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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라 Feb 16. 2019

28. 프라하, 황금소로에서
길을 잃다

체코 프라하-황금소로

프라하의 봄과 서울의 봄

     

‘프라하’ 하면 ‘봄’이 떠오르고 ‘민주화 운동’하면 ‘프라하의 봄’이 떠오른다. 프라하의 봄은 근대역사에 민주화의 산실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원래 ‘프라하의 봄’이라는 말은 1946년 세계 제2차 대전의 종전을 기념하면서 시작되었던 프라하 음악축제를 뜻한다. 매년 5월 12일 프라하에서 스메타나의 교향곡 ‘나의 조국’을 연주하면서 프라하의 봄 음악축제는 시작된다. 6월 초까지 계속되는 음악축제는 베토벤 교향악 9번‘합창’으로 막을 내린다. 


1968년 소련군이 침공할 당시 어느 신문기자가 ‘프라하에 봄은 오는가?’란 제목으로 뉴스를 타전하면서 ‘프라하의 봄’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프라하의 봄’이란 제목으로 영화화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프라하는 1945년 5월 나치 점령 하에 있던 구소련 군에 의해 해방되었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을 맛보기도 전에 공산당의 독재가 망령처럼 배회하며 긴 겨울이 찾아온다. 이 기나긴 겨울에 저항하며 프라하의 봄을 부르짖는 최초의 외침은 카프카의 작품이 복권되면서 시작된다. 프라하에서 봄은 곧 자유를 상징했다. 1968년 1월, 체코는 두브체크가 공산당 제1서기장으로 취임하면서 민주선거 제도,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를 선언한다. 그러나 8개월도 되지 않아 그해 8월, 소련군의 침공으로 프라하의 봄은 무참하게 사라지고 만다. 


바츨라프 광장에 있는 얀 팔라흐 추모비(자료: 위키백과)

영화 ‘프라하의 봄’에는 그 당시의 상황이 재현되며 암울했던 체코의 시대 상황이 전개된다. 아침 일직 우리는 바츨라프 광장으로 걸어갔다. 점령군과 시위대의 격돌로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뿌렸던 성 바츨라프 기마상 앞에는 ‘공산주의 희생자 추모비’ 하나가 지나가는 나그네의 발길을 붙들고 서 있다. 추모비 앞에는 1969년 1월 16일 소련군의 탄압에 반발하며 분신한 커렐대학교 철학과 얀 팔라흐(Jan Palach, 1948~1969)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그는 이곳에서 "체코인들이여 일어나라!"라고 외치며 소련의 탄압에 저항하며 분신자살로 목숨을 끊었다. 1969년 2월 25일 같은 장소에서 또 다른 학생 얀 자이츠가 자신을 불살랐고, 같은 해 4월 이흘라바에서 에브젠 플로첵이 뒤를 따랐다. 이를 계기로 계속해서 자유를 외치며 분신으로 저항하는 사건이 이곳에서 발생했다. 얀 팔라흐 동상 앞에 서니 저절로 숙연해졌다.


“프라하의 민주화는 우리네 정치상황과 비슷한 것 같아 가슴이 아파요.”


체코에 '프라하의 봄' 있다면, 한국에는 '서울의 봄'이 있다. 그리고 프라하에 얀 팔라흐가 있었다면 한국에는 젊은 투사 마산의 김주열이 있었다. 서울의 봄은 3.15 부정선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960년 3월 15일 이승만 독재정권의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마산데모사건'이 일어났을 때 마산상고 재학 중인 김주열의 나이는 17세였다. 그는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에 참가한 후 실종, 행방불명되었다가 4월 10일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모습으로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었다. 사체 검안 결과 사인은 "미제 최루탄(길이 17㎝, 폭 3㎝)이 안부에 박힌 것" 때문으로 밝혀졌다. 이것이 경찰의 소행으로 밝혀지자 학생과 시민의 분노가 폭발하여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자유를 향한 젊은 영혼들을 우리는 소중히 여겨야 한다. 젊은 영혼들이 자유를 위하여 피를 흘릴 때 나는 무엇을 했었던가? 내 젊은 날 나는 기껏해야 몇 번의 거리행진에 동참했던 기억이 전부였다. 그리고 먹고사는 데만 급급하다는 핑계로 전전긍긍하며 살아왔을 뿐이다. 실로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는 바츨라프 광장부터 중세의 고도 프라하 시가지 산책을 시작했다. 화약탑을 지나서 구시가지로 들어가니 모차르트가 ‘돈 조반니’를 초연했다는 스타보브스케 극장이 보였다. 프라하는 도시 전체가 ‘중세의 박물관’을 연상케 할 만큼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폴란드의 바르샤바나 독일의 베를린이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도시 건물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파괴된 데 비해 프라하는 옛 모습 그대로 간직된 체 고스란히 남아있다. 중세풍의 골목이 거미줄처럼 어지럽게 얽혀 있고, 박물관과 미술관, 재즈클럽, 록 공연장, 음악 홀이 곳곳에서 여행자들을 유혹하고 있다. 


바츨라프 광장에서 바라본 프라하 시가지


유혹의 발톱을 숨긴 도시 , 프라하


일단 프라하에 한 번 발을 들여놓은 여행자들은 발목이 잡혀 당초 계획보다 대부분 일정을 늦추게 된다. 일직이 소설 ‘변신’의 작가 프란츠 카프카는 프라하를 두고 ‘유혹의 발톱을 숨긴’ 도시라고 피력했다. 그렇다! 프라하는 카프카의 말처럼 유혹의 발톱을 숨긴 매력 있는 도시다. 


대낮인데도 골목의 숍마다 샨데리아 불빛이 호화롭게 비추이고 있었다. 고풍스러운 숍과 예쁜 디스플레이가 지나가는 관광객을 유혹하기에 충분했다. 바둑판같은 바닥, 다정하게 팔짱을 끼거나 손을 잡고 여유롭게 걸어가는 여행객들… 프라하는 아무리 돌아다녀도 싫증이 나지 않는 그런 거리다. 


“여보, 저기 뜨거운 와인이 있네요!”

“뜨거운 와인? 정말 김이 모락모락 나네! 그럼 오늘 점심은 케밥에 뜨거운 포도주 한잔으로 할까요?”

“조오치요!” 


겨울의 문턱에 들어서는 프라하의 거리는 추웠다. 우리는 시민광장으로 가는 골목에서 ‘Hot Wine’이란 팻말이 붙어 있는 케밥 집 앞에 서서 뜨거운 와인을 한잔씩 주문하여 마셨다. 내 일생에 뜨거운 포도주를 마시기는 처음이었다. 


“자, 프라하 입성을 자축하며 브라보!”

“여보, 누가 보면 웃겠어요. 호호.”


거리에서 포도주 잔을 마주치며 케밥을 뜯어먹는 모습이 웃기게 보였든지 케밥을 파는 종업원도 웃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윙크를 하며 웃었다. 뜨거운 포도주가 목 줄기를 타고 위장 속으로 들어가자 금방 짜르르하고 기별이 왔다. 


“여보, 위장 속에 오선지가 가득 찬 기분이네! 하하하.”

“뜨거워서 좋아요. 정말 금방 취기가 오는군요.”

“뜨거워서 좋다! 그거 명답이네. 한잔 더 마셔야겠어.”

“그러다가 취해요.”

“술은 원래 취하라고 먹는 거 아니겠소?”


콧수염을 기른 케밥 집 아저씨가 눈치를 채고 재빨리 뜨거운 포도주를 잔에 가득 부어 건네주며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케밥에 뜨거운 포도주 두 잔을 마시고 나니 온 세상이 부러울 게 없었다. 경쾌한 오선지가 하늘로 피어오르며 날아갔다. 몸도 따뜻해지고 마음도 따뜻해졌다. 


와인 한잔이 오십을 훌쩍 넘은 부부에게 청춘의 기운을 불어넣어 주다니…. 후후후, 술은 그래서 마시는가 보다.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아름답게만 보였다. 어지러운 골목 풍경은 유혹 그 자체다. 정말 카프카가 말한 것처럼 프라하는 ‘유혹의 발톱을 숨긴’ 도시처럼 보였다.


유혹의 발톱을 숨긴 프라하 쇼윈도


골목을 빠져나오니 넓은 광장이 나오고, 이상하게 생긴 시계탑 앞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물려 있었다. 연금술사들이 연구실과 화약창고로 쓰였다는 구 시청사 벽에 붙어 있는 천문시계였다. 시계탑 앞에 늘어선 거리의 카페가 마음에 들었다. 여행자들이 카페에서 지친 다리를 쉬며 맥주 또는 포도주를 홀짝거리고 있었다. 


12시 정각이 되니 종소리와 함께 천문시계가 돌아갔다. 천문 시계는 위아래 두 개의 원으로 되어 있는데, 매시 정각이 되면 죽음의 신이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천사의 조각상 양 옆으로 창문이 열리고 그리스도의 열 두 제자가 창 안쪽에서 천천히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시계가 돌아가며 인형이 나오는군요.”

“저 인형들은 그리스도의 12 사도래요. 해골인형이 줄을 잡아당기면서 회전을 종을 치는데 ‘회계하라, 천국이 가까웠나니. 복음을 믿고 영생을 얻으라.’ 이렇게 말을 한다는군.” 

“그걸 어떻게 알았지요? 어어? 꼭대기에 닭에 나와 닭이 울고 있어요!”


천문시계에서는 열두 제자가 다 돌아간 후에 시계 꼭대기에서 황금닭이 “꼬끼오” 하며 한바탕 울고 들어갔다. 엄숙한 표정으로 12 사도를 바라보던 사람들이 닭 울음소리를 듣고 모두 까르르 웃었다. 시계탑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닭 우는 소리였다. 카페에 앉은 사람들은 12 사도보다는 닭울음소리를 더 기다리고 있었다. 


구 시청사 벽에 붙어 있는 천문시계


이 천문시계는 웃지 못할 전설이 하나 있다. 1490년 하누슈라는 이름의 장인이 제작한 천문시계는 그 아름다움과 기발한 아이디어가 전 유럽으로 퍼져 똑같은 시계를 만들어 달라는 주문이 쇄도했다. 그러나 프라하 시청 간부들은 그 시계를 독점하고자 그를 장님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한다. 졸지에 장님이 되어버린 기계공 하누슈는 자신이 만든 시계를 만져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가 시계에 손을 대자마자 잘 돌아가던 시계가 멈추어 버렸다. 천문시계가 자신을 만든 주인을 장님으로 만들어 버린 것을 알았을까? 그 뒤 천문시계는 400년 동안이나 움직이지 않다가 1860년대부터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천동설에 기초한 두 개의 원이 아래위로 나란히 돌아가는 천문시계는 위에 있는 원은 해와 달, 그리고 북극성의 위치를 가리키며 1년에 한 바퀴씩 돌면서 연월일과 시간을 나타낸다. 밑에 있는 원은 12개월을 계절별로 묘사한 것으로 보헤미안의 농경생활에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인생은 스케치와 같다     


우리는 천문시계의 닭 우는 소리를 듣고 나서 카를교로 걸어갔다. 카를교는 낭만의 다리다. 프라하를 찾는 여행자들은 모두 이 아름다운 카를교를  한 번쯤 걸어 보았을 것이다. 블타바 강을 가로질러 구 시가지와 프라하 성을 연결하는 카를교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석조 다리다. 석조 다리 위에 조각되어 있는 30여 개의 동상은 하나하나가 멋진 예술품이다. 


유유히 흐르는 블타바 강 위에 세워진 유서 깊은 카를교를 걷다가 보면 누구나 로맨티시스트가 되고 만다. 풍경이 그렇게 만든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 이상한 음악상자를 밀고 다니는 노인… 풍경은 사람을 다시 태어나게 한다.


인생은 스케치와 같다. 카를교에서  인물화 스케치를 하고 있는 화가


카를교 주변의 모든 풍경이 정감이 간다. 파리 센 강 다리, 루체른의 카펠교보다 프라하의 카를교가 더 마음에 드는 것은  인간적인 냄새가 물씬 풍겨 나기 때문이다. 


“자, 여기를 만져 보세요. 이 청동조각을 만지며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이루어진데요.”

“정말요?”

“그럼, 허지만 그 소원은 절대로 남에게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저런! 사람들이 하도 만져서 반질반질하군요.”


기독교 30인의 성인 상중 유독 사람들이 몰려있는 동상이 있다. 얀 네포무츠키 주교의 동상이다. 그 동상을 받치고 있는 청동조각을 사람들이 하도 만져서 반질반질하다. 그런데 이 동상에는 성인 얀 네포무츠키의 숨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어느 날 카렐 4세의 아들인 바츨라프 4세(1361~1419)의 부인인인 소피 왕비는 자신이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을 네포무츠키 신부에게 고백을 했다. 너무 아름다운 왕비가 바람을 피우지 않을까 늘 걱정을 하던 왕은 네포무츠키 신부를 추궁하여 왕비의 고행 성사 내용을 밝히려고 있다. 그러나 네포무츠키 신부는 왕비가 고해를 했던 내용을 끝내 밝히지 않았다. 이에 화가 난 왕은 네포무츠키 신부의 혀를 자르고 돌을 매달아 카를교 위에서 블타바 강으로 던져버렸다. 


한 여인의 고해 성사를 비밀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얀 네포무츠키 신부는 1729년 성인으로 추대되었고,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다. 그러므로 네포무츠키 동상 앞에서는 소원보다는 마음속에 맺힌 앙금을 고해성사를 토해내야 맞다. 신부님은 그 고해성사를 끝까지 비밀로 지켜줄 것이므로. 아내와 나는 차례를 기다려 청동상의 조각을 만지면서 마음속에 맺힌 앙금을 털어내듯 고해성사를 했다. 각자의 고해성사와 소원은 비밀이다. 부조를 쓰다듬는 손의 감촉이 부드러웠다. 신부님이 내 고해성사를 경청하고 끝까지 비밀을 지켜 주시겠지. 고행성사를 하고 나니 카를교를 산책하는 마음이 좀 더 가벼워졌다. 


만지면 행운이 온다는 카를교 성 요한 네포무크 주교의 청동조각. 하도 만져 반질반질하다.

“여보, 우리도 영화 한 컷을 찍어볼까?”

“영화라니요?”

“저 다리 밑으로 내려가 보면 알아요.” 

“하필이면 다리 밑까지 내려가요? 여기서도 좋은데.”

“이왕이면 영화 '프라하의 봄' 주인공 토머스와 테레사가 서있었던 자리에서 우리도 한번 영화 속 주인공이 되어 보는 거요."


나는 아내를 억지로 다리 밑으로 끌고 내려갔다. 그리고 다리 위에서 블타바 강을 내려다보고 있는 젊은 친구를 손짓하며 불렀다. 그는 기꺼이 우리들의 촬영 스텝이 되어주었다. 나는 아내를 끌어안고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포즈를 취했다.


“하하, 멋지지 않소?”

“여보, 좀 젊잖게 굴어요. 남이 보면 웃어요.”

“웃으면 어때요.”

“원더풀! 너무 멋져요!”

“감사합니다.”


서양인들은 무엇이든지 일단 멋지다고 말한다. 어쨌든 그 말을 들은 아내와 나는 괜히 우쭐해지고 기분이 좋아졌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지 않던가? 카를교는 영화 ‘프라하의 봄’을 비롯하여 각종 영화와 CF촬영지로도 유명하다. 영화 ‘프라하의 봄’에서 불량품 같은 바람둥이 남편, 그러나 미워할 수 없는 토머스를 바라보며 안개 낀 카를교 밑에 서서 테레사는 오열한다. 토머스는 이 다리에서 오열하는 테레사를 보고 자신의 삶을 참회한다. 그리고 마침내 테레사의 소망을 좇아 보헤미아 지방 시골로 내려간다. 


농사를 지으며 오랜만에 인간다운 행복한 삶을 살아가던 토마스와 테레사. 그러나 비가 억수로 내리던 날 토머스와 테레사는 함께 살던 농부들과 읍내로 가서 춤을 추고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하여 즉사를 하고 만다. 스케치와 같은 토마스의 인생은 이렇게 허무하게 종말을 고하고 만다. 


밀란 쿤데라는'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속에서 말한다. 인생은 스케치와 같은 것이라고… 어떤 결단이 올바른 것인가를 절대적으로 검토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들의 인생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직접적으로 체험한다. 최초로, 준비도 없이 체험한다. 이는 연습도 해보지 않고 무대에 등장하는 배우와 같다. 하지만 삶을 위한 최초의 시연이 이미 삶 자체라면, 삶은 어떤 가치가 있을 수 있는가? 이러한 근거에서 삶은 언제나 스케치와 같다. 그러나 ‘스케치’ 또한 맞는 말이 아니라는 것. 스케치는 언제나 어떤 것에 대한 초안, 어떤 그림의 준비인 데 반하여 우리들 삶의 스케치는 무(無)에 대한 스케치로 그림이 없는 초안이기 때문이다. 


카를교에서 바라본 블타바 강


따지고 보면 아픈 아내와 함께 무작정 떠난 우리들의 세계일주 여행도 준비가 없는 스케치와 같은 것이다. 아내와 내가 처음 만났을 때 어찌 배낭 하나 걸머지고 지구촌을 여행을 하리라고 미리 스케치를 했겠는가? 그리고 그렇게 건강하던 아내가 이렇게 난치병에 걸릴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그러므로 한 사람의 일생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초인간적인 힘에 의하여 이미 정하여져 있다는 운명론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다르게 변한다는 것이 옳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스케치가 없는 여행… 인생은 흐르는 강물처럼 어디론가 떠나는 여행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허지만 나는 오직 나 한 사람만을 믿고 여행을 떠나온 아픈 여인을 울게 해서는 안 된다. 나는 유유히 흘러가는 블타바 강 바라보며 여행이라는 명약으로 아내의 난치병이 치료되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악기를 연주하는 노인, 카를교

카를교에서 나온 우리는 프라하 성에 진입하기 위해 매트로 A선을 타고 말로스트란스커 역에서 내렸다. 프라하의 매트로 노선은 심플하다. A(초록), B(노랑), C(주황) 선 단 3개뿐이다. 이용하기에 쉽고 요금도 싸다. 역에서 내려 성으로 가는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을 타고 언덕에 오르니 시야가 확 트이고 블타바 강과 프라하 시가지가 한눈에 확 들어왔다. 오색의 가을 단풍에 둘러싸인 프라하 성이 아름답게 보였다.


“너무 아름다워요!”

“우리 걸어오길 잘했지요?”

“그래요. 프라하가 이렇게 아름다울 줄 몰랐어요.” 

“누구와 함께 온 여행인데.”


여행은 누구와 함께 다니느냐에 따라 풍경의 느낌도 달라진다. 여행의 동반자가 중요하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여행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할 때 가장 아름답다! 가을 서정이 깃든 블타바 강과 프라하 성, 그리고 구 시가지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감탄사가 저절로 나왔다. 고성 사이로 낙엽이 흐드러지게 떨어진 고풍스러운 산책길은 모든 것을 잊게 해 주었다. 


프라하 성으로 가는 길


우리는 전망이 좋은 벤치에 앉아 프라하 시가지를 내려다보았다. 아내는 배낭에서 사과 한 개를 꺼냈다. 점심으로 케밥에 포도주를 마신 후, 고성의 언덕에서 디저트로 먹는 사과 한쪽의 맛! 그야말로 꿀맛이다. 우리들이 앉아있는 옆 벤치에는 백발의 노부부가 앉아 다정하게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서로 안아주고, 쓰다듬어 주고, 애무의 키스를 해주고… 아름답게 나이 들어가는 황혼이다! 노부부의 모습은 바로 아름다운 황혼의 장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이 들수록 스킨십을 자주 하라고 했던가? 스킨십을 자주 할수록 황혼이혼은 없다고 한다. 그러니 노인들이여, 나이 들어 갈수록 스킨십을 자주 하라! 끊임없이 스킨십을 주고받던 노부부는 우리와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었다. 웃는 모습이 천진난만하게만 보였다. 


“우리도 저 노인들처럼 포옹을 한번 해볼까?”

“어휴, 대낮에 포옹이라니요.”

“나이 들수록 스킨십을 자주해야 건강해진데. 하하하.”

“아이고, 빨리 일어서기나 해요.”


얼굴이 복숭아 빛처럼 볼그레해진 아내가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노부부는 여전히 서로 앉은 채 스킨십을 주고받고 있었다. 우리는 미로처럼 생긴 고성의 산책로를 오르락내리락하며 서쪽 정문을 통해 프라하 성으로 들어갔다. 푸른 제복을 입은 근위병들이 밀랍 인형처럼 서 있었다. 


성안으로 들어가니 많은 관광객이 붐비고 있었다. 프라하 성은 기네스북에 올라 있을 정도로 유서 깊은 고성이다. 성 안에는 왕궁과 성당이 나란히 서 있었다. 대통령 관저 왼쪽에 있는 마티스의 문으로 들어가니 제2궁정으로 이어지며 바로크 양식의 분수대가 나왔다. 


“히야! 저 탑 좀 봐요!”

"과연 백탑의 도시라는 말이 어울리는군." 


옥수수 콘처럼 생긴 성 비트 성당의 거대한 첨탑


옥수수 콘처럼 생긴 성 비트 성당의 거대한 첨탑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14세기 카를 4세의 명령으로 착공하여 20세기에 와서야 비로소 완공되었다는 성 비트 성당의 위용은 대단했다. 창공에 빛나는 첨탑이 말없이 성당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었다. 성당 안에는 발 디딜 틈도 없이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천장이 엄청 높아요!”

“교회의 고풍스러운 천연색 창과 스테인드글라스도 성스럽기 그지없네요!”


황금색으로 빛나는 높은 천장이 실내를 압도하고 있었다. 스테인드글라스의 긴 창문과 모자이크가 신비감을 더해주고 있었다. 우리는 다리도 쉴 겸 성당 바닥에 아예 주저앉았다. 어디선가 신비로운 파이프 오르간 소리와 함께 성가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잔잔한 성가는 높은 천장에 부딪치며 실내를 휘감아 돌았다. 눈을 지그시 감고 성가 소리에 취한 듯 앉아 있으니 슬슬 졸음이 몰려왔다. 


“당신 또 잠들려고 그러지요. 그만 일어나요.”

“저 파이프 오르간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려오지 않소? 잠시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해 봐요. 오늘 하루 종일 너무 많이 걸었지 않소?”

“그럼, 잠시만 쉬는 거예요?”

“오케이.” 


성 비트 성당의 스테인글라스


아무데서나 앉으면 졸리는 것이 나의 버릇이다. 나의 여행의 비결은 쉴 수 있을 때 잠깐 눈을 붙이는 것이다! 그래서 툭하면 아내의 핀잔을 받는다. 거룩한 밤 고요한 밤! 정말 한 숨 푹 자고 싶다. 아마 잠시만 그대로 두면 난 정말로 잠들고 말 거다. 이 순간이 힐링 순간이 아니겠는가? 내가 정말 잠이 들려고 하자 이를 짐작한 아내가 내 팔을 잡아끌었다. 성당을 나와 구왕궁을 거쳐 황금소로로 이어지는 뒷골목으로 나왔다. 



황금소로에서 길을 잃다


“꼭 달동네 언덕 같군요.”

“아름답지 않소? 사람 냄새가 물씬 나는 구불구불한 이 골목길이 난 좋아요.”

“저 빨간 지붕들도 너무 예뻐요!”


프라하의 황금소로는 좁다. 그러나 예쁘고 아담하다. 그래서 ‘그림 같은 거리’라는 이름이 붙었는지도 모른다. 동화책에나 나올법한 그런 골목과 집들이 언덕에 빼곡히 들어 차 있는 황금소로는 달동네를 연상케 했다. 우리는 점점 황금소로의 매력에 빨려 들어갔다. 작은 가게, 계단에 늘어선 노점상, 예쁘게 가꾼 집들, 그리고 골목에 붐비는 사람들 속에는 사람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여행은 사람과 문화의 만남이다. 아내는 가게마다 기웃거리느라고 정황이 없었다. 


황금소로는 원래 프라하성에서 일을 하는 집시나 하인들이 살았다. 그런데 연금술사들이 차츰 모여들면서 ‘황금소로(Golden Lane)'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성벽의 아치에 붙박이로 지어진 집들은 프라하 성의 수비대원들 숙소였는데, 후에 연금술사들이 이주해와 건물을 개축해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 후 프라하의 빈민과 범죄자들이 모여 사는 빈민가로 전락했다. 세월이 지난 후 옛날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시킨 황금소로는 추억의 거리가 되었고, 수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저 파란 집 앞에는 웬 사람들이 저렇게 많지요?”

“맛있는 카푸치노를 파는 카페가 아닐까?”


커피 생각이 간절했던 나는 따끈한 카푸치노 한잔이 생각이 나서 말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 가보니 푸른 집 대문에는 '22번지'라고 쓰여 있었다. ‘황금소로 22번지’. 당시 보초병이 살았다는 이 작은 집은 체코의 프란츠 카프카가 살았던 집이다. 황금소로가 더욱 유명해진 것은 카프카가 한동안 이곳에서 살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부터다. 카프카는 한 때 막내 여동생 오틀라의 집에서 살았다. 


황금소로에 있는 프란츠 카프카의 집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글을 쓰며 고된 삶을 살아갔던 보험사 직원 카프카… 그는 이 언덕을 오르내리며 프라하 성으로 걸어 다녔다. 푸른색 벽에 ‘22번지’라는 표시와 ‘카프카가 살았던 집’이라는 동판이 붙어있는 곳이 바로 그 집이다. 지금은 카프카 관련 책과 기념품을 팔고 있었다. 


카프카는 유태인의 아들로 태어나 죽을 때까지 프라하에서 살았다. 그의 작품 ‘변신’은 카프카 자신을 그린 듯하다. 소설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리는 카프카 그 자신이다. 열심히 일해 식구들의 생계를 책임지던 청년 그레고르는 어느 날 자신이 커다란 벌레로 변신해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놀란다. 하루아침에 애물단지로 변한 그레고르는 가족들과 사회의 냉대를 받으며 스스로 자학을 하면서 서서히 죽어간다. 카프카는 장남으로서 가족들에게 무시를 당하는 자신의 모습을 작품 속에 투영했는지도 모른다. 카프카는 법학박사로 엘리트였지만 유태인으로 주류 사회에 흡수되지 못하고 폐병에 걸려 41세의 나이로 죽었다. 요양원에서 죽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벌레와 같다고 생각을 했을까?


카프카의 작품은 황금소로의 복잡한 길만큼이나 이해하기 어렵고 난해하다. 토마스 만의 서평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카프카의 작품세계는 비논리적이고 답답한 꿈의 바보짓을 정확히 흉내 냄으로써 생의 기괴한 그림자놀이를 비웃고 있다’  카프카는 수많은 여인들과의 교류, 약혼, 파혼, 기혼녀와의 비극적인 사랑과 더불어 인생의 실패와 방황 속에서도 ‘변신’을 꿈꾸며 유혹의 도시 프라하에서 살아갔다. 


구 시가지에 바라본 프라하 풍경


카프카는 죽기 직전 유서를 통해 ‘자신의 모든 작품을 출판하지 말고 소각해 달라’는 부탁을 그의 친구 막스 브로트에게 했다. 그러나 카프카의 유서를 읽은 막스 브로트는 ‘미안하네, 카프카! 하지만 약속은 지킬 수 없다네’라고 말하며, 카프카의 작품을 출판하였다. 그가 죽은 후에 성(城), 변신, 심판, 실종자 등의 연속 출판으로 카프카는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거, 어디가 어딘지 도대체 길을 찾을 수 없네.”

“사람들에게 물어봐요.”


황금소로의 좁은 골목을 오르내리다 우린 그만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길을 잃고 나서부터 여행은 진짜로 시작된다고 했던가? 이런 거리라면 길을 잃어버려도 괜찮을 것 같다. 출구가 없는 마을, 창문이 없는 작은 집들. 카프카는 출구가 없는 방에서 마음의 창을 열었을까? 많은 여행자들이 프라하 성의 위용에 매료되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고뇌했던 가난한 문학가 카프카의 이야기와 성을 만들고 지켰던 연금술사들과 병사들을 만나기 위해 황금소로를 찾고 있다.      


‘고독하게 혼자 살면서도 때로는 어디엔가 관계를 갖고 싶어 하는 자, 하루 시간의 변화나 날씨의 변화, 직업 관계의 변화 또는 그와 같은 것들을 참작해서 그저 매달릴 수 있는 어떤 팔이라도 보고 싶어 하는 자는 골목길로 난 창문 없이는 도저히 오래 견디어내지 못할 것이다.'  -카프카의 ‘골목길로 난 창’에서-     


프라하 인들은 말한다. ‘카프카는 프라하이며, 프라하는 카프카이다’라고. 그만큼 카프카는 체코인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소설가이다. 프라하에서 카프카의 흔적을 한 번 찾아보는 것은 한 인간의 인간성과 일생, 그리고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여행의 또 다른 진수를 맛볼 수 있다. 이는 마치 사냥개가 토기를 쫓는 재미이며, 골퍼들이 작은 공을 쫓아 잔디와 숲 속을 헤매는 흥미를 느끼게 하는 그런 즐거움이다. 


그러나 그의 소설 ‘변신’만큼이나 변해버린 프라하에서 카프카의 유적을 찾기란 그리 쉽지가 않다. 프라하에 가면 그의 책 ‘변신’이나 ‘성’을 들고 카프카의 흔적을 찾아다니는 카프카 마니아 문학도들도 만날 수 있다. 그들은 카프카 생가, 천문시계 옆에 있는 작은 집, 황금 소로 22번지, 유태인 지구에 이는 카프카 기념비와 카프카의 무덤 등을 숨바꼭질을 하듯 찾아다닌다. 문학도가 아니라도 카프카의 흔적을 찾아보는 것은 프라하 여행의 백미 중의 하나다.     


★인생은 스케치와 같다. 그러나 스케치 또한 어떤 것에 대한 초안일 뿐이다. 그러므로 어떤 결단이 올바른 것인를 절대적으로 검토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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