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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라 Jan 09. 2019

1km 걷을 때마다
1,000원을 기부하는 사람들

평화누리길 1코스 14km를 걸으며 네팔어린이 희망장학금후원 

새해 평화누리길 189km 완주를 다짐하며...

▲1km 걸을 때마다 1,000원의 기부금을 후원하는 사람들(평화누리길 1코스 대명항)

2019년 1월 5일(토) 아침 6시, 경기도 평화누리길 1코스인 '염화강철책길'을 걷기 위해서 집을 나섰습니다. 출발을 하기 전에 남양주시 도농역 인근 전주콩나물국밥집에서 아침 요기를 하기 위해 들렀는데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이른 새벽에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거의가 노동복 차림을 한 사람들이 일을 하러 나가기 전에 한 그릇에 5천 원 하는 콩나물국밥으로 아침을 때우고 일터로 나가고 있었습니다. 열심히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니 이런 사람들 때문에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 틈에 끼어 콩나물국밥 한 그릇을 맛있게 먹고 서울시청 앞으로 출발했습니다. 어젯밤까지 평화누리길 걷기를 따라나서겠다고 기염을 토하던 아내가 기침을 하고 감기 끼가 있어 극구 만류를 하고 나 홀로 나섰습니다. 폐렴으로 두 번이나 중환자실에 입원한 전력이 있는 아내가 찬바람을 쏘여 다시 폐렴에 걸리면 큰 일이기 때문입니다.      


혼자 나서면서 아침 일찍 밥을 해 달라고 부산을 떨게 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아침을 굶고 가기에는 평화누리길 14km를 걷는 것 또한 무리일 것 같아 생각 끝에 나는 집에서 조금 일직 나서서 콩나물국밥을 먹고 가기로 했습니다. 뜨거운 국물을 먹고 나니 속도 든든하고 마음도 한결 훈훈해집니다.     

 

8시에 만나기로 했던 시청역 3번 출구에 도착을 하니 길이 막히지 않아 30분 전에 도착을 한 탓인지 아직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30분 전 도착, 너무 빨리 와서 한 바퀴 돌고 오겠습니다.” 차를 오래 세워둘 수 없어 단체 카톡 방에 메모를 남기고 광화문을 한 바퀴 돌 양으로 서소문으로 막 방향을 트는 데 김한중 회장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여기 3번 출구인데 아무도 없네요." 그는 오늘 평화누리길 걷기에 합류하기 위해 멀리 천안에서 오신 칠십 중반을 넘어선 할베입니다. 가장 먼 데서 출발한 분이 가장 일직 도착을 했네요. 그는 밤잠을 설치고 천안에서 새벽기차를 왔다고 합니다. 광화문을 돌아오는 동안 잠시 기다리라고 응답을 하는데 연달아 “까꿍 까꿍”하며 카톡이 울립니다. 안양에서 오신 민들레 시인님, 광명시에 오신 무공거사, 심선생님, 무량수 보살님, 박성하 박사님 등이 차례로 도착을 했다는 메시지입니다. 


     

광화문을 돌아 다시 시청역 3번 출구에 도착하여 일행들을 만났습니다. 오늘 차량봉사를 하도록 되어 있는 김병용 사장이 곧 도착을 한다고 하여 나는 일행 네 분을 태우고 먼저 출발을 했습니다. 나머지 분들은 김병용 사장이 7인승 RV 차량에 태우고 오기로 했습니다. 마포대로를 달려 강변북로를 달려가는데 김병용 사장으로부터 참가자 전원을 태우고 곧 뒤 따라 출발을 했다는 전화가 왔습니다.  

    

오늘 참가자는 서울식품 김병용 대표를 비롯하여, 정애자, 심명자 선생님, 김한중 회장님(우리골프백회점 대표), 무공거사, 민들레 시인, 김세범(한국실명예방재단 사무총장:www.kfpb.org),  박성하 선생님, 무량수(원전 커머스 호수대리점대표), 그리고 케이피 시토울라(네팔관광청한국사무소장, 옴레스토랑 대표: http://www.omfood.kr), 찰라 이렇게 11명이 참가를 했습니다. 

     

참가자들의 연령대를 살펴보니 70대 이상 4명, 60대 3명, 50대 3명, 40대 1명으로 최고령자는 77세, 최연소자는 40대 후반인 네팔에서 온 케이피 시토울라 씨가 가장 젊군요. 참가자들은 모두 여행길에서 만난 인연으로 가끔 함께 여행을 다니고 있습니다. 가장 최근 여행은 작년 7월에 케냐에서 희망봉까지 아프리카 종단 배낭여행을 한 달간 다녀왔습니다.      


아프리카 희망봉을 다녀온 뒤 단체 카톡방을 ‘희망봉여행자클럽’이라는 타이틀로 명명했습니다. 참가자들 일부는 네팔 어린이들에게 희망장학금을 전달하는 한국자비공덕회(www.kjb.or.kr)라는 봉사단체에서 봉사를 하고 있기도 합니다. <여행>과 <봉사>는 둘 다 행복을 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어서 일행들을 만날 때마다 반갑고 즐겁습니다. 특히 새해를 맞이하여 평화누리길 189km 완주에 도전하기 위해 모두가 수학여행을 떠나는 소년 소녀들처럼 밤잠을 설치며 모인 일행들의 열기가 뜨겁게 달아올라 새벽 추위를 녹여주고 있습니다.    

 

여명의 어둠을 뚫고 한강을 건너 올림픽대로를 따라 달리는데 점점 날씨가 환하게 밝아왔습니다. 한강변에는 얼음 덩어리들이 둥둥 떠다니고, 기러기들이 끼룩끼룩 울며 하늘을 날아갑니다. 눈 덮인 북한산이 한강 너머로 신기루처럼 아름답게 보입니다. 출발하기 전 김포시 대명항 일기예보를 살펴보니 아침 최저 영하 6도, 낮 기온 0도 전후, 풍속 9m, 미세먼지 오전 10시부터 보통으로 되어 있군요.     


 

토요일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길이 전혀 막히지 않아 우리는 9시 정각 대명항 함상공원에 도착했습니다. 하늘은 푸르고 쾌청하여 미세먼지 걱정도 뚝, 강바람이 칼바람처럼 차갑기는 하지만 날씨가 기가 막히게 받쳐주어 참가자 모두 산뜻한 기분으로 출발선에 섰습니다. 

      

먼 길을 걷기 위해서는 출발하기 전에 화장실을 반드시 들려야 하는데 화장실이 주차장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어 모두를 다시 승용차에 태우고 단체로 화장실을 다녀오는 해프닝이 연출되기도 했습니다. 출발선에 모여 단체로 기념촬영을 하는데 고양이 한 마리가 슬금슬금 다가와 합류하여 우리들의 출발을 축하해주는군요. ㅎㅎㅎ 귀요미 고양이 안녕!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평화누리길 지도, 패스포트, 리본 등을 지난 12월 23일 날 신청을 하였는데, 연휴가 끼어서인지 오늘 아침 집에서 출발을 한 뒤 9시경에 도착했다는 아내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출발점에서 참가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싶었는데… 허지만 다음 코스를 걸을 때 사용을 할 수 있으니 괜찮습니다. 지도를 보내주신 경기도 관광공사 측에 감사드리며, 앞으로 평화누리길을 걷는데 보내주신 지도와 리본 등을 잘 사용하겠습니다.


     

이번 평화누리길 걷기는 서울식품 김병용 사장의 제안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네팔 어린이들을 조금이나마 돕고자 2017년부터 1km 걸을 때마다 1,000원씩 후원금을 기부하며 국토대장정 길에 오르고 있습니다. 2017년도에 그는 동해안 해파랑길 770km를 걸으며 1km 걸을 때마다 1000원의 후원금을 네팔어린이 희망장학금으로 기부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어려운 이웃을 도우며 국토대장정에 나선 김병용 사장의 뜻에 감명을 받은 희망봉여행자클럽 회원들도 이번 평화누리길 걷기에 함께 동참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해파랑길을 한 번쯤 함께 걷고 싶었지만 거리와 시간상 서로 맞지 않아 동참을 못했는데, 평화누리길은 서울경기지역에서 접근을 하기가 용이해서 가급적 모두 함께 참여를 하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출발선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후, 노약자를 위해 14km 완주팀(A팀)과 순환코스팀(B팀)으로 분류하여 자신에 체력에 맡게 부담 없이 걷도록 팀을 나누었습니다. 참가자들의 희망을 받아보니 완주팀은 6명(주로 남성), 순환코스 팀 5명(70세 이상 여성과 노약자)으로 나누어졌습니다. 그렇게 하고 나니 걷기 속도도 자연스럽게 조절이 되고 걷는데 부담이 없어져 서로가 기분 좋게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노약자 팀은 찰라가 인솔을 하고 순환코스를 돌고 난 후,  찰라가 완주팀을 문수산성을 가서 차량봉사를 하여 함께 합류하여 점심을 하기로 했습니다. 일행들은 출발점에서 평화누리길 패스포트에 스탬프를 쾅쾅 찍고, 모두가 기분이 상기되어 상큼하게 출발하였습니다. 스탬프를 찍는 일이 신기한 듯 멋진 포즈를 취하는군요^^*    

 

민족의 아픔이 서린 염하강철책길     


본격적으로 염화강철책길에 들어서니 염하강 변에 키를 훌쩍 넘기는 철책선이 살벌하게 장벽을 이루고 있어 일행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가 철책선의 가시처럼 가로놓여 있어 어쩐지 슬픈 마음이 들고 가슴이 절절히 아파 옵니다. 염하강이라는 강이 있다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강화도를 건너 다닐 때는 그냥 좁은 해협으로만 알았는데 폭이 좁아 마치 강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특히 네팔에서 온 케이피 시토울라 씨는 평화스럽기 만한 강변에 높은 장벽처럼 길고 거대하게 둘러쳐져 있는 철책선을 바라보며 이상하고 신기한 듯 만져보기도 하고 철책선 구멍 사이로 강을 바라보기도 합니다. 네팔에는 8000m급 히말라야 설산이 장엄하고 아름답게 세계의 지붕을 이루고 있는데, 우리나라엔 아름다운 강가에 가시 돋친 철책선이 가로막혀 있으니 이상하게 보일 수밖에 없겠지요.    


  

하루빨리 철책선을 말끔히 거두어 내고 이 땅에 영원히 전쟁 위험이 없는 평화가 왔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인간이 쳐놓은 철책 장벽은 가소롭기 짝이 없습니다. 이데올로기가 다르다는 이유로, 위정자들의 욕심을 위하여, 아름다운 국토를 철책으로 가리다니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허지만 인간이 마음을 조금만 내려놓으면 장벽은 쉽게 허물어질 수도 있겠지요.      


오래전 베를린 장벽을 여행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30년 동안 철통같이 동과 서를 가르던 베를린 장벽도 하루아침에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렇게 단단하게 냉전시대를 대표하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직접적인 배경을 살펴보니 너무도 황당한 내용이었습니다. 그 당시 베를린 장벽에서 썼던 여행기를 잠사 살펴보겠습니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날, 동독 공산당 정치국원인 ‘권터 샤보브스키’의 긴급 기자회견 실수로 체크 포인트 찰리(동서독을 왕래하는 유엔군 검문소)가 시간대를 앞당겨 열렸던 해프닝 기사를 보면 동독인들이 얼마나 자유를 갈구했으며, 그 당시의 긴박한 사태를 엿볼 수 있다. 우리도 남북이 통일이 되어 휴전선이 무너지는 날 이런 해프닝이 일어날 수 있을까?  

    

11월 9일 저녁 7시. 동독 공산당(SED) 정치국원이자 선전 담당 비서인 귄터 샤보브스키의 긴급 기자회견을 방송을 통해 듣고 있던 동독 국민들은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지금 이 순간부터 동독 국민들은 모든 국경을 넘어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귀를 의심했다. 이게 정말인가. '모든 국경을 넘어'라면 서독으로의 여행도 포함된다는 말이 아닌가. 더구나 '지금 이 순간부터'라니…. 시민들은 '체크 포인트 찰리'를 비롯해서 베를린으로 통하는 검문소로 밀물처럼 모여들기 시작했다. "장벽을 열어라." 시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외쳤다. 초소 경비병들은 우왕좌왕했다. 상부로부터 아무 지시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문을 열 것인가, 발포할 것인가. 흥분과 긴장이 팽팽히 교차했다      

같은 시각, 서독도 흥분의 도가니였다. 본의 연방하원에서는 여야 의원들이 본회의 도중 동독의 국경 개방 소식이 전해지자 회의를 중단하고 독일 국가를 합창했다. 서베를린 시민들은 장벽으로 달려갔다. 베를린 장벽 검문소에서 경비병들과 대치하고 있던 동베를린 시민들은 힘으로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자칫 유혈 충돌이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경비대는 여전히 상부로부터 명백한 대응 조치를 지시받지 못하고 있었다. 나중에 알려진 일이지만 이날 샤보브스키가 국경 개방의 시점을 '지금부터'라고 발표한 것은 '실수'였다고 한다. 공산당 정치국은 이때까지 국경 개방에 대한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세를 되돌리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다. 장벽을 돌파하려는 시민들에게 발포한다면 그것은 곧 모두가 파국으로 치닫는 것이 너무나 명백해 보였기 때문이다.    

  

밤 10시쯤 마침내 동베를린 시민들은 검문소를 넘어가기 시작했다. 서쪽에서는 샴페인 폭죽이 이들을 맞았다. 환호와 눈물, 격렬한 포옹…. '베를린 장벽 붕괴'의 세기적 뉴스가 전 세계로 타전됐다.   

우리 남북한도 과연 이런 시대가 언제쯤은 올 수 있을까?  


철책선 밑에는 거대한 나팔과, 민들레 홀씨, 목말 타기 놀이 등 조형물이 심심치 않게 세워져  포토 존을 이루고 있습니다. 일행들은 멋진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기도 했습니다. 특히 민들레 시인님은 자신이 닉네임으로 사용하고 있는 민들레 홀씨가 세워져 있어 기분이 좋은 모양입니다. 민들레 시인님은 『오늘 아침의 당신은 내 눈에 아프네요』, 『흔들리는 섬을 위하여』, 『어쩔 수 없는 낭만』, 『클림트와 연애를』, 『어린 굴참나무에게』 등 많은 시집을 내며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한국시인협회 중견시인입니다.    

 


뱃사공 손돌의 슬픈 사연을 간직한 손돌묘     


완주팀과 순화코스팀은 점점 거리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덕포진을 지나 손돌묘에서 두 팀의 거리가 까맣게 멀어져 헤어졌습니다. 조선시대에 외세의 침입을 막는 마지막 방어선인 덕포진은 마치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가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강화해협 중에서도 가장 좁은 폭을 사이에 두고 소용돌이치는 물살을 ‘손돌목’이라 부르고 있군요.      



손돌목이라는 이름이 특이하여 안내판을 자세히 살펴보니 실로 어처구니없는 슬픈 해프닝이 일어나 있군요. 몽고군이 고려를 침입하여 도성으로 쳐들어오자 고려왕인 고종(高宗)이 강화도로 피난하면서 바다를 건너갈 배를 마련하지 못해 뱃사공 <손돌>의 작은 나룻배를 타게 되었다고 합니다. 물길이 좁아 앞이 보이지 않고 세찬 물살에 배가 심하게 요동치자, 겁에 질린 왕은 뱃사공이 자신을 죽이려는 줄 알고 손돌의 목을 베라고 명령하였답니다. 손돌이 이 지역의 물길이 험해서 그러한 것이라고 했지만 고종은 손돌의 애원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손돌은 체념하고 물 위에 작은 바가지를 띄우고 그 바가지를 따라가면 강화도에 무사히 도착할 것이라고 말한 뒤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흘러가는 바가지를 따라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한 왕은 자신이 경솔하였음을 깨닫고 뱃사공의 시신을 거두어 후하게 장사를 치른 뒤 사당을 세워 억울하게 죽은 손돌의 넋을 위로하였다고 합니다. 흑흑흑... 이럴 수가! 목숨 바쳐 자신을 살려준 뱃사공 손돌을 무고하게 죽이다니…     


손돌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사연이 덕포진 묘 앞 비석에 새겨져 있군요. 그런데 지금도 손돌의 생일인 음력 10월 20일 무렵에는 매서운 바람이 불어오는데 이를 손돌의 영혼이 실린 ‘손돌바람’이라 불린다고 합니다. 손돌의 무덤 앞에 서니 오늘도 매서운 바람이 불어와 그의 영혼을 만난 듯 가슴이 짜안~ 합니다.  사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도 손돌처럼 억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손돌의 무덤을 보면서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소용돌이치는 물살을 앞으로 두고 있는 덕포진 진지는 구한말 프랑스와 미국의 서양 군함을 맞아 병인양요(1866년)와 신미양요(1871년)의 격렬한 전투를 치른 역사의 현장입니다.  불과 150여 년 전, 수많은 병사의 목숨을 앗아간 아픔의 장소라고 하기에는 지금은 너무도 평화로운 모습입니다. 당시 지휘소였던 파수장터를 중심으로 수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어 덕포진 전시관에 전시되어 당시의 상황을 후세에 알려주고 있습니다.    


      

손돌묘에서 내려와 부래도 앞에 도착한 B팀은 잠시 숨을 고르며 가져온 음료수와 간식으로 휴식을 취했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부래도(浮來島)는 글자 그대로 염하강 위에 둥둥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군요. ‘신증동국여지승람’과 ‘통진읍지’ 기록에 의하면 부래도는 강화와 통진 사이를 흐르는 염하강을 따라 한강물에 떠내려왔다고 하여 부래도라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음력 그믐이라 썰물이 심해서인지 섬이 완전히 드러나 보이고 모세의 기적처럼 물이 갈라져 있어 걸어서 섬에 갈 수도 있겠군요.     



부래도에서 순환코스로 가는 길이 좀 헷갈리는군요. 동네 주민에게 물어보았더니 대명항으로 가려면 오던 길을 되돌아가라고 합니다. 부실한 인솔자의 잘못도 있지만… 우리는 오던 길을 되돌아오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우리 B팀은 마냥 즐겁기만 합니다. 우리는 덕포진 쉼터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A팀에 비해 여유를 부리며 망중한을 보냈습니다. 쉼터 의자가 아치 안쪽에도 하나 있었으면 겨울바람도 피하고, 여름 더위도 피하고 좋겠다는 민들레 시인님의 의견에 모두 동감을 했습니다.     

  

참가자 모두 1km 걸을 때마다 1000원 기부     


B팀과 함께 대명항 함상공원으로 되돌아오니 정각 12시, A팀에게 전화를 해보니 원머루 나루터를 걷고 있는 중인데 문수산성이 보인다고 하는군요. 과연 A팀의 걷는 속도가 빠르긴 합니다. 찰라는 B팀을 대명항에 남겨두고 차를 몰고 문수산성으로 출발했습니다. 

     

문수산성으로 가기 전에 풍물시장 옆 강화인삼센터로 가서 수삼 열 채를 샀습니다. 평화누리길을 걷기도 하고 필요한 만큼 아울러 지역 특산물도 구입을 하여 지역경제를 돕는 것도 좋겠지요. 수삼을 사들고 문수산성 남문에 도착하니 오후 1시 10분. 남문 밑 양지바른 곳에 앉아 간식을 먹으며 휴식을 취하고 있는 A팀을 만났습니다.      

문수산성은 조선 19대 숙종 20년(1694)에 바다로 들어오는 외적을 막고, 강화도 방어를 위해 쌓은 성이라고 하는군요. 성의 총길이는 6km로 성곽에 오르니 염하강과 어울려 주변 경관이 제법 수려하게 펼쳐져 있습니다. 정상에 오르면 북한 땅이 보이고한강 포구를 거쳐 서울의 삼각산과 멀리 인천 앞바다도 보인다고 하는데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습니다  


   

문수산성 남문 앞에서 A팀의 14km 완주돌파 기념사진을 촬영한 후다음 코스인 2코스 입구를 확인하고 대명항으로 향했습니다대명항 칼국수 집에 도착하니 오후 2. A, B팀이 합류하여 막걸리 잔을 높이 들고 최고령자이신 정애자 선생님의 덕담으로 건배를 했습니다.     


오늘 새해를 맞이하여 참으로 뜻깊은 평화누리길 걷기 행사를 가졌습니다오늘 참여하신 모든 분들의 건강과 행복그리고 이 땅에 영원한 평화가 깃들기를 기원하며 건배!”     

건배건배건배!”     


우리는 따끈한 칼국수로 몸을 데우며 오늘 걸었던 평화누리길 걷기 후일담을 각자 한 마디씩 주고받으며 화기애애하게 나누었습니다.   


  

우리가 언제 이런 길을 걸어보겠습니까염하강철책길이 어디에 있는 줄도 모르는데 오늘 민족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매우 뜻깊은 길을 걷게 되어 너무 영광입니다. 얼마든지 더 걸을 수도 있는 데 조금 아쉽군요(김한중 회장).”     


“나마스테! 네팔에서 온 저는 오늘 평화누리길 걷기가 평생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강가에 둘러쳐진 철책선이 너무나 인상이 깊었고전쟁으로 분단된 대한민국의 현실과 남과 북의 대립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더구나 오늘 걷기 행사는 저의 조국인 네팔의 가난한 어린이들을 위해 걸으면서 정성껏 희망장학금을 모아주는 행사여서 저로서는 더욱 감회가 큽니다앞으로 시간을 내어서 평화누리길 완주를 달성해 보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케이피 시토울라).”    

 


이렇게 인연을 만들기도만나기도 어려운 분들과 새해 첫나들이를 하게 되어서 정말로 기쁨이 큽니다앞으로 이런 기회가 자주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민들레 시인).”     


저는 손돌묘의 사연을 읽고 너무 슬펐어요자신을 살려준 뱃사공을 무고하게 참수를 하다니 우리 사회에도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나는 데 다시는 그런 억울한 죽음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심명자 선생님).”    

 

오늘 저로 인하여 이렇게 추운 날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그러나 함께 걷는다는 것은 참 좋은 것 같아요앞으로도 여러분과 함께 걸으며 남을 위해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일을 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겠습니다감사합니다(김병용 사장).”      


오늘 평화누리길 걷기에 첫 발을 내디딘 여러분은 모두 올해 안으로 모두 189km 완주를 하시리라 믿습니다여러분의 건강과 이 땅의 평화를 위해서 꼭 완주하시기를 바랍니다(찰라의 말).”     


칼국수로 점심을 맛있게 먹은 후일행 모두는 14km에 해당하는 14,000원의 성금을 자발적으로 네팔어린이 희망장학금을 위해 기부를 하였습니다일행은 대명항을 출발오후 5시에 옴레스토랑 마포점에 도착하여 케이피 시토울라 님이 베푸는 네팔 차 찌아를 한잔 마신 후 헤어졌습니다  


   

오늘 평화누리길 1코스 걷기 행사는 날씨도 멤버도 나무랄 데 없이 좋았습니다걷는다는 것은 참 좋은 것 같습니다더구나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함께 걸으며 작은 정성을 모아 남을 도우며 걷는 보람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흐뭇한 느낌을 주는 것 같아 마음이 괜히 행복해졌습니다. 오늘 평화누리길 걷기에 참여해주신 모든 분들이 금년 한 해 동안 건강과 행복이 함께 하길 진심으로 기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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