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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라 Jan 11. 2019

18. 타이타닉을 연상케하는
바이킹호

스웨덴 스톡홀름~발트해~핀란드 헬싱키


바이킹호를 타고 간 16시간 항해


스톡홀름에서 발트해를 건너 헬싱키로 가는 배는 실야 라인(Silja Line)과 바이킹 라인(Viking Line)이 있다. 물론 실야 라인이 배도 크고 시설도 좋다. 우리가 바이킹 라인을 선택한 이유는 순전히 '바이킹'이라는 이름 때문이다. 나는 바이킹 박물관에서 고대 바이킹들이 탔던 바이킹 선에 매료되어 나선형으로 날렵하게 생긴 범선을 한번 타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했다.       


유레일패스를 가진 여행자는 약간의 예약비만 내면 3등 일반석을 탈 수가 있다. 좀 편하게 누워서 가기를 원할 경우에는 캐빈(Cabin-일종의 침대방) 요금을 따로 지불해야 한다. 바이킹 라인 스톡홀름 지사는 바로 스톡홀름 중앙역 청사 안에 있다. 우리는 16시 50분에 출발하는 바이킹호 3등 일반실을 271 크로나(약 34,000원)를 지불하고 예약을 했다.    

  

스톡홀름에서 헬싱키까지는 무려 16시간이나 걸린다. 바이킹 라인 측에서 무료로 제공해 주는 셔틀버스를 타고 스톡홀름 역에서 선착장에 도착하자 북구의 짧은 해가 거의 다 넘어가고 있었다. 노을 속에 모습을 드러낸 바이킹 호는 마치 거대한 하나의 빌딩처럼 보였다. 승객을 2,500명이나 태운다고 하니 어지간한 빌딩보다는 훨씬 더 큰 배다.      


선실로 들어가는 대합실에서 길 다란 통로를 통해 갑판으로 올라가는 데, 입구에서 누군가가 플래시를 터트리며 사진을 찍었다. 갑자기 어리벙벙해졌다. 무거운 배낭을 걸머지고 들어가는 배낭 여행자를 환영해주기라도 하는 것일까? 나는 이 사진을 찾는데 나는 5유로의 거금을 소비했다. 순간의 멋진 장면 하나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아내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진을 찾았다.    

  

▲바이킹호에 오르며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입구를 통과하니 화려한 의상을 걸친 북유럽의 팔등신 미녀들이 미소를 지으며 환영을 해주었다. 새빨간 입술에 은색 망토 같은 숄을 걸친 미녀들의 모습이 마치 요정처럼 보였다. 선실의 홀에서는 그룹밴드가 음악을 연주하며 승객들을 환영해주고 있었다. 어쨌든 기분은 좋았다. 우린 입구에서 가까운 일반실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바이킹 호는 16시 50분 정각에 출발했다. 뱃고동을 길게 울리며 발트해를 향해 닻을 올리는 바이킹 호는 과연 대단했다. 배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모든 사람들이 환호를 지르기 시작했다. 마치 비운의 타이타닉 호를 연상케 하는 장면이었다. 나는 배낭을 쇠줄로 엮어서 열쇠를 채워 의자에 걸어놓고 갑판 위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 문을 열고 나가려고 하는데 강한 바람이 다시 나를 배안으로 밀어 넣어 버렸다. 몸을 날려버릴 것만 같은 바람이었다.     


“바람 때문에 안 되겠어요.”

“그럼 당신은 배 안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그럴 수야 없지요.”     


▲바이킹호를 안내하는 여자 종업원


내가 조심스럽게 문을 붙들고 필사적으로 밖으로 나가자 아내도 기어코 따라 나왔다. 잘못하면 바람에 날려 발트 해로 날아갈 것만 같았다. 바이킹 호는 노을빛을 받으며 유르고르덴 섬과 셰프스홀맨 섬 사이를 유유히 미끄러져 나갔다. 우리가 산책을 했던 아름다운 유르고르덴 섬의 단풍 숲이 서서히 뒤로 밀려 나갔다.      


“우와~ 잘 못하면 고기밥 신세가 되겠어요!”

“흠~ 갑자기 영화 타이타닉이 생각나네! "

"타이타닉 호보다 더 멋진 배 같은데요."

"허지만 나는 당신을 3등 객실에 재우는 가난한 화가 잭인걸.”

“그래도 백만장자인 칼보다는 잭이 더 좋은 걸요.”

“그거 본심인가요?”

“본심이 아니면 어찌하시려 구요. 호호.”

“아마 저 바다에 몸을 던지고 말걸. 하하”     

▲바이킹호 갑판에 선 아내

우리는 영화 '타이타닉'의 주인공 흉내를 내며 깔깔 웃어댔다. 비록 3등 객실 승객이지만 영원처럼 느껴지는 행복한 순간이었다. 배가 유르고루덴 섬을 빠져나가 넓은 바다 쪽으로 점점 가까이 나아가자 더 이상 갑판 위에 서 있기 어려웠다. 그대로 있다간 정말 바람에 날려 발트해의 고기밥이 되어 버릴 것만 같았다. 점점 어둠으로 덮여가는 발트해는 어쩐지 음산한 느낌마저 들었다. 중세기 이전부터 제국의 열강들이 전쟁터로 으르렁 거렸던 발트해가 아닌가! 비운의 바사 호를 잡아 삼키는가 하면, 한 때 독일과 러시아, 스웨덴, 프랑스 등 미사일을 탑재한 잠수함들이 성난 상어 떼처럼 먹이를 찾아 발트해의 심연에서 헤맸던 곳이 아닌가. 지금도 발트해의 깊은 심연에는 무슨 음모가 숨어 있는 듯했다.


우리는 갑판 문을 열고 다시 안으로 들어와 꼭대기 층부터 층계를 타고 내려오며 선실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배안에는 카지노에서부터, 나이트클럽, 디스코 클럽, 사우나, 회의장, 미니 바 등 거의 모든 편의 시설을 갖추어 놓고 있다. 1985년에 건조된 마리아 호는 8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7층으로 내려오니 카지노, 나이트클럽, 디스코 클럽, 푸드 가든, 미니 바, 퍼브, 뷔페식당 등이 있다. 벌써부터 복도에 비치된 카지노에서 코인을 넣고 게임에 몰입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6층에는 면세점, 각종 게임 룸, 어린이 놀이터, 사이드 카페 등이 있다.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에는 벌써부터 각종 이벤트 행사로 떠들썩하다.      


또한 6층에는 호화로운 캐빈이 있는데, 슈트와 디럭스는 침대와 거실이 분리되어 있고, 욕실, TV, 전화, 냉장고, 안락한 소파 등이 으리으리하게 꾸며져 있었다. 이 정도 캐빈에서 하룻밤을 자려면 400유로가 넘는다고 하니 어지간한 비행기 요금보다 비싸다.     


▲호화로운 바아킹호 캐빈의 내부
▲우리가 머문 어린이 놀이터 옆에 있는 3등 일반실


"이건 완전히 호화 궁전이네요!"     


아내는 디럭스 슈트 캐빈을 내다보며 그 호화로움과 비싼 요금에 혀를 찼다. 5층 이하부터 지하 3층까지는 등급에 따른 캐빈이 층층이 놓여 있다. 일류 호텔의 로비보다 더 깨끗하고 호화롭게 보이는 캐빈의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구경을 하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머물 3등 객실은 어린이 놀이터 옆에 있는 의자로 된 일반석이다. 일반석은 지정석도 없다.

     

우리는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7층 뷔페로 갔다. 뷔페에서 저녁을  먹는 동안 배는 발트해의 넓은 바다로 나온 모양이다. 그 큰 배가 가끔 지진이 일어 난 듯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엇! 너무 심하게 흔들리는데 괜찮을까요?”

“걱정 말아요. 이 배는 그 유명한 바이킹 호가 아니오.”     


어차피 잠을 일직 잘 수도 없고, 클럽으로 들어가 와인이라도 한잔하며 선상의 밤을 보내기로 했다. 클럽에서는 한참 춤사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무대에서 음악에 맞추어 남녀가 각기 쌍을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홀에는 벌써 꼭지가 돌 정도로 보드카를 미신 취객들이 비틀거리며 왔다 갔다 했다. 그들이 마시는 술은 하나 같이 독한 보드카였다.      


우리는 와인 두 잔을 시켜 발트해의 무사 항해를 기원하는 축배를 들었다. 무대에서는 춤을 추기도 하고 게임도 하고 승객을 불러내어 인터뷰도 진행했다. 바이킹 호를 타고 헬싱키로 건너가는 밤은 길었다. 그래서인지 승객들은 독한 보드카를 마시며 그 지루한 발트해의 밤을 잊어버리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먹고 마시고 춤을 추고 떠들어대는 바이킹호의 모습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그 모습을 보니 나는 다시 축배를 들며 출항하는 타이타닉 호가 생각이 났다. 


▲바이킹 호에는 카지노에서부터, 나이트클럽, 디스코 클럽, 사우나, 회의장, 미니 바 등 거의 모든 편의 시설을 갖추어 놓고 있다

    

밤이 깊어지자 점점 취객들이 늘어났다. 아내는 이제 그만 들어가 잠을 자자고 했다. 3등 객실 의자로 돌아와 잠을 청했지만 나는 쉽사리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취객들이 왜 이리도 들락날락하는지… 거기에다가 발트해의 밤은 추웠다.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데 갑자기 수돗물 흘러내리는 소리가 났다. 이크! 배에 물이 새는 것 아닌가? 눈을 떠보니 맙소사! 술 취한 취객이 출입문에 서서 오줌을 신나게 갈겨대고 있었다. 온몸에 털이 부숭부숭한 그는 마치 거인 트롤처럼 거대한 몸집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가 화장실이 아니라고 아무리 소리를 쳐도 막무가내였다. 바닥에서 누워 자고 있던 다른 사내가 보다 못해 일어나 그를 떠 밀치며 화장실로 가라고 소리를 지르자 설상가상으로 그는 벌렁 넘어진 채로 오짐을 갈겨댔다. 완전히 취해버린 그는 인사불성이었다. 선실 바닥은 이내 오줌으로 흥건히 젖어들었다. 고약한 오줌의 향기가 코를 찔렀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객실은 만원이고 밖으로 나가면 춥다. 할 수 없이 코를 막고 있는데, 그 취객은 이제 오줌을 눈자리에 그대로 길게 십자가를 그리며 누워서 코를 드르릉드르릉 골며 잠을 자는 게 아닌가! 그런데다 그는 잠꼬대를 하며 한쪽 발을 뻗어 내 다리 위에 얹어 놓았다. 

    

“이거야 정말, 끌끌… 이 우라질 놈의 바이킹의 후예야. 제발 좀 바디를 내려다오.”    

 

나는 한국말과 영어로 소리를 쳤지만 취사 불성이 된 그는 막무가내였다. 덩치가 큰 사내가 기둥 같은 다리를 내 왼쪽 다리에 올려놓자 그만 다리가 부러질 것처럼 통증이 왔다. 그런 데다가 그는 꾸역꾸역 트림을 하며 오물까지 선실 바닥에 토해냈다. 지옥이 따로 없다. 오늘 밤 잠을 자기는 이미 글렀다. 그렇다고 취객과 시비를 할 수도 없었다. 

     

저 무지막지한 주먹으로 한대 얻어맞는 날엔 내 몸의 한구석이 부서지고 말게다. 나는 조심스럽게 겨우 다리를 빼내어 아내 쪽으로 기울며 몸을 잔뜩 웅크렸다. 오줌 냄새, 술 냄새, 소음, 취객들의 비틀거림, 파도에 흔들리는 선채… 그런데 이상했다. 나는 그 취객으로부터 일종의 스톡홀름 신드롬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내 놓고 팔자 좋게 바닥에 누워 늘어지게 자고 있는 그가 왠지 밉지가 않고 그렇게 편안하게 보일 수가 없었다.     


발트해의 깊은 밤

파도가 배를 흔든다.     

배도 흔들리고

사람도 흔들린다.     

세상도 흔들리고

세월도 흔들린다.     

보드카에 취한 

취객들도 흔들린다.     

나는 

흔들리는 파도를 따라

발트해를 유랑하는 작은 별.   

   

발트해의 아가씨 헬싱키


술 냄새, 오줌 향기, 소음… 그리고 파도의 흔들림 속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새벽녘에 깜빡 잠이 들었나 보다. 아내가 날이 밝았다고 나를 흔들어 깼다. 어젯밤 문제의 취객은 그때까지도 코를 드르렁 거리며 세상없이 자고 있었다. 밖으로 나가보니 어슴푸레한 여명 속에 핀란드 땅이 보이기 시작했다.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헬싱키 항구에 가까이 다가 갈수록 어두운 구름 속에서 점점 도시의 윤곽이 드러났다. 10월인데도 날씨는 겨울처럼 추웠다. 파도가 흰 거품을 물고 차가운 바람에 출렁거리고 있었다.  드디어 ‘발트해의 아가씨’라고 불리어지는 헬싱키에 도착했다. 내 생애에 가장 오랜 시간을 배안에서 보낸 지옥 같은 밤이었다. 육지에 내리자 몸이 흔들거렸다. 아직도 배 안에 있는 것만 같았다. 


눈처럼 깨끗한 나라 핀란드는 삼림과 호수의 나라다. 국토의 70%가 삼림과 호수로 되어있는 핀란드의 인구는 고작 500만 명이 채 안 된다. 수도 헬싱키의 인구도 겨우 50만 명 정도라고 한다. 항구에는 거대한 선박들이 수시로 드나들고 있었다. 건너편에는 실자라인의 하얀 선체가 아침 햇빛을 받아 거대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헬싱키 항구에 정박한 실야라인


숙소인 유로호스텔(Eurohostel)까지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으므로 우리는 바이킹 호에서 내려 걸어서 호스텔까지 갔다. 유로호스텔은 바로 선착장 부근에 있었다. 방값을 물어보니 더블 룸이 78유로였다. 호스텔인데도 이렇게 비싸니 헬싱키의 물가도 알만 했다. 


핀란드는 북유럽 3개국 중 유일하게 유로를 쓰고 있는 나라다. 비싼 방값에 놀라 입을 벌리고 있는 아내를 바라보며 하루 밤만 자기로 하고 78유로를 지불했다. 24시간을 이용할 수 있는 헬싱키 카드도 34유로나 되었다. 물가가 비싸다 보니 북유럽은 배낭족들이 여행을 하기가 힘들다. 살인적인 물가를 피하려면 북유럽을 빨리 떠나는 수밖에 없었다. 

    

원래 핀란드 여행은 노르웨이 최북단 트롬쇠에서 오로라를 관측하고 산타클로스 마을인 핀란드의 로바니에미를 거쳐 헬싱키로 내려오려고 했었다. 그러나 오로라를 관측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고, 산타의 계절은 12월이 되어야 하므로 여정을 변경하였다.    

 

핀란드에서 꼭 가고 싶었던 곳은 라플란드의 자작나무 숲이다. 자작나무를 비롯하여 가문비나무, 소나무 등이 전 국토를 덮고 있는 광활한 숲을 거닐고 싶었다. 흰 눈처럼 새하얀 수피와 미녀의 다리처럼 시원스럽게 뻗어 올라간 미끈한 자작나무는 ‘숲 속의 여왕’이란 칭호를 받고 있다. 


커피와 빵으로 간단한 아침식사를 하고 다운타운으로 가기 위해 트램에 올랐다. 트램에 오르니 다른 북유럽 국가와 달리 검은 머리에 갈색의 눈을 가진 사람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검은 머리를 보니 어쩐지 낯설지가 않고 정감이 갔다. 핀란드 민족은 아시아 계통 흉노족의 한 갈래라고 한다. 헬싱키는 반나절이면 걸어서 주요 명소를 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도시다. 키루나에서 새 신발로 갈아 신은 우리는 마치 신형 엔진을 달듯 발걸음이 가벼웠다. 

     

"왕비님, 어젠 밤새 배를 타고 왔으니 오늘은 실컷 걸을 기회를 드리오리다."

"신발에서 아직도 오줌 냄새가 나요."

"하하. 그 바이킹 녀석이 갈겨 된 오줌 향기가 아직도 배어 있어서 그래요."

“아휴, 그 고약한 지린내 때문에 죽는 줄 알았어요.”     


아내는 신발을 닦고 또 닦았다. 어젯밤 바이킹 호에서 술 취한 바이킹의 후예가 선실에 얼마나 오줌을 많이 쌌던지 흘러온 오줌으로 신발까지 적셨던 것이다. 트램에서 내려 맨 처음 도착한 곳은 우스펜스키 교회였다. 붉은색 벽돌과 청회색 지붕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황금색의 첨탑은 우아하면서도 화려했다.     

 

헬싱키 대성당은 우스펜스키 교회와 정 반대의 느낌을 주었다. 상아빛 나는 하얀 벽과 기둥, 푸른 하늘로 솟아있는 녹색의 돔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다. 원로원 광장에 하늘 높이 솟아있는 대성당은 헬싱키의 상징이다. 40만 개의 화강석이 깔린 조형미 넘치는 정사각형의 원로원 광장과 더불어 핀란드 루터 파 총본산인 대성당은 각종 국가적인 종교행사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카우파 마켓 광장은 부둣가에 위치한 재래식 시장이다. 마켓 광장에는 싱싱한 생선이 푸른 바다처럼 팔딱거리고 있다. 아내는 싱싱한 과일과 야채를 사들고 어린애처럼 웃었다. 광장 옆에는 대통령 관저가 있었다. 무턱대고 우리가 들어가려고 하니 어떤 부인이 웃으며 이곳은 들어가지 못한다고 했다. 알고 보니 그 아줌마가 대통령 관저의 경비원이라고 했다.     


"아주머니가 대통령 관저 경비원이라니 믿기지가 않군요."

"역시 발트해의 아가씨란 말이 어울리는 도시야."  

 "여보, 저기 태극기가 있어요!”

"정말이네!"     


우연히 발견한 태극기! 어찌나 반갑던지 우리는 저절로 태극기 쪽으로 걸어갔다. 핀란드 한국대사관이었다. 벨을 누르니 경비원이 한국인을 바꾸어 주겠다고 했다. 

     

"무슨 용건으로 오셨지요?"

"서울에서 온 여행자인데요. 태극기를 발견하고 그냥 한번 들리고 싶어서요."    

"아, 그래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대사관으로 들어가니 한국인으로 보이는 여직원이 친절하게 우릴 맞이하며 원두커피 두 잔을 가져왔다. 그녀는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 우리 부부가 단 둘이서 배낭여행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눈을 크게 뜨고 놀라면서 헬싱키에 대하여 친절하게 안내를 해주었다. 헬싱키에서 가까운 자작나무 숲을 찾아가고 싶다고 했더니 세우라사리(Seurasaari) 야외박물관을 소개해주었다. 그리고 올림픽 경기장에 가면 핀란드 시내를 한눈에 조망할 수도 있고, 핀란드 사우나도 저렴하게 할 수 있다고 귀띔을 해주었다. 친절한 그녀에게 감사인사를 하고 한국대사관을 나왔다.  

    

한국대사관에서 나와 트램을 타고 천천히 시내를 관통하고 가는데 하얀 건물들이 유독 눈에 많이 띄었다. 우리는 먼저 암석 안에 지은 교회를 가보기로 했다. 그림 같은 거리를 지나 암석교회에 이르니 바위 밑에 땅굴처럼 문을 낸 구릉이 나타났다. 템펠리아우키오(Temppeliakio)라는 암석교회다. 


▲템펠리아우키오(Temppeliakio)라는 암석교회


암석교회는 마치 비행접시가 가라앉은 모습처럼 지붕이 둥근 암석 안에 있는 교회였다. 이 교회는 어느 두 형제 건축가가 자연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교회의 특징을 살려지었다고 한다. 토굴 같은 문으로 들어가니 수백 개의 서까래가 타원형으로 둘러져 있고, 그 사이사이는 유리로 되어 있어 교회 안에 있으면 마치 비행접시를 탄 기분이 들었다. 원형의 채광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신비로웠다. 

     

암석과 돌무더기가 원시적인 모습 그대로 드러내어 있는 교회의 벽은 한층 자연미를 살리고 있었다. 어디선가 예수님이 암굴에 출현하여 설교라도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내가 만일 헬싱키에 산다면 이런 교회를 다니고 싶다. 천장의 돔은 갈색으로 아무런 장식이 없는 게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벽면도 이렇다 할 장식이 없어 암석교회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 원형의 실내에는 3,100개의 관을 가진 파이프 오르간이 넓은 벽 사방에 붙어있었다.      

잠시 빨간색의 의자에 앉아 명상에 잠기고 있는 동안 갑자기 파이프 오르간이 울려 퍼졌다. 어찌나 놀랍고도 신비하던지! 아마 이 장엄한 소리는 평생 잊지를 못할 것 같다. 가슴을 파고드는 파이프 오르간 소리를 타고 어디선가 천사와 함께 예언자라도 곧 출현할 것만 같았다. 

    

암석 사이로 물이 흘러내리는 이 교회는 독특한 디자인으로 자연의 음향효과를 그대로 살리고 있어 파이프 오르간 소리는 더욱 성스럽게 들려왔다. 암석교회는 음악회장으로도 이용되고 주말에는 결혼식이 자주 열린다고 한다. 벽면에 설치된 촛대는 빨간 의자만 아니라면 마치 절집 같은 분위기가 감돌기도 한다. 교회 안에 들어온 사람 모두가 묵언을 하고 있었다. 묵언정진(黙言精進)! 백 마디의 설교보다 묵언으로 올린 기도가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가는 길이 아닐까? 우리는 두 개의 촛불을 들고 묵언으로 기도를 올렸다. 저절로 경건한 마음이 들었다. 촛불을 들고 있는 아내의 모습이 사랑스럽게 보였다.   

  

"당신이 천사처럼 보이는 군."

"또 누굴 놀리려고 그러지요."

"아니야, 이건 진심이라오."   

  

암석교회를 나와 우리는 시벨리우스 공원으로 갔다. 공원에는 자작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다. 눈처럼 하얀 껍질을 입은 수피가 시원스럽게 하늘로 뻗어있는 자작나무가 노란색으로 곱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시벨리우스 공원은 작은 자작나무 숲에 둘러 싸여 있었다.    

 

우리는 자작나무 숲 속을 헤집고 걸어가다가 연갈색의 자작나무 잎파랑이 사이로 거대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스테인리스 파이프 오르간을 발견하였다. 이 파이프 오르간 탑은 1967년에 시벨리우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24톤의 스테인리스 강철관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핀란드의 국민음악가 시벨리우스 공원


이냉치냉 핀란드 사우나


그 모습은 어떤 거대한 힘이 극적인 효과를 몰고 오는 느낌을 주고 있었다. 마치 그의 교향시 핀란디아처럼… 스테인리스 오르간 밑에는 시벨리우스의 초상이 근심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직까지도 조국의 안녕을 걱정하고 있는 듯 근심에 차 있었다. 그는 죽어서도 자작나무 단풍잎에 둘러싸여 조국 핀란디아를 걱정하는 것일까? 육중한 파이프 오르간 속으로 들어가 보니 그의 교향시 핀란디아가 파이프를 타고 내려오는 것 같았다. 


핀란드에 와서 핀란드 사우나를 맛보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자작나무로 지어진 사우나탕에서 땀을 한번 쭉 빼야 여독도 풀릴 것이 아닌가. 한국대사관의 여직원이 가르쳐 준 올림픽 경기장 내에 있는 핀란드 사우나를 찾아갔다. 


올림픽 경기장으로 들어서니 자작나무 숲에 어울리는 경기장이 깨끗하게 들어서 있었다. 1972년 올림픽경기를 개최했다는 경기장은 매우 조용하고 한적했다. 높이 72미터의 타워에 올라 시내를 바라보니 숲 속에 둘러싸인 헬싱키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헬싱키는 도시라기보다는 숲에 둘러싸인 정원처럼 보였다. 높은 건물이 별로 눈에 띠지를 않아 도시는 더욱 안정감을 갖게 한다. 


타워에서 내려와 관리인에게 사우나의 위치를 물으니 친절하게 안내를 해주었다. 우린 자작나무 숲 속에 자리한 경기장 부속 사우나로 들어갔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표를 파는 사람이 없었다. 마침 브라운 색깔의 머리를 가진 아주머니가 들어오기에 물어보니 코인박스에 코인을 넣어서 표를 받아 가야 한다고 했다. 사우나 요금은 1인당 2유로였다. 아주머니는 상냥하게 자동판매기 사용방법을 알려주며 표를 사주었다. 사우나 실 안으로 들어가니 넓은 홀에는 샤워시설이 갖추어져 있고 물통이 몇 개 놓여 있었다. 우리나라 사우나 개념 하고는 아주 다른 시설이었다.

▲핀란드 사우나

샤워로 물을 끼얹고 스모크 사우나라고 표시된 곳으로 들어가니 별로 뜨겁지도 않고 스팀도 나오지 않았다. 실내의 천장, 벽, 의자들은 온통 자작나무로 둘러싸여 있었다. 실내 한 구석에는 벌겋게 달구어진 돌무더기가 있었지만 우리나라의 가마솥만큼 뜨겁지도 않았다. 그런데 몸이 뚱뚱하고 털이 가슴팍이 부숭부숭한 털로 덮인 어떤 사내가 양동이에 물을 넣어 들어오더니 바가지로 냅다 돌에다 부었다. 


순식간에 실내는 김으로 가득 차더니 이내 실내 공기가 뜨거워졌다. 불과 몇 초 만에 뜨거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원래 사우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는 그 뜨거운 김에 질려서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이거, 뭘 알아야 면장을 하지…."


그 사내는 아직도 물을 계속 뜨거운 돌에 부어대고 있었다. 김 올라가는 소리가 치익 치익 하고 밖에까지 들려왔다. 비교적 뚱뚱한 사람들이 사우나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나처럼 빼빼 마른 사람들은 별로 땀을 뺄 살도 없으므로 사우나에 오래 있지를 못한다.


핀란드 사우나는 2000년 전부터 개발된 핀란드의 독특한 목욕법이다. ‘sauna’란 단어는 ‘땀을 빼는 일’이란 뜻이란다. 핀란드 원어가 유일하게 영어사전에 그대로 올라가 있는 단어다. 핀란드 사우나는 전기로 달구어진 돌 난로에 물을 뿌려 더운 증기를 발산하여 몸의 땀을 흠뻑 뺀 다음 얼음을 깨고 호수로 들어가 더움 몸을 식히는 방법이다. 말하자면 이냉치냉(以冷治冷) 건강법이다. 


핀란드 인들은 사우나를 매우 좋아하여 전국에 160만 개나 되는 사우나고 있다고 하니 과연 사우나의 나라답다. 해변이나 호수, 집집마다 거의 사우나 시설을 갖추고 있는 샘이다. 심지어 도심의 카페에도 사우나가 있다고 하니 그들이 얼마만큼 사우나를 즐기는지 알만하다. 마누라 없인 살아도 사우나 없인 살지 못한다는 나라가 핀란드다.


건식과 습식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사우나는 고열과 저습으로 땀을 뺄 수 있는 최적의 상황을 만들어 피부 깊숙이까지 몸을 정화시켜 불순물을 제거해 준다. 사우나를 즐기는 동안 ‘베타 엔도르핀’이 생성되어 자연적으로 심신의 괴로움이나 고통에서 멀어지는 작용을 해 주고 혈액순환을 잘 시켜준다고 한다.


핀란드에서는 사우나가 매우 중요한 사교의 장이 되기도 한다. 온 가족이 함께 사우나를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고, 사업에 관한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진행된다. 핀란드 사람 4명 중에 1명이 사우나 실을 가지고 있다니 이는 자동차보다 더 많은 숫자다.


핀란드 속담에 ‘만약 사우나와 보드카가 당신의 병을 고칠 수 없다면 아무도 그 병을 고칠 수 없다’란 말이 있다. 그 정도로 사우나는 핀란드 인에게 건강과 사교의 장으로 중요하다. 허지만 나는 땀을 뺄 살도, 힘도 없어 더 이상 사우나탕을 들어가지 않고 샤워만 한 다음에 박으로 나왔다. 이거 살이 좀 붙어야 사우나를 즐기지.


♣'만약 사우나와 보드카가 당신의 병을 고칠 수 없다면 아무도 그 병을 고칠 수 없다'
-핀란드 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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