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찰라 Jan 13. 2019

20. 피와 뼈 위에 세운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 산책

러시아~상트페테르부르크

서울에서 출발할 때부터 안개 속에 묻힌 듯한 러시아를 가려고 생각하니 어쩐지 목이 움츠러들어갔다. 내가 여행을 할 당시 몇 년 전만 해도 그 동토의 땅을 어찌 가리라고 생각을 했겠는가? K 작가는 러시아 비자가 잘못되는 바람에 런던에서 모스크바까지 갔다가 입국을 하지도 못하고 다시 런던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했다고 한다. 마치 영화 ‘에어포트 맨’ 신세를 질 뻔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서울에서 출발하기 전에 날짜를 계산하여 30일짜리 관광 비자를 미리 받아두었다. 


그러나 막상 비자를 받으려고 하니 러시아의 여행사로부터 ‘초청장’을 받아 첨부를 해야 하고, 현지 여행사로부터 ‘바우처’라고 하는 ‘접수확인서’를 발행받아야만 했다. 비자 비용도 한 달 전, 일주일 전등 일수에 따라 비용이 다 달랐다. 나는 무려 13만 원의 거금을 들여 러시아 비자를 받아야 했다(최근에는 60일 무비자 여행이 가능하도록 바뀌었다). 


또 러시아에 입국하여 3일 이내에 거주자 등록신고를 해야 하고, 입국 시 세관에 단돈 1달러까지 정확하게 신고를 하여 신고서 부본을 챙겨야 한다고 했다. 헬싱키의 핀란드 대사관 직원은 제발 러시아로 배낭여행은 가지 않는 게 좋다고 하며 우리들의 러시아 행을 극구 말렸다.      


헬싱키에서 페테르부르크 가는 기차에서 세관원에게 소지한 돈을 전부 신고하고 외화반입신고서를 달라고 했더니 기어코 주지를 않아 어찌나 불안했던지… 신고서가 없으면 출국 시에 소지한 돈을 몽땅 뺏기는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 그러나 정작 확인을 해보니 소지한 금액이 3,000 달러 미만인 경우에는 문제가 없다고 했다.


또한 러시아의 거리엔 갱들이 즐비하고 특히 동양인을 상대로 ‘스킨헤드’(파시스트, 즉 정치적 집단들이 유색인종을 상대 펼치는 테러 행위의 일종)들이 판을 치고, 아직도 비밀경찰들이 거리에서 불심검문으로 연행하고 뇌물을 공공연히 요구한다고 했다. 러시아 여행은 듣는 소리마다 다 겁을 주는 소리였다. 


우리는 나타샤가 소개한 어느 유학생의 도움을 받아 호텔로 가서 ‘거주자 등록’ 했다. 그는 1인당 25달러를 받고 거주자 신고 대행을 해주었다. 거주자 등록을 하고 나니 러시아가 과연 공산주의 국가라는 것이 실감이 났다. 거주이전의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다시 느끼는 순간이었다. 거주자 등록도 했겠다 이제 페테르부르크 거리를 마음 놓고 활보해 도 거리낄 게 없었다.


페테르부르크 도착한 다음 날 나는 네바 강변으로 산책을 나섰다. 네바 강변 하늘에는 먹구름이 끼고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었다. 스산한 초겨울 날씨를 보여주는 네바 강은 길손들도 드물어 어쩐지 우수에 젖어 있는 듯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심을 흐르는 네바 강


네바 강! 볼셰비키 혁명 등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날 때마다 네바 강은 피로 물들었던 곳이다. 그래서 네바 강은 우수에 젖어 보이는 것일까?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네바 강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시내의 중심가를 흐르는 네바 강은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었다. 마치 서울의 한강이 도심을 가르듯 이곳 네바 강이 그랬다.


페테르부르크는 핀란드만으로 흘러나오는 네바 강의 델타 지대 석호(潟湖)에 세워진 물 위의 도시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100개 이상의 섬, 500여 개의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의 베니스’라고도 불린다. 또한 화려한 궁전과 공원, 고풍스러운 건물, 그리고 광장이 많아 ‘북쪽의 파리'라고 불리기도 한다.   


네바 강변을 거닐다 바람이 너무 거세게 불어와 한기를 느낀 우리는 우리는 다운타운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역으로 갔다. 지하철역 부근에서는 꽃을 파는 사람들이 많았다. 많은 사람들이 꽃을 샀다. 누군가를 위하여 꽃을 샀다. 남자들도 여자들도 꽃을 샀다. 꽃을 사들고 지하철을 타러 가는 그들이 아름답게만 보였다. 


"꽃을 사는 사람들은 아름답게만 보여요!"

"꽃을 파는 사람도 아름답지 않소?"


꽃을 가꾸기를 좋아하고 꽃을 사랑하는 아내는 꽃을 사고파는 러시아인들을 넋을 잃고 바라보며 발길을 멈추었다. 그런 아내에게 장미꽃 한 송이를 사주 싶어서 값을 물어보니 한송이에 200 루블이 넘었다. 아내는 비싼 꽃값에 기겁을 하고 손사래를 쳤다. 꽃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없겠지만 러시아인들만큼 꽃을 사랑하는 민족이 있을까? 이렇게 꽃값이 비싸도 꽃집은 항상 성업을 한다고 한다. 


러시아인들은 꽃을 주고받는 것을 그만큼 생활화하고 있다는 증거다. 생일날은 물론이고, 남의 집에 초대를 받았을 때, 데이트를 할 때 남자 친구들이 여자 친구에게 꽃을 선물하는 것은 기본이고, 각종 기념일, 공연장에 갈 때 러시아 인들은 꽃을 선물한다고 한다. 꽃을 사랑하는 마음은 꽃보다  아름답다. 


꽃 가게를 지나 우리는 지하철을 타기 위해 지하철 역으로 갔다. 페테르부르크의 지하철은 매우 깊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한 참을 내려갔는데도 승강장이 나오지 않았다. 도대체 지하 몇 미터까지 내려갔는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승강장이 깊었다. 지하철 문은 왜 그리 또 육중한지. 사람을 태우고 나면 육중한 철창문이 철커덕하고 소리를 내며 닫혔다. 그 문소리 때문에  마치 지하 감옥에 갇히는 느낌이 들기도 하여 이거 영영 빠져나오지 못하는가 하는 우려를 하기도 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중심은 네프스키대로다. 우리는 네프스키 역에서 내려 거리로 나가니 거리 풍경은 지하와는 영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화려한 거리, 고풍스러운 건물이 줄지어 서 있고 거리에는 사람들로 홍수를 이루고 있었다. 바로크 양식과 클래식 양식으로 지어진 중후한 건물들이 제정 러시아 시대의  화려한 영화를 그대로 반영시켜주고 있었다. 


“아니, 저건 LG마크가 아닌가요?”

“맞네!”


너무도 선명하게 LG 브랜드 마크가 그려진 버스와 트램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동토의 땅에서 우리나라 기업의 상표를 보니 반가웠다. 'LG', 'Samsung', 'Haindai' 등 한국의 대기업 브랜드 마크는 이제 지구촌 어디를 가나 만난다. 해외로 진출한 우리나라 기업은 애국자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를 해외에 알리는 최고의 외교관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


우리는 성 이삭 성당으로 가기 위해 네프스키 대로를 따라 서쪽으로 걸어갔다. 성 이사크 성당 뒤의 데카브리스트 광장에는 푸시킨의 시 '청동의 기사'란 제목을 딴 청동 기사의 동상이 우뚝 세워져 있다. 물론 동상의 주인공은 표트르 대제다. 청동 기마상은 유럽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표트르 대제는 스웨덴과 북방 전쟁에서 승리한 후 처음엔 이곳에 요새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유럽 콤플렉스에 시달린 그는 유럽의 어느 도시보다도 가장 아름다운 도시를 건설하여 수도를 천도하기로 작정하고 네바 강 하류 델타 지역에 후보지를 선정했다. 이는 곧 발트해와 유럽으로 나아가기 위한 출구를 확보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로마 바티칸의 언덕에 ‘반석’이라는 뜻을 가진 베드로 성당을 세웠듯이 표트르는 지반이 약한 네바 강의 석호에 반석처럼 단단한 새로운 수도를 짓기를 원했다. 그리고 1712년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이곳으로 옮겼다. 볼셰비키 혁명 이후, 1918년 수도가 다시 모스크바로 옮겨질 때까지 약 200년 동안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정치, 경제, 문화, 예술의 중심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이 도시는 ‘피와 뼈 위에 세운 도시’다. 1년의 절반은 장마와 홍수로, 나머지 절반은 눈과 얼음으로 뒤덮이는 혹독한 기후 조건 속에서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겠다는 야망은 수많은 노동자, 농민들을 추위와 굶주림, 과로와 질병으로 내몰았다. 공사기간 중 도시 전체 인구의 3분의 1이 피를 흘리며 네바 강의 물에 빠져 죽어갔다고 하니 한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잔인한가.


표트르 대제의 신도시 건설을 향한 집념은 집요하다 못해 광적이었다. 그는 러시아식 이름인 ‘표트르’를 네덜란드 식 이름인 ‘피터’로 바꿀 만큼 유럽의 선진 문물을 흠모하고 있었다. 그는 황제에 즉위하기 전 왕자라는 신분을 감춘 채 운하의 도시 암스테르담의 어느 조선소에 잠입하여 유럽의 선진 건축 기술을 터득할 정도로 도시건축에 열을 올렸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그런 도시다. 


“와! 지금까지 우리가 보아온 어느 성당보다도 규모가 어마어마하네요!”

“러시아에 이런 교회가 있다니 정말 놀랍군!”


성 이삭 대성당(St Issac's Cathedral) 앞에 서서 아내는 우선 그 규모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성당을 건축한 표트르 대제는 도대체 어떤 인물일까? 이사크 성당은 1818년부터 40년에 걸쳐 완성한 러시아 최대의 성당이다. 표트르 대제는 자신의 생일이 ‘이사크’ 성인의 날과 같다고 하여 성당 이름을 이사크 성당으로 명명했다. 기록에 의하면, 14,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이 성당은 무려 100킬로그램의 금을 부어 황금 쿠폴라(돔)를 만들었다. 지반이 약한 것을 고려해 2만 4000개가 넘는 원목 말뚝을 박아 넣어 기초를 다지고 그 위에 화강암과 석회암을 깔아 축조되었다고 한다.



성 이삭 대성당


돔 밑에 64개의 거대한 대리석 기둥들은 모두 이탈리아에서 가공을 마쳐 네바 강을 통해 옮겨왔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는 문은 각각 9톤의 청동 주물을 부어 만들어졌다. 또한 연약한 지반의 보강을 위해 수천 톤의 철과 구리를 부어 세계 어느 성당보다도 아름다운 건축을 하고자 했다.


페테르부르크의 어느 건축물도 이 성당의 높이(101.5m)를 초과하지 못하도록 규제하였다. 이는 로마의 건축물을 베드로 성당 높이를 초과하지 못하도록 제한 것과 같다. 이사크 성당은 로마의 베드로 성당, 이스탄불의 성 소피아 성당과 더불어 세계 3대 성당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표트르는 자신이 마치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이 되고자 하는 환상 속에서 이 성당을 축조했다고 한다. 교회 내부는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예언자 에제키엘의 환상, 대홍수, 최후의 심판 등 모자이크의 환상적인 율동은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실내 장식은 그 당시 22명의 기라성 같은 최고의 예술가들이 참여하여 성서의 장면과 150명의 성인들을 천장에 그려 넣었다. 천장에 새겨진 성화는 눈이 부셔 바라보기가 곤혹스러울 정도였다. 그러나 이 성당을 짓는 동안 수많은 노동자들이 죽어갔다. 특히 돔 바깥에 수은을 섞어 금을 칠하다가 많은 사람들이 수은에 중독되어 죽어 갔다고 한다.


우리는 성당 밖으로 나와 뺑뺑이 계단을 타고 전망대 돔으로 올라갔다. 전망대로 올라가는 계단 입구에는 입장료를 따로 받고 있는 러시아 할머니가 있었다. 러시아는 입장료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 할머니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공산당원들로 매우 관료적이어서 하나같이 석고상처럼 딱딱했다. 친절은커녕 호통이나 맞지 않으면 다행이다. 할머니에게 200 루블을 지불하고 헐떡거리며 긴 계단을 타고 오르니 멀리 네바 강과 도시 전체의 풍경이 한눈에 확 들어왔다.

 

전망대의 계단과 돔에 장치된 스피커에서는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비창'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비창은 인간의 고통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음악이다. 전쟁과 학대 속에서도 러시아 인들은 음악과 예술을 사랑했다. 이사크 성당을 나와 표트르 대제 동상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한 쌍의 신혼부부가 결혼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하얀 면사포를 입고 꽃을 든 신부의 예쁜 얼굴이 이사크 성당의 황금빛 쿠폴라와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마냥 싱글벙글 웃고만 있는 신랑의 표정이 천진난만하게 보였다. 나탸샤네 집에서 만난 한 유학생의 말이 떠올랐다.     


 “회사일이 하도 골치가 아파 머리를 좀 식힐 겸 잠시 이 도시를 들렸는데, 그만 이 도시의 매력에 흠뻑 젖어 그냥 눌러앉게 되어 버렸지요.”

 

그는 30대 중반의 회사 간부였는데,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출장을 와서 발을 내딛는 순간, ‘아, 내가 머무를 곳은 이곳이야!’라는 직감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회사 생활을 접고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에 입학을 하였다고 한다. 현재 러시아의 대통령인 푸틴도 이 대학을 졸업했고, 현 정권 러시아의 실세들이 거의 대학 출신들이라고 그는 귀띔을 해준다. 튼튼한 직장을 포기하고까지 늦은 나이에 이 도시에서 공부를 하게 된 매력은 무엇일까? 과연 그 ‘무엇’이 그를 그토록 사로잡았을까?


시인 푸슈킨이 ‘유럽을 향해 열린 창’이라고 극찬했듯이 거리에 널려 있는 유럽의 건축 양식들은 마치 파리나 런던의 어느 거리를 활보하는 느낌을 준다. 네바 강의 푸른 물결과 울창한 숲이 고풍스러운 건물과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유럽의 어느 도시 못지않게 아름답다.    


이삭 성당에서 나온 우리는 황제들의 겨울궁전이라 부르는 에르미타시 미술관으로 갔다. 그 유명한 궁전광장을 지나가는데 한 소년이 곰을 데리고 재주를 부리고 있었다. 궁전광장은 1905년 '피의 일요일' 사건 등 민중의 혁명이 일어날 때마다 피로 물들었던 역사의 현장이다. 그러나 곰이 재주를 부리고 있는 지금은 평온하기만 하다. 


에르미타시 미술관과 궁전 광장에서 곰의 재주를 선보이는 소년


에르미타시 미술관은 자세히 관람을 하려면 며칠이라도 부족할 만큼 방대한 규모다.  제정 러시아 시대 로마노프 왕조 황제들의 영원한 '은신처' 겨울궁전, 에르미타주 박물관! 1050개의 방, 2000개의 창문, 120개의 계단, 300만 점에 달한다는 컬렉션 소장품… 이 작품들을 다 보려면 몇 달, 몇 년이 걸러야 할지도 모른다. 에르미타시 미술관에서 내가 가장 보고 싶었던 그림은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였다. 


아내와 나는 미로 같은 방들을 지나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가 전시된 방을 겨우 찾아냈다. 그림 한 장을 감상하는 것이 이 뭐 그리 대단하겠지만 나는 오래전에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를 어느 미술잡지에서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여건이 허락되면 꼭 그 그림의 원본을 한 번 보고 싶다는 막연한 희망을 품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 그림은 렘브란트의 고향인 네덜란드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이곳 러시아 땅 에르미타시 미술관에 소장하고 있어서 유럽에 몇 번 갔지만 이 그림을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곳 머나먼 동토의 땅에서 '돌아온 탕자'를 감상하게 되다니 감회가 남달랐다.           

                                                     

나는 아내와 함께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아’ 앞에 서 섰다. 그림 앞에 서 있는 나는 세상에서 가장 몹쓸 ‘돌아온 탕아’이다. 전생과 금생을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과업을 지어온 ‘나’인가? 북방의 은신처 에르미타주에 걸려 있는 이 명작 앞에서 나는 과거 생에 지어 온 수많은 내 과보를 참회하고 싶었다. 렘브란트의 그림 한 장이 이처럼 비수가 되어 참회의 화살을 던져 줄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

렘브란트는 말년에 고독과 곤궁 속의 세월을 보내며 이 그림을 그렸다. 그의 사랑하는 첫 아내 사스키아가 죽고 난 후, 그의 생활을 돌봐주던 아들 티투스마저 세상을 떠나자 그는 결정적인 파산에 직면하게 된다. 젊은 시절의 명성과 재산은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리고 그에게 남은 것은 가난과 고독뿐이었다.                                                                                                                     

홀로 남겨진 고독 속에서 그는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과 더불어 예술세계의 영혼은 한없이 깊어져만 갔다. 그는 깊은 고뇌 속에 성서를 부제로 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빛과 어둠의 화가답게 어둠 속에서 등장인물들이, 서서히 그리고 부드럽게 부각되어 나오게 그림을 그려나갔다.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아'는 아버지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고 머리는 아버지의 가슴에 안기고 있다. 집을 나설 때는 화려했을 옷은 걸레처럼 낡아 빛이 바래져 있고, 신발은 헤지다 못해 뒤창이 떨어져 나가 있다. 그러나 돌아온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표정은 담담하기만 하다. 아들을 기다리다 눈이 멀어버린 듯 더듬더듬 아들의 어깨를 어루만지고 있을 뿐. 아버지의 품에 안긴 아들은 참회의 눈물이라도 흘리는 듯 어깨가 들썩거리는 느낌을 받는다.                                                                                                                                                                                              

내가 앞으로 살아갈 날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지만, 이 한 장의 그림을 통해서 보다 더 많은 용서와 화해, 그리고 참회하면서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만 다가왔다. 나의 지나온 과거를 참회하고 많은 사람들과 사랑과 자비로 재회의 기쁨을 나누고 싶은 그런 마음이 생겨나게 하는 그림이었다.


오늘은 너무 많은 걸은 탓인지 아내가 저혈당 증세가 있었다. 전시실에서 나와 휴게실에서 아내는 초콜릿 하나를 입에 넣고  씹어 먹었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아내의 모습을 바라보며 왜 진즉 아내를 위한 배려를 하지 않았는지 몹시 후회되었다. 그까짓 그림을 보지 않아도 될 일이 아닌가? 


저혈당이 오면 당분을 섭취하고 탄수화물을 보충해주어야 한다. 나는 궁전광장 앞에 맥도널드 마크를 보았던 기억이 나서 아내를 보축하고 맥도널드 가게로 갔다. 에르미타시 미술관에서 광장을 가로질러 맥도널드 가게까지 가는데 왜 그렇게 멀게 보이는지... 가까스로 맥도널드 점에 도착한 우리는 빅맥과 감자칩을 시켜 먹었다. 다행히 아내는 곧 회복이 되었다.  명심하자. 나보다 언제나 아내를 먼저 배려하는 마음을....



★★★ 나보다 상대방을 먼저 배려하자.


매거진의 이전글 19. 눈은 펑펑 내리고 나는 나타샤를 사랑하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