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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라 Feb 26. 2019

30. 쇼팽과 천재 피아니스트 스필만

폴란드-바르샤바

프라하 중앙역 21시 12분 발 2등 칸. 아내와 나는 프라하에서 밤기차를 타고 바르샤바로 향하고 있었다. 기차는 기적소리도 없이 유혹의 도시 프라하를 슬그머니 미끄러져 나갔다. 도심을 빠져나가자 이내 어둠이 깔리고 차창에는 쇼팽의 야상곡이 환상적으로 흘러내렸다. 나는 문득 차창에 부서져 내리는 쇼팽의 멜로디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바르샤바의 한 천재 피아니스트와 조우하고 있었다. 우리가 바르샤바로 향하는 것은 쇼팽의 피아노 음악만을 연주하는 한 천재 음악가의 일생을 다룬 영화 한 편에서 느낀 감동 때문이었다. 


그의 이름은 ‘블라디슬라프 스필만’. 스필만을 처음으로 만난 것은 영화 ‘더 피아니스트(The Pianist)’란 은막에서였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 영화 피아니스트는 잔혹한 나치시대에 기사회생으로 살아남은 한 유태인 천재 피아니스트의 절박했던 일생을 영상에 담은 것이다.   


'The Pianist'의 한 장면


이 영화는 나치나 반 나치, 즉 지금까지 어떤 이념이나 도덕적으로 포장된 과거의 통례를 따르지 않고 있었다. 전쟁과 잔혹한 학살 속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생존해야 한다는 절박한 인간의 본능, 그리고 구구한 자기변명이 절제된, 살아남은 자의 담담한 일생을 있는 그대로 그려낸 영화다. 러시아군에게 패에 퇴각하는 독일군 장교는 마지막으로 스필만을 찾아와 굶주린 그에게 먹을 것을 주고, 그의 코트까지 벗어준다. 너무나 감동한 스필만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윽고 말한다.


“이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신께 감사하게. 모든 게 신의 뜻이고… 우린 그렇게 믿어야지….” 


이 순간의 공간에는 아군과 적군, 좇는 자와 도망자는 없다. 오직 인간 대 인간, 음악, 그리고 그들 서로를 보듬어 주는 인간의 따뜻한 마음이 존재할 뿐이다. 그 따뜻한 인간애가 신의 마음이 아니겠는가! 


영화는 대사가 별로 없다. 총성, 포화, 침묵 속에 조용히 전개될 뿐. 간혹 가다가 쇼팽의 음악이 배경에 깔린다. 굳이 무엇을 변명하려 들지 않고, 강요하지도 않는다. 그 절제되고 조용한 장면이 오히려 관객의 심금을 울린다. 유대인을 이 잡듯이 샅샅이 뒤져 무자비하게 학살을 하는 나치의 손아귀에서 스필만은 어떠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살아야 했다. 그리고 살아났다. 6년간의  긴 지옥 같은 폐허 속에서 그는 쥐를 잡아먹는 등 야수처럼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는 목숨을 구걸했던 자신을 그 어떤 것으로도 변명하지도 표현하지도 않는다. 


살아나서 다시 본래의 피아니스트 자리로 돌아간 스필만은 굶주림으로 아사 직전에 있던 자신에게 음식을 주고 코트를 벗어 주던 그 독일군 장교가 포로로 잡혀있었던 현장까지 간다. 그러나 스필만을 만나면 도와달라고 말을 전한 그 독일군 장교는 이미 그곳에 없었다. 


누구나 스필만처럼 생과 사의 극한 기로에 서 있게 된다면 어떻게 처신을 할 것인가? 야수처럼 살아나야겠다는 스필만의 솔직하고 담담한 심정이 인간의 본능이 아니겠는가. 그곳엔 나치와 반 나치가 없다. 오직 생과 사의 본능만 존재할 뿐이다. 살아있다는 존재에 대하여 항상 신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     


바르샤바 문화과학궁전


프라하 중앙역을 출발하여 밤새 기차를 타고 온 다음날 아침 7시. 우리는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 도착했다. 동유럽의 내륙에 위치한 동토의 땅 폴란드는 겨울이 일직 찾아온다. 춥다. 오늘 밤 숙소로 찜해둔 유스호스텔은 중앙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밤새 흔들리는 기차를 타고 온 탓인지 피곤하고 배낭이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프라하에서 무려 10시간이 넘게 달려왔으니 아무리 기차여행에 익숙하다고 할지라도 무리가 따르는 것은 당연했다. 몸이 불편한 아내가 걱정이 되었다. 아내는 파김치가 된 듯 피곤해 보였다.   

   

센트럴 역에서 내려 밖으로 나오니 하늘을 찌르는 건물이 유독 눈에 띄었다. 스탈린이 세운 문화과학궁전이다. 스탈린은 언젠가는 폴란드로 다시 돌아올 것을 다짐하며 이 건물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폴란드인들은 침략자가 건축한 건물이라고 해서 '구소련이 만든 바르샤바의 무덤'이라고 부른다. 


호스텔에 들어서니 안내 데스크의 직원이 어쩐지 냉랭해 보였다. 그날따라 지방에서 올라온 중등학생들로 호스텔은 초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아내는 긴 여행에 지쳤는지 호스텔 데스크 앞 의자에 기대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가까스로 방을 배정받아 키를 받아 들고 아내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짐을 풀어놓은 나는 공동욕실로 샤워를 하로 갔다. 아내는 그냥 침대에 길게 누워 버렸다. 


호스텔은 학생들의 떠드는 소리로 시끌벅적했다. 한숨을 자고 난 아내는 다시 기운을 차린 듯 거리로 나가자고 했다. 호스텔을 나온 우리는 중앙역 앞 거리에서 트램을 타고 신세계 거리를 지나 왕궁이 있는 구시가지로 향했다. 최고급 부티크가 모여 있는 파스텔 톤의 신세계 거리를 지나 왕궁이 바라보이는 거리에서 내렸다. 우리는  구 시가지를 걷기 시작했다. 


“저 인어공주는 코펜하겐의 인어공주 하고는 완전히 다르게 보이는군요.”

“칼과 방패를 들고 있는 인어 공주네!"


칼과 방패를 든 인어공주(바르샤바 중앙광장)


중앙광장에는 칼과 방패를 든 인어공주가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착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행운이 깃든다'는 전설을 가진 인어동상은 바르샤바의 수호신으로 평화와 번영을 상징하고 있다. 그러나 평화와 번영을 상징하는 인어조차 창과 방패를 들고 전투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모습은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우리는 구시가지 광장을 돌아 쇼팽의 심장이 안치된 ‘성 십자가 교회’로 갔다. 


“이 교회에 쇼팽의 심장이 진짜 있어요?”

“나도 잘 몰라요. 들어가 보면 알게 되겠지요.”

그러나 교회 안에서 쇼팽의 심장이 안치된 곳을 찾기란 쉽지가 않았다. 우리는 교회 안에 들어가 쇼팽의 심장이 보관된 장소를 찾지 못해 결국 안내인에게 갔다.

“쇼팽의 심장은 바로 저 중앙에 있는 기둥 안에 있습니다.”

“아!”

“기둥 안에 사람의 심장을 안치하다니…” 


쇼팽의 심장이 안치된 성 십자가 교회


아내는 믿기지 않는 듯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쇼팽은 프랑스에서 사망했지만 후일 그의 여동생이 쇼팽의 심장을 가져와 그의 조국에 안치하였다고 한다. 기둥 안에 그의 심장이 안치되어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성 십자가 교회를 나와 쇼팽 박물관 쪽으로 걸어가는데, 택시들이 부자를 요란하게 울려대고 있었다. 수많은 택시들이 일렬로 서서 지나가며 부자 소리를 냈다. 왜 그러느냐고 물어보니 운전수들이 월급 인상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고 했다. 부자 소리가 어쩐지 슬프게 들렸다. 


바르샤바는 제2차 세계 대전 때 도시의 80% 이상이 나치의 폭격으로 파괴되고, 시민의 3분의 2 이상이 나치의 폭력으로 살해당하는 끔찍한 참상을 간직한 20세기 최대 비극의 도시다. 바르샤바 유태인 지구 게토에는 나치에 항전했던 영령들을 위한 영웅 기념비가 있다. 여기에 수용되었던 유태인들이 스스로 무기를 들고 나치에 도전했으나 완패하여 전원 가스실로 보내져 사살되었다. 이 영웅들을 위하여 세워진 기념비는 아이러니컬하게도 히틀러가 승전 기념비를 세우려고 했던 돌로 새겨 만든 것이라고 한다. 역사의 수례 바퀴가 이 세상의 기념비를 허구로 만들어 버리는 경우다. 


어제의 영웅 기념비가 오늘 헐리게 되는 비운의 세계사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공산주의의 영웅 레닌과 스탈린의 동상도 헐렸다. 600만 유태인이 아우슈비츠 등 유럽 각지의 수용소로 내몰리어 학살을 당했던 암울한 시기에도 위대한 이스라엘 건설을 주창했던 시오니스트들이 나치의 친위대 조직들과 협력했다는 증거들이 있다. 폭력은 폭력을 낳고 집단이기주의는 또 다른 폭력을 낳는다.   

   

택시운전사들의 집단적인 부자 소리가 거리를 시끄럽게 했다. 더 이상 바르샤바의 거리를 걷고 싶지가 않았다. 어제부터 아내는 몸 컨디션이 썩 좋지가 않았다. 우리는 젤라조바 볼라에 있는 쇼팽의 생가를 가는 것을 포기하고 유스호스텔로 돌아왔다. 그러나 유스호스텔의 현관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쓸쓸하게 보이는 바르샤바의 거리


“5시까지는 청소시간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하네.”

“그래도 사정을 좀 해봐요. 너무 피곤해서 제발 좀 누워있고 싶어요.”


현관문에 달려있는 도어폰으로 문을 좀 열어달라고 전화를 했지만, 역시 대답은 안 된다는 쌀쌀한 호스텔 여직원의 메아리만 들려왔다. 아내가 몸이 아파서 그러니 부탁을 해 보았지만 역시 대답은 같았다. 


날씨는 춥고 아내는 안색이 좋지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근처에 있는 카페로 들어갔다. 카페에서 커피 한잔을 마시고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오후 5시가 되어서야 우리는 호스텔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아내는 냉랭한 바르샤바를 빨리 떠나자고 했다. 인정머리가 없는 호스텔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날 아침 우리는 크라쿠프로 가기로 했다. 바르샤바에서 크라쿠프로 가는 열차는 매 시간마다 있었다. 다음 날 오전 9시, 우리는 바르샤바 중앙역에서 크라쿠프로 가는 급행열차를 탔다. 


을씨년 스러운 바르샤바 거리에서


★살아있다는 존재에 대하여 항상 신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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