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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라 Jan 12. 2019

19. 눈은 펑펑 내리고 나는 나타샤를 사랑하고

핀란드 헬싱키~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오후 3시 헬싱키 역에서 러시아로 가는 기차를 탔다. 객실로 들어가는 난간 앞에는 전형적인 러시아 군인 모자를 쓴 역무원들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무거운 배낭을 멘 우리들의 위아래를 훑어보고 있었다. 난간에 오르려고 하자 러시아 군인은 열차 난간 출입구에서 우리들의 여권과 승차권을 회수해 갔다.  

    

“아니, 왜 여권까지 회수해 갈까?”     


뭔가 모를 한 가닥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내가 주춤하며 그 군인을 쳐다보자 빨리 오르라고 탁을 들어 입구 쪽을 가리켰다. 여권을 그에게 주고 그냥 기차를 타기가 영 마음에 걸리지만 할 수 없었다. 객실에 오르니 쾨쾨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6인석으로 되어있는 객실은 육중한 철문으로 되어있다. 객실로 들어가 철문을 닫으니 철커덕! 하며 철문 닫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마치 감옥 문이 닫히는 소리 같다. 철문에는 감옥에서나 볼 수 있는 거대한 잠금 고리가 위협적으로 달려 있었다. 문을 열고 닫기가 보통 무거운 것이 아니다. 바닥에 깔린 카펫에서는 두엄이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밀폐된 공간이었다.   

    

객실 안의 6인실 철문


“숨이 막혀 버릴 것만 같군요.”

“철의 장벽 크렘린 궁전으로 가려면 이 정도는 감수를 해야 하지 않겠소?”     


아내는 코를 손으로 쥐며 질색을 했다. 석양 노을이 지는 헬싱키를 뒤로하고 드디어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숨통이 좀 트이는 것 같았다. 끝없는 자작나무 숲은 마치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도입부의 둔탁한 피아노에 소리에 이어지는 부드러운 현의 소리처럼 아름다웠다.     


역무원이 여권과 승차권을 주고 가자, 곧 다시 군복을 입은 여자 경찰이 여권을 회수해 갔다. 한 참 있다가 여자 경찰이 여권을 주고 가더니 이번에는 남자 사복경찰이 여권을 다시 검사했다. 아마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할 때까지 10번도 더 여권을 검사했으리라! 검사, 검사, 검사… 철의 장벽으로 가는 길은 찬물처럼 냉기가 흘렀다.     

허지만 자작나무 숲을 덜커덕거리며 달려가는 기차의 매듭 소리는 영화 '밀회'의 한 장면을 떠오르게 할 만큼 멋진 풍경이었다. 숨이 막힐 듯한 공간에 앉아 있는 아내는 마치 밀회의 여주인공 ‘로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나는 로라를 사랑하는 알렉인가? 기찻길 인연으로 만나 결혼을 하게 된 아내와 나는 마치 영화 ‘밀회’의 내용과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와 나는 공교롭게도 기찻길을 사이에 두고 만난 인연을 가지고 있었다. 내 고향 남도의 끝자락 오룡산 자락에서 태어났고, 아내는 우리 집에서 4km 정도 떨어진 승달산 끝자락에 살고 있었는데, 그 사이에는 호남선 열차가 가로막고 있었다. 우리는 중매로 만났지만 마치 영화 밀회의 주인공들처럼 부모님 몰래 목포 시에서 만나곤 했다.  

    

오래전에 TV에서 영화 ‘밀회’를 본 기억이 있는데, 지금 러시아로 가는 기차에서 새삼 그 장면이 차창에 스크린처럼 떠올랐다. 영화 밀회는 알렉이 로라의 눈에 들어간 먼지를 빼내 준 일을 계기로 역 부근의 찻집에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서부터 시작된다. 그들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음을 알고, 매주 목요일 역 부근의 찻집에서 밀회를 한다. 밀회가 잦아지면서 두 사람은 결국 사랑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자신들의 관계가 더 이상 발전하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로라와 알렉은 더 이상 만나지 않기로 한다. 그들은 각자 반대 방향의 기차를 타고 떠나면서 작별을 고한다.    

  

영화는 마지막 장면이 깊은 인상을 준다. 로라의 남편은 바람을 피우고 돌아오는 아내를 아무 말 없이 받아준다. 과연 바람을 피우고 돌아오는 아내를 담담하게 받아 줄 수 있는 남자가 얼마나 될까?  영화는 오프닝 장면부터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이 내내 배경음악으로 애잔하게 흘러나온다. 기차를 타고 러시아로 여행을 떠나는 밀폐된 공간에서 나는 영화 '밀회'의 장면 같은 스릴을 느끼고 있었다. 라흐마니노프의 음악과 영화 밀회, 그리고 러시아로 가는 차창 밖의 풍경, 이 모든 것들이 내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예술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는 기차에 앉아 나는 왜 자꾸만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에 젖어들고 있을까? 광활한 러시아의 평원, 닥터 지바고에 나오는 끝없는 설원, 차이콥스키와 라흐마니노프,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 이러한 일련의 러시아 문학과 음악이 차창에 스치고 지나가고 있다.  

    

러시아행 기차를 타면서부터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딱딱한 석고상처럼 굳어 보이고, 비밀스러운 음모가 진행되고 있는 듯한 이 칙칙한 느낌을 준다. 기차의 레일 소리조차 ‘크렘린 궁전의 종소리’처럼 들려온다. 그래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2번에 나오는 무겁고 긴장된 피아노 소리를 사람들은 ‘크렘린 궁전의 종소리’라고 했을까? 그 무거운 분위기 속에 잠이 들 듯 말 듯 뒤척이며 밤을 새우고 있는데, 러시아 군인  복장을 한 승무원이 다 왔으니 내리라고 한다.   

  

드디어, 동토의 땅 러시아에 도착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핀란드 역에서 내리니 어두운 새벽이다. 러시아는 역 이름에 출발지의 이름을 붙이고 있다. 러시아에 첫 발을 네 딛는 순간 어쩐지 가슴이 얼어붙는 느낌이 들었다. 역사 건너편에는 마르크스의 후계자인 레닌의 동상이 오른팔을 치켜들고 서 있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기차역은 몹시 추었다. 거리에는 흰 눈이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일단 숙소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탔다. 새벽이라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도 어렵고 언어가 전혀 통하지 않는 곳에서 물어서 찾아가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택시는 네바 강을 따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새벽길을 달려갔다. 마침내 택시는 새벽길을 달려 숙소인 나타샤의 아파트에 세워주었다. 나타샤! 헬싱키를 출발하기 전에 인터넷에서 우연히 나타샤의 민박집을 발견한 나는 순전히 그 이름이 좋아서 나타샤의 집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그렇다고 나타샤의 민박은 숙박비가 그리 싼 집도 아니다. 하루 밤에 50달러나 되니 배낭여행 자에겐 무척이나 비싼 집이다. 숙소 이름만 보고 처음엔 그 집이 러시아인이 경영하는 게스트 하우스인 줄로 알았는데 알고 보니 한국인이 운영하는 게스트 하우스였다.  

    

 나타샤의 집은 네바 강을 건너 시내 중심가와는 다소 떨어진 곳에 있었다. 나타샤의 집에 도착하니 한국인 나타샤가 아주머니가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오랜만에 만난 한국인이 반가웠다. 특히 한국말에 배가 고픈 아내가  좋아했다. 나타샤의 집은 아주 오래된 아파트였다. 나타샤의 말로는 아마 지은 지 70년을 넘었을 것이라고 했다. 벽장처럼 세워진 라디에이터가 오래된 아파트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낡은 아파트에는 방이 세 칸이 있었다. 나타샤는 그중에서 방 두 개를 민박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녀는 첼로를 전공하는 딸의 음악교육을 위해 한국을 떠나 온 지 10년이 넘었다고 했다. 우리나라 어머니들의 교육열은 참으로 대단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딸의 교육을 위해 멀리 동토의 땅 러시아까지 와서 민박집을 운영하는 나탸샤야말로 현대판 신사임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타샤는 우리에게 그녀의 큰 방을 내어 주었다. 나타샤는 거실 마루에서 자고, 우리에게 안방의 침대를 내주었다. 그녀는 우리 침실로 들어오더니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을 틀어 주었다. 내가 좋아하는 ‘피아노 협주곡 2번’이었다. 눈 내리는 밤에 러시아에서 듣는 라흐마니노프의 음악! 그녀는 어찌하여 이토록 내 마음을 잘도 읽고 있을까?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며 몸을 녹인 후 창밖을 바라보니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마치 닥터 지바고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하는 풍경이었다! 동토의 땅 러시아에 도착한 첫날 눈이 내리는 풍경은 내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창밖에 펑펑 쏟아져내리는 눈은 누군가를 사랑하게 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나는 아내를 포옹하며 아내의 볼에 키스를 했다. 

    

"오, 당신은 나의 나타샤야."

"아니, 갑자기 왜 이러세요?"

"눈이 펑펑  내리니 당신이 더 사랑스럽게 보이는 걸."     

"호호, 당신도 참 못 말려요."


같은 눈인데도 러시아에 도착한 첫날 내리는 눈은 색다른 느낌을 주었다. 나는 창밖에 쏟아져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문득 백석 시인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란 시가 떠올랐다. 지금 창밖의 풍경이 백석의 시와 같다. 금방 흰 당나귀라도 나타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가난한 내가/ 나탸샤를 사랑해서/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눈은 푹푹 나리고/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이 얼마나 소박한 표현인가!  그렇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은 아니다. 가난한 마음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 아름다운 시다. 너무도 좋아서 응앙응앙 울어버리겠다는 백석의 순백한 마음이 꼭 오늘 밤을 두고 한 말 같았다. 우리는 노르웨이의 북극 송네 피오르드에서 첫눈을 맞이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헬싱키에서 기차로 밤새 달려와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맞이하는 눈은 느낌이 달랐다. 

   

눈 내리는 러시아의 밤, 나는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을 들으며 아내를 끌어안고 깊은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눈은 펑펑 내리고 가난한 나는 나타샤를 사랑해서…’ 나는 지금 나의 사랑하는 아내 나타샤 품에 잠들고 있었다. 나는 너무 좋아서 꿈속에서 응앙응앙 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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