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찰라 Feb 17. 2019

29. 그들은 더 이상
나비들을 보지 못했다

체코-프라하 유대인 게토와 테레진 수용소

프라하의 유대인지구 게토에 가면 ‘일순간의 행복’을 나비처럼 비상하며 살다 간 흔적을 찾아볼 수가 있다. 게토(ghetto)란 중세 이후 유럽 각 지역에서 유대인을  강제 격리하기 위하여 설정한 유대인 거주지역이다. 프라하 게토에는 두 곳의 시나고그(유대교 회당)가 있다. 핀카소바 시나고그와 클라우소바 시나고그가 그것이다. 


클라우소바 시나고그에는 ‘일순간의 행복’을 영원처럼 살다 간 유대인 어린이들이 그린 그림으로 가득 차있다. 이 아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테레진 수용소에 갇혀 있다가 마루타(Maruta-생체실험대상)로 희생된 아이들이다. 죽음의 행간에서 그린 봄과 꽃, 나비와 새들, 창공을 향해 종이비행기를 날리고 있는 그림, 미래를 노래하는 그림, 새가 되어 하늘을 나는 그림들…. 꿈 꿈 꿈... 희망 희망 희망... 아이들의 꿈과 희망이 점철된 그림을 보고 있으면 저절로 눈물이 흐른다. 


프라하 유대인 게토에 전시된 아이들의 그림들


총성이 횡행하는 전쟁의 소리를 들어가면서도 아이들은 행복한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며 미래를 향한 희망을 노래하고 있었다. 핀카소바 시나고그 내부 벽에는 2차 세계 대전 중 나치의 탄압으로 죽어간 체코계 유대인들의 이름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7만 7천297명"


전 세계 유대인들 중 체코계 유대인들의 희생자 명단이다. 체코계 유대인들은 나치에 의해 강제 연행되어 프라하에서 60km 떨어진 ‘테레진’에 수용되었다가 생체실험실로 보내져 마루타로 죽어갔거나 총살 등으로 끔찍하게 사형을 당했다. 유대 알파벳 순서에 따라 정리된 이름들을 바라보니 현기증이 날 정도로 눈이 어지러웠다. 방문객들 중에는 벽의 이름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조용히 흐느끼는 사람도 있었다. 죽어간 유대인의 후손일까?


시나고그 바로 옆에는 유대인 공동묘지가 자리하고 있다. 특이한 것은 공동묘지에 서 있는 비석들이다. 아무렇게나 어지럽게 늘어서 있는 비석은 마치 죽어간 유대인들의 시체를 연상케 한다. 한 묘지에 평균 7~10구의 시신이 겹겹이 쌓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비석 또한 촘촘히 세울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프라하 시에 사는 유대인들은 이 게토 외의 다른 어떤 곳에도 묘지를 만들 수 없었다. 이곳에는 약 10만 명 정도의 유대인이 잠들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으스스한 묘지를 떠나 파리즈스카(Parizska) 거리로 나왔다. 거리에는 BMW와 벤츠마크를 단 자동차들이 번쩍거리는 호화로운 쇼핑가 앞에 늘어서 있었다. 유대인지구는 이제 고급 브랜드를 파는 멋진 상점들로 가득한 부티 나는 동네로 탈바꿈을 하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또 다른 게토인 테레진(Terezin) 수용소를 방문하기 위해 플로렌스 버스 터미널에서 테레진 행 버스를 탔다. 버스는 1시간 여 만에 테레진에 도착했다. 오늘따라 하늘이 잔뜩 흐려있었다. 


“우리가 마치 유태인 수용소로 끌려 온 기분이 들어요.”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는 길이어서 그런지 나 역시 어쩐지 으스스한 기분이 들어요.” 


프라하에서 베를린 방향으로 60km 떨어진 엘베 강변에 위치한 테레진은 원래 18세기 합스부르크 왕가가 북쪽의 프러시아를 방어하기 위하여 건설한 요새였다. 1940년부터 독일의 나치 정부는 이곳을 정치범 수용소로 만든 이후, 1941년부터 아우슈비츠로 가는 유대인 중간 수용소로 바꾸어 놓았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까지 약 15만여 명의 유대인, 체코인, 슬로바키아의 레지스탕스들을 테레진 수용소에 강제 수용을 했고, 이 중 3만 5000여 명이 이곳에서 죽었다.      

테레진 수용소에서 만난 이스라엘 청년 필과 함께

우리와 함께 버스를 타고 온 여행객 중에는 이스라엘에서 온 필이라는 유태인 청년이 있었다. 역사를 전공한다는 그는 유럽 각지에 있는 유대인 수용소를 돌아보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우리는 그와 함께 강변을 따라 걸어서 수용소에 도착했다. 


수용소 정면에는 나치에 의해 희생된 2만 9천172명을 추모하는 국립묘지가 펼쳐져 있었다. 묘지 중앙에는 거대한 십자가 하나가 외롭게 묘지를 지키고 있고, 묘지 정면에는 두 개의 삼각형을 겹쳐 만든 6각 별 모양을 한 유대인의 상징인 다윗왕의 방패가 묘지를 굽어보고 있었다. 유태인 청년 필이 사진을 찍다 말고 멍하니 묘지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필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필, 혹시 당신의 가족이나 친척이 이곳에 묻혀있는 것은 아닌가요?”

“아니오, 그렇지는 않습니다. 허지만 따지고 보면 이곳에서 무고하게 죽어간 우리 민족이 모두 가족이나 마찬가지이지요.”

“아, 그렇겠군요. 우리나라도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무고하게 죽어간 아픈 상처를 간직한 역사가 있지요.”

“그렇군요. 그럼 우린 비슷한 슬픔을 간직한 민족이군요.”

“그런데 필, 이렇게 무고하게 많은 희생자를 낸 그들이 용서가 되나요?”

“용서요? 글쎄요. 흔히들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아야 한다고 말을 하지만 이곳에는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간 어린이들을 생각하면 도대체 용서라는 단어를 떠올리기가 힘들어요.”


테레진 유대인 묘지에서

그러면서 필은 다시 무덤들을 응시했다. 필의 말이 옳다. 인간으로서 도저히 용남을 할 수 없는 만행을 어찌 용서가 되겠는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수용소에는 14세 미만의 어린이들이 15,000여 명이 넘게 수용되었는데, 전쟁이 끝난 후 살아 돌아온 어린이는 불과 100여 명이 채 되지 않았다고 한다. 묘지에는 고유 번호와 이름이 새겨져 있고, 그 밑에는 사망한 날짜가 기록되어 있었다. 


우리는 오레(Ohre)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 검은색과 하얀색이 대조를 이루는 수용소의 문을 통과해 요새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통과하는 기분이 어쩐지 으스스했다. 어디선가 나치의 군인들이 총구를 겨누고 다가오는 환상이 떠올랐다. 수용소는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개방하는데 현지인 가이드가 상주하고 있었다. 


테레린 유대인 수용소 묘지


벽돌로 지어진 요새는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다. 평탄한 평지에 균형 감각이 잘 이루어진 요새였다. 수용소에는 영화에서 보았던 대로 집단 샤워실과 가스실, 독방들이 있고, 교수대도 있었다. 건물에 1번부터 34번까지 번호를 붙여두고 차례로 견학을 하게 되어 있었다. 


“이곳을 들어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합니다! Never come again!” 


수용소의 가이드는 동굴처럼 생긴 통로로 들어가며 손으로 목을 가르는 흉내를 냈다. 통로는 어두웠다. 긴 통로 중간중간에는 빛이 스며드는 창문이 있었다. 이 통로는 적의 공습에 대한 대피소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유대인을 총살을 할 때 이 통로를 통해 총살 장으로 데리고 갔다고 했다. 어두운 통로 끝에는 꽤 넓은 총살장이 나왔다. 총살의 벽인 이곳 27번 벽에서는 7,000명 이상의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이 총살로 처형되었다고 한다. 


테레진 유대인 수용소


테레진 수용소에는 1945년 패전으로 독일군이 후퇴를 하며 미처 러리를 하지 못했던 어린이들의 그림 4,000여 점이 발견되었다. 이 그림들은 프라하 유대인 케토 박물관과 테레진 게토에 전시되고 있다. 그림을 보고 있으면 공포 속에서도 꿈과 희망을 안고 그림을 그렸을 어린 고사리 손들이 저절로 떠오른다. 이 아이들의 그림과 시를 담은 책이 '더 이상 나비를 보지 못했다(I never saw another butterfly)' 제목으로 우리나라에도 출간되어 있다. 그중에 파벨 프리드만이 쓴 시를 하나 소개해 본다.


'마지막, 정말 마지막/ 그렇게 선명하고, 밝은, 눈부신 노랑/ 태양이 흘린 눈물이 흰 바위로 떨어지며 노래한다면 그럴까// 그렇게, 그렇게 노란 것이/ 가볍게 위로 휙 날아올랐다/ 떠나 버린 것이 분명하다/ 세상에 작별인사 키스를 하고 싶어 했으니까// 일곱 주 동안  나는 여기에 살았다/ 이 게토 안에 갇혀서/ 하지만 이곳에도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있었다/ 민들레는 나를 부르고/ 뜰의 밤나무는 가지를 뻗는다/ 하지만 더 이상 나비들을 보지 못했다// 그 나비가 마지막이었다/ 나비들은 여기 살지 않는다. 여기 게토에는'

-파벨 프리에드만, 1942.6.4, '더 이상 나비들은 보지 못했다' 중에서.



이 시를 쓴 파벨 프리드만(Pavel Friedmann)은 테레진에 설치한 수용소에 갇힌 어린이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았다. 1921년 1월 7일에 태어난 파벨은 1942년 테레진으로 이송되었다가 1944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죽었다. 테레진 수용소에 갇힌 아이들은 그토록 가까이 있었던 죽음보다도 봄과 꽃, 나비와 새들에 대한 꿈과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림 속에는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작은 영혼이 느끼는 불안과 공포를 드러내기도 한다. 부모와 격리되어 수용소에서 비참하게 죽어간 어린 생명들. 그러나 그들이 그렸던 것은 절망이 아니라 ‘일순간의 행복’을 '영원한 행복'으로 이어주는 나비와 새들이었다. 


“여보, 너무나 참혹한 수용소의 공포스러운 풍경에 현기증이 나요. 이제 빨리 테레진을 벗어나고 싶어요.”

“으음, 그런데 한번 들어오면 다시는 돌아가지 못했던 사람들의 심정은 어떠했겠소?”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쳐요!"


아내는 테레진 수용소의 공포스러운 풍경에 소름이 돋아 현기증이 난다고 했다. 우리는 더 이상 비극의 현장에 있기가 어려웠다. 테레진에서 버스를 타고 다시 프라하로 돌아오니 프라하 성에 노을이 아름답게 드리워지고 있었다. 우리는 마치 테레진 수용소에서 극적으로 탈출한 사람들처럼 안도의 숨을 쉬며 유혹의 도시 프라하의 품에 안기고 있었다. 


유혹의 도시 프라하의 밤


“여보, 괜히 우울해요.”

“그 우울증엔 체코의 황금맥주 한잔을 마시는 게 최고의 명약이라오.” 

"황금 맥주요?" 

"황금맥주 원조인 필스너 우르겔이란 맥주가 이곳 프라하에 있어요." 


플로렌스 버스 터미널에서 필과 헤어진 우리는 구시가지 노천카페로 갔다. 천문시계 앞에는 밤인데도 더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프라하의 밤은 화려하다. 프라하 성에 황혼이 물들어 가면 여행자들은 프라하의 밤을 즐기기 위하여 더욱 부산해진다. 앞치마를 두른 여자 종업원이 웃으며 다가왔다. 


“필스너, 플리스.”

“오케이!”


우리는 갈증도 해소하고 테레진의 악몽도 떨쳐버릴 겸 체코의 황금맥주 필스너를 한 병을 주문했다. 


“정말 맥주 빛이 완전히 황금 색깔이군요!”

“황금 맥주는 체코가 원조라고 해요.”

“정말요?”

“그럼! 자, 우리도 체코의 황금맥주 거품을 한번 마셔볼까? 프라하의 멋진 밤을 위하여 건배!”

“건배!” 


우리는 쌉쌀하고 맛이 깔끔한 황금맥주 한 잔으로 갈증을 풀었다. 테레진의 악몽이 맥주 거품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았다. 사람의 마음이란 참으로 간사하다. 그리고 눈 앞에 펼쳐진 풍경에 따라 사람의 마음은 시시각각으로 변한다. 황홀한 프라하의 야경을 바라보며 황금맥주 한잔을 마시자 공포스러운 테레진의 풍경은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체코의 황금맥주 필스너 우르겔

"인생은 맥주 거품과 같지 않을까?"

“글쎄요?”

"맥주 거품처럼 부풀어 올랐다가 거품처럼 사라져 버리는 것이 인생이 아니겠소?"

"인생을 맥주 거품에 비교하는 건 너무 싱겁고 슬퍼요."

"하하, 그럴지도 모르지……."


체코는 어디를 가나 맥주가 나온다. 오히려 ‘맥주의 나라’ 독일보다 1인 평균 맥주 소비량이 더 많다고 한다. 맥주를 마시고 나니 한결 기분이 부드러워지고 프라하의 밤이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여보, 이제 어디로 가지요?”

“다 생각해 둔 게 있어요.”

“뭔데요?”

“일단 따라와 봐요.” 


프라하에서는 모차르트의 오페라 인형극 ‘돈 조반니’를 놓쳐서는 안 된다. 프라하에서만 즐길 수 있는 인형극이기 때문이다. 돈 조반니 인형극은 프라하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인형극장인 '국립 마리오네트 인형극장(National Marionette Theatre)'가 압권이다. 


“여긴 뭐하는 곳이지요?”

“모차르트 돈 조반니를 공연하는 인형극장이라오.”

“우와! 재미있겠군요. 그런데 비싸지 않을까요?”

“아무리 비싸더라도 여기까지 와서 모차르트 돈 조반니는 놓칠 수는 없지.”


프라하의 밤 풍경


프라하는 음악의 도시다. 

음악의 도시에 와서 오페라든 인형극이든 콘서트든 뭔가 한 가지라도 관람하며 프라하의 밤 문화에 젖어보는 거다. 우리는 어젯밤 뮤니시펄 하우스에서 비발디의 4계를 감상했었다. 1인당 600 코루나 입장료를 400 코루나로 깎아서 샀다. 프라하에서 공연 티켓을 싸게 구입하는 방법은 공연 당일 날 극장 매표소에서 입석 티켓을 직접 흥정하여 구입하는 것이다. 팔다 남은 공석을 마지막으로 팔기 때문에 거의 절반 가격에도 들어갈 수 있다. 처음에는 무조건 안 된다고 하지만 공연시간이 임박하여 몇 번 왔다 갔다 하면 그들도 남은 좌석을 싸게 팔게 마련이다. 


그런데 국립 마리오네트 극장은 요금 흥정이 잘 되지 않았다. 허지만 프라하에서 200여 년 전에 초연된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를 놓치기가 아까웠다. 980 코루나를 주고 티켓을 샀다. 이 극장의 돈 조반니 인형극은 1991년부터 공연을 시작하여 3천 회가 넘었다고 했다.   

  

인형극의 내용은 잘생긴 부자이면서 바람둥이인 주인공 돈 조반니가 끊임없이 여성을 유혹하고 배신을 하다가 결국에는 벌을 받게 된다는 줄거리다. 주고받는 대화는 잘 알아들을 수 없지만 모차르트의 유명한 곡들과 함께 줄기차게 움직이는 인형들의 우스꽝스러워 관람객들은 폭소를 터트렸다. 


“세상의 남자들은 다 바람둥이야.”

“남자들이 바람둥이가 아니라면 세상의 여자들은 모두 홀로 살고 있을 텐데.”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꽃과 나비가 그걸 증명하고 있지… 하하.” 


밤이 늦는데도 구시가지의 기념품점에는 여행객들로 가득 붐비고 있었다.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프라하의 뒷골목길 풍경은 밤새 걸어 다녀도 싫증이 나지 않는 거리였다. 끝없이 늘어서 있는 기념품점은 휘황한 불빛과 함께 여행객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프라하의 밤


아내는 인형극보다 아이쇼핑이 훨씬 재미있는 듯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모르고 이 가게 저 가게를 돌아다녔다. 깜찍한 작은 인형을 고르고, 엽서와 이미테이션 호박 반지도 하나 골랐다. 우리나라 돈으로 치면 몇 천 원에 해당하는 헐값이지만 아내는 쇼핑의 재미가 쏠쏠한 모양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왕방울만 한 보석을 아내의 팔과 목에 걸어주고 싶은데 가난한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이미테이션을 들고 불빛에 비추어 보는 아내의 모습이 마냥 즐거워 보였다. 길을 잃어버려도 즐거운 프라하의 밤거리는 그렇게 깊어 갔다.


★눈 앞에 펼쳐진 풍경에 따라 사람의 마음은 시시각각으로 변한다. 황홀한 프라하의 야경을 바라보며 황금맥주 한잔을 마시자 공포스러운 테레진의 풍경은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28. 프라하, 황금소로에서 길을 잃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