, 인삼김치, 네덜란드에서 사 온 치즈도 몽땅 없어졌어요.”


아내와 함께 냉장고에 가보니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냉장고 문을 살펴보니 ‘목요일 12시까지 냉장고 음식물을 청소합니다. 치우지 않는 음식물은 버립니다.’ 이런 문구가 작은 글씨로 붙어 있었다. 냉장고에 부식된 음식물이 방치되는 것을 막기 위해 목요일이면 음식물 청소를 한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는 것을 보지 못한 것이다. 호스텔 종업원에게 물어보았더니 이미 쓰레기장에 버려졌다고 했다.


“아이고, 아까워라. 이 일을 어쩌지요?”

“당신 약을 넣어 두지 않는 게 천만다행이야.”


아찔했다. 만약의 아내의 인슐린과 약을 냉장고에 넣어 두었더라면 여행을 중단해야 하는 긴급 사태까지 일어날 뻔했다. 다음부터는 여행지나 냉장고의 안내문을 빠짐없이 읽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냉장고의 문을 붙잡고 울상을 짓고 있는 아내의 표정은 꼭 ‘성냥팔이 소녀’처럼 보였다. 


‘…소녀는 새로운 성냥을 켰습니다. 갑자기 눈앞에 맛있는 음식이 놓인 식탁이 나타났어요. 또 성냥불을 켜자 이번에는 크리스마스트리가 나타났어요.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크리스마스트리에 손을 댔어요. 그랬더니 그 순간 타고 있던 성냥불이 갑자기 꺼져 버렸어요!….’ 


성냥팔이 소녀의 한 구절이다. 따뜻한 빵에 맛있는 암스테르담의 풍차마을에서 사 온 치즈를 발라먹으려고 잔뜩 기대를 했던 아내는 냉장고의 문을 열자 성냥불이 꺼져 버리고 음식이 사라져 버린 것처럼 허무했던 모양이었다. 


“여보, 얼어 죽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생각을 하자고요.”

“그래도 그렇지. 고소한 김, 새콤한 김치, 그리고 풍차마을에서 사 온 치즈… 아유, 생각할수록 분통이 터져요.”


유럽의 방은 작고 춥다. 더욱이나 유스호스텔의 방은 더 춥다. 카페나 술집은 따뜻하다 못해 덥다. 그래서인지 유럽인들은 대부분 카페나 밖에서 에스프레소나 맥주를 한잔 시켜 놓고 실컷 노닥거리다가 밤늦게 숙소로 돌아온다. 젠장, 오늘따라 아마게르 호스텔의 방은 어제보다 더 추었다. 나는 냉장고 사건 때문에 못내 애석해하는 아내를 부둥켜안고 잠을 청했다. 오, 나의 불쌍한 성냥팔이 아내여! 그만 내 품에서 고이 잠드소서.


♣보행자들의 천국 코펜하겐-걷는 것이 명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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