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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라 Mar 01. 2019

31. 아우슈비츠 수용소에도
행복은 있었다?

폴란드-아우슈비츠 수용소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가는 기차


“아우슈비츠의 굴뚝에서조차도 고통들 사이로 잠시 쉬어가는 행복이 있다. 사람들은 모두 내게 가장 끔찍한 일에 대해서만 묻는다. 그래, 난 사람들이 내게 묻는다면 다음엔 강제수용소의 행복에 대해서 말할 것이다.”

 -임레 케르테스 작, <운명>에서-     


프라하에서 크라쿠프로 가는 기차에서 나는 임레 케르테스의 소설 <운명>을 읽고 있었다. 1929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유대인의 아들로 태어난 케르테스는 1944년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가 1945년 기사회생으로 풀려났다. 그리고 나치 치하의 강제수용소에서 인간이 야만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생존하는지, 극한 상황에서 인간의 본성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탐구하여 <운명>이란 작품에 그려 넣었다. 그의 첫 소설이자 대표작인 <운명>은 15세 소년이었던 그가 수용소 체험의 고통을 감수하고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그는 이 작품으로 200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기차를 타고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가는 소설 속의 15세 소년 죄르지(케르테스 자신)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기약이 없는 길을 말이다. 사람들에게는 과연 저마다의 ‘운명’이 정해져 있을까? 일테면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는다'는 인간의 숙명 같은 운명이 말이다. 내가 아픈 아내와 함께 힘든 여정을 다니는 것도 다  미리서 정해진 운명이란 말인가. 


크라쿠프 중앙역


케르테스는 말한다. 죄르지에겐 정해진 운명이 아니라 매 순간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가능성만이 존재한다고. 이처럼 인간에게는 미리 정해진 운명이 없기 때문에 소년 죄르지는 자기 자신이 곧 운명이라고 받아들인다. 이는 보편적으로 지난 일들을 돌이켜보며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서 ‘운명’이라고 치부하며 체념적으로 받아들이는 운명론과 반대되는 개념이다. 


이는 유대인 종교관에서 바라보는 ‘신의 섭리’,  불교에서의  ‘인과응보’ 논적인 입장과도 다르다. 죄르지 소년은 먼 미래의 일을 계획하고 고민하는 대신, 눈앞에 닥친 일에 좋은 뜻으로 몰두하며 수용소 생활에 맞추어 최대한 처신을 다한다. 그래서 그는 수용소에서의 끔찍한 체험을 거치고 마침내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간다. 


케르테스의 ‘운명’은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 회자되었던 아우슈비츠 수용소 내용과는 사뭇 다르다. 쉰들러 리스트에서는 악을 저지르는 나치와 선하게 당하기만 하는 유태인의 처지를 ‘선과 악’의 저편에서 선명하게 구분하여 부각하고 있는 반면, 케르테스는 수용소 생활을 있는 그대로 담담해 그려내고 있을 뿐이다. 


"나는 살아있다. 살아남기 위하여 모든 관점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이제 내가 가게 될 길 위에 피할 수 없는 덫처럼 행복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임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아우슈비츠의 굴뚝에서조차도 고통들 사이로 잠시 쉬는 시간에 행복과 비슷한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죄르지 소년의 운명론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를 한다. 따지고 보면 아내가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다시 기사회생으로 살아나 이렇게 아픈 몸을 이끌고 여행을 하는 것도 우리가 선택한 운명이기 때문이다.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경이로운가. 그리고 살아서 자기가 선택한 길을 갈 수 있다는 것 또한 최대의 축복이다.  병상에서 생명이 일각에 달려 허덕이는  아내 곁에서도 나는 순간순간 행복을 느끼기도 했다. 아내가 아프지 않았더라면 언제 내가 그토록 아내 곁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었겠는가. 물론 그 짧은 순간들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힘들고 아파 누워있는 아내가 원망스럽기조차 했으니까.... 


인간에게 순간순간 일어나는 일들을 운명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체념적인 삶이라는 것을 나는 느꼈다. 찰나의 순간에, 주어진 환경에 무엇인가에 열중하는 모습, 이는 케르테스가 말한 '운명'은 '자기 자신'이다라는 것과 합치한다. 즉 자기 스스로가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간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가는 철로


이번 세계일주 중 동유럽 여행의 테마는 나치와 유대인의 관계이다. 나치는 왜 유태인을 그렇게 학살해야 했으며, 유태인들은 또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을까? 이 문제는 암스테르담에서 기차를 타고 북유럽으로, 핀란드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로, 그리고 동유럽 패스로 베를린과 프라하, 바르샤바 그리고 지금 크라쿠프로 가는 기차에서도 풀릴 수 없는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어떤 사람은 증오와 저주라고 풀이했다. 그러나 증오와 저주만으로 그토록 많은 600만의 유태인을 학살해야 했다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다. 그 누구도 아직 그 대학살의 근저를 찾지 못하고 있다. 아니 영원히 숙제로 남을지도 모른다. 


유럽의 전역에는 나치에 저항했던 레지스탕스를 기념하는 박물관이나 유적지가 산재해 있다. 반면에 동유럽에는 유대인들이 거주하는 게토와 강제수용소가 있다. 프라하의 게토와 테레진 강제수용소에서 본 수용소 아이들이 그린 그림과 희망의 노래, 그들은 고사리 손으로 그린 그림에서 다시는 나비를 볼 수 없다고 부르짖었다.


바르샤바의 게토와 천재 피아니스트 스필만은 야수가 되더라도 살아남아야 한다고 몸부림쳤고, 그리고 그는 살아났다. 나치 시대 이후에 갈라진 베를린 장벽의 비애와 무너진 장벽에 드리워진 빛과 그림자… 이는 마치 유태인을 학살한 나치의 인과응보적인 결과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임레 케르테스의 소설을 읽으며 나치와 유대인들 사이에 벌어진 간극 속에서 같은 인간으로 태어난 사람들의 운명이 도대체 무엇인지, 어떻게 변하는지 크라쿠프로 가는 기차에서 내내 머릿속을 맴돌고 있다. 


크라쿠프 중앙역, 오시비엥침으로 가는 완행열차에 오르며..


오전 11시 35분. 기차는 예정시간대로 폴란드 크라쿠프 중앙역에 도착했다. 우리는 플랫폼에 연결된 지하보도로 내려갔다. 피곤에 찌든 육체에 무거운 배낭을 걸머지고 가다 보니 우리는 마치 수용소로 끌려가는 유대인 행색과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하보도 한 구석엔  짐을 맡기는 라커가 준비되어 있었다. 


“여기서 바로 아우슈비츠로 가는 기차가 있다는데 당신 컨디션이 괜찮아요?”

“한 숨 자고 났더니 많이 좋아졌어요.”

“그럼… 큰 배낭을 라커에 맡기고 바로 아우슈비츠행 기차를 타는 게 어떨까?”

“좋아요. 그렇게 하지요.”

“너무 피곤하지 않을까?”

“그래도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꼭 가보고 싶은 곳이니 지금 가지요.”


아내를 로커 박스 앞에 기다리게 하고 나는 매표소로 갔다. 마침 10분 후에 오시비엥침(아우슈비츠의 폴란드 지명)으로 가는 완행열차가 있었다. 기차표를 산 나는 아내에게 뛰어가 큰 배낭을 라커에 맡기고 오시비엥침(Oswiecim)으로 가는 플랫폼으로 올라갔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바친 붉은 장미 한 송이


드디어 아우슈비츠로 가는 기차가 출발했다. 열차 내에는 가난한 폴란드인들로 가득 차 있었다. 완행열차는 역마다 정차를 했다. 하늘은 회색으로 물들어 있고, 어디선가 생선이 타는 듯한 냄새가 차창으로 스며들었다. 


"장미를 든 저 청년의 표정이 어쩐지 서글퍼 보이는군요."

"아마 그의 조상 중에 아우슈비츠에서 죽었던 사람이 있지 않을까? 그런데 우리가 아우슈비츠로 끌려가는 기분인데… 아우슈비츠로 가는 당신 소감은 어때요?”

“전 그저 소름이 끼칠 따름이에요.”

“그럼 가지 말걸 그랬나요?”

“그래도 역사의 현장을 가 봐야지요.”


장미꽃 한 송이를 들고 아우슈비츠로 가는 한 청년


나 역시 소름이 끼쳐 왔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동시대의 일어난 일이 아닌가.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 학살이 자행될 때에 우리나라에서는 해방되기 전후의 불안한 정국과 곳곳에서 빨치산 전투가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6.25의 비극이 이어졌다! 


우리 바로 옆 좌석에는 장미꽃 한 송이를 차창에 놓아둔 채 한 청년이 눈을 감고 있었다. 그도 아마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가는 모양이었다.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지만 눈의 감고 있는 그를 깨우기가 미안했다. 장미꽃과 아우슈비츠! 빨간 장미꽃 한 송이를 든 청년의 표정이 우수에 젖어있었다. 그의 할아버지일까 할머니일까? 누군가가 아우슈비츠에서 죽은 것만은 틀림없으리라. 열차가 역마다 정거를 하자 아내는 다시 피곤한 듯 눈을 감았다. 빛바랜 의자에 모자를 덮고 길게 누워있는 아내는 무척 지쳐 보였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가는 오시비엥침 역


아우슈비츠로 가는 기차 길마저 냉랭하고 싸늘하게만 느껴졌다. 아우슈비츠에 다가 갈수록 어깨가 움츠러드는 기분이었다. 기차는 2시간 여 만에 ‘오시비엥침’ 역에 도착했다. 역에서 내리니 비가 한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오시비엥침 역에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가는 셔틀버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우리는 수용소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유대인들이 가장 가기 싫어하는 인간 살인 공장으로 가는 길을 우리는 가고 있었다. 아우슈비츠는 오후 4시에 문을 닫는다. 붉은 장미 한 송이를 든 청년도 우리와 같은 버스에 서둘러 올랐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정문. '일하면 자유로워진다'는 슬로건이 아직도 걸려 있다.


수용소 정문에 도착을 하니 ‘일하면 자유로워진다(ARBEIT MACHT FREI)'는 녹슨 나치시대의 간판이 아직도 바람에 흔들리며 을씨년스럽게 걸려 있었다. 수용소 정문을 통과하여 수감자들의 사진을 걸어놓은 복도에 도착하니 어느 소년과 중년 부인이 장미꽃을 꽂아둔 사진 앞에서 서로 포옹을 하고 흐느끼고 있었다. 소리 없는 통곡! 저 사진의 대상은 아마 소년의 할아버지쯤 되지 않을까? 


“저기 저 사람들 흐느끼고 있군요.”
“내가 보기엔 소리 없는 통곡을 하고 있어.”


아우슈비츠 수용소 희생자 사진에 걸린 장미꽃


우용소 복도에 진열된 희생자들의 사진             


넓은 들판에 철조망으로 굳게 둘러쳐진 수용소의 외양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름이 없는 모습일 것이다. 임레 케르테스의 소설 '운명'은 그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부다페스트에서 어느 날 아침 강제노동을 하러 버스를 타고 가다가 불심검문에 걸려 이곳 아우슈비츠까지 끌려온 죄르지는 가족에게조차 어디로 간다는 한 마디의 소식을 전할 수도 없었다. '누구나 일해야 돼. 지쳐 보여서도 안 되고 아파서도 안 돼.' 불과 15세 소년이었던 그가 아우슈비츠 기차에서 내려 수용소 유대인들로부터 처음으로 듣는 말은 ‘나는 열여섯 살이고,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하라는 것’이었다. 지쳐 보이거나 아파서 일을 할 수 없으면 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것. 


내가 만일 15세 소년으로 이곳에 끌려 왔다면 어떻게 처신을 할 것인가.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처지는 일이다. 세기의 폭력 앞에 절대복종으로 무기력해야만 하는 암담한 수용소의 비극 앞에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복도의 사진 앞에서 소리 없이 흐느끼고 있는 유대인의 후예들. 아우슈비츠의 비극은 아직 끝나지 않고 있었다. 저 사진 위에 결려진 장미꽃의 헌사가 죽은 자와 살아남은 가족들의 마음을 보상해줄 수 있을 것인가? 


“역사에 눈감는 자 미래를 볼 수 없다.” 


1970년 12월 7일 빌리브란트 서독 수상은 폴란드 바르샤바 유대인 게토에 있는 유대인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고 통곡을 하며 나치의 유대인 학살과 폴란드 점령에 대하여 진심으로 사죄를 하였다. 그는 이러한 역사적인 화해와 참회로 1971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바이츠체커 전 독일 대통령은 ‘과거에 대해 눈감는 자는 결국 현재에 대해서도 눈멀게 된다’고 하며 독일인들의 참회를 촉구했다. 독일인들은 1995년 1월 27일을 강제수용소 해방 50주년을 맞이하여 과거의 잘못을 기억하는 날로 지정하고 있다. 독일은 전후에 이스라엘과 배상 협정을 맺고 국가배상금 250억 마르크, 나치 피해자 유가족 배상금 150억 마르크, 희생자 개벽 배상금 750억 마르크 등 2000억 마르크(약 120조 원)에 해당하는 배상을 했다. 그러나 이웃나라 일본은 어떠한가?    


전류가 흐르는 수용소 철책

 

그들은 참회와 배상은커녕 오히려 A급 전범 군신들을 묻어놓은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를 하며 군국주의 부활을 꿈꾸고 있다. 전후 미국의 치마폭에서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일본은 과거의 기억과 청산을 회피하고 오히려 숨기려 하고 있으니 독일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어떤 역사가는 이를 두고 독일은 기독교적인 ‘죄의 문화’로 받아들이는 반면, 일본은 아시아적인 ‘문화적 수치’로 여기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 태국, 미얀마, 싱가포르 등 아시아를 여행하는 동안 내내 일본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음을 피부로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여전히 뻔뻔하다. 뉘우치기는커녕 오히려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고 있으니 아연실색을 금치 못할 일이다. 그들이 과거의 전쟁을 부끄러워하며 진심으로 참회의 눈물을 흘릴 날은 언제나 올 것인가? 우리는 국민과 정치인 기업인이 함께 뭉쳐 경제력과 국방력을 키워 다시는 일본이 우리를 얕보거나 침략 근성을 갖지 못하도록 국력을 키워야 한다. 오늘날 이스라엘이 독일로부터 천문학적인 배상을 받아내는 것은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 엄청난 유대인의 파워가 두려워서가 아닐까?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1940년 폴란드 정치범을 수용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당초에는 폴란드인 학살 장소로 이용할 계획이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전 유럽인들, 특히 유럽 각국에서 각각의 국적을 얻은 유대인, 집시, 소련군 포로들을 이곳에 보내오기 시작하였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풍경


입구에 들어서면 안내소와 기록영화 상영관이 있고, 입장료는 무료다. 다만 기부함이 있는데, 여행자들은 대부분 기부함에 약간의 기부금을 넣고 간다. 수감자들이 강제노동에 나가고 들어 올 때에는, SS대원이 수감자들의 행진을 용이하게 통제할 수 있도록 취사장 옆 광장에서 수용소의 전용 오케스트라가 행진곡을 연주했다. 


전시장은 일반 전시장, 국적별 전시장, 주요 시설별로 나누어져 있다. ‘일반 전시장’으로 4블록(전멸), 5블록(범죄 증거), 6블록(수감자들의 생활), 7블록(위생상황), 11블록(죽음의 블록)이 있다.


제2화장터 가스실에서는 샤워를 한다는 SS대원의 말에 속아서 계단을 내려간 유대인들은 옷을 벗고, 샤워실로 보이는 방까지 걸어가면, 천장에는 물이 나오는 샤워기가 달려있다. 약 63평의 지하실에 2,000여 명이 들어가면 문을 닫고, 천장 구멍을 통해 사이클론 비(Cyklon B)라는 유독가스를 투입했다. 물론 가스실에 있던 사람들은 15분 내에 질식사를 했다. 그 후에 금이빨을 뽑고, 머리카락을 자르고, 반지와 목걸이를 빼낸 사체는 1층에 있는 화장터로, 혹은 시체가 너무 많을 때에는 밖으로 운반해 쌓아 놓았다. 아직도 그 지독한 독가스 냄새가 질식시킬 듯 수용소를 감돌고 있는 같았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가스실


“여보, 너무 무서워요!”

“그만 나갈까? 지금도 가스가 뿜어 나오는 것 같네!”


가스실에 들어간 아내는 공포에 질린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수용소 소장 루돌프 회스의 증언에 다르면, 1,500명을 죽이는데 약 6~7kg의 사이클론 독가스가 필요했다고 한다. 강제로 체포당해 2,400km를 기차에서 서있는 채로 끌려온 유대인도 그날로 가스실에 보내져 독살을 당한 경우도 있었다. 사체에서 뽑아낸 금이빨은 녹여서 막대 모양으로 만들어 위생국에 보내졌고, 화장시킨 시체의 재는 비료로 사용되었다. 머리카락으로 만든 원단을 보고 있노라니 모골이 송연해졌다. 


수감자들로부터 빼앗은 물건은 잇달아 본국으로 운반되었지만, 미처 분별 작업을 하지 못한 물건들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이미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서 그 모습들을 보았지만 살인의 현장을 직접 돌아보는 느낌은 한마디로 공포의 도가니였다.


소련군이 접근해 옴에 따라 창고에 있는 물건들이 본국으로 운반되는 속도가 빨라졌고, 미쳐 운반을 하지 못한 물건들은 불을 질러 없애려고 했다. 그러나 서른여섯 칸의 창고 불럭 중에서 여섯 칸의 블록이 불에 타지 않고 남게 되었다. 그때 남아 있었던 몇 만 켤레의 신발, 브러시, 의복, 안경, 가방들이 발견되었다. 그 잔해들이 지금 제5블록에 진열되어 있다. 


아아,  ‘카프카’라고 쓰인 가방도 보였다. 아마 카프카의 여동생들이 가져온 카프카의 가방인 모양이었다. 카프카의 누이 3명이 모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생을 마쳤다고 한다. 트렁크에는 소유자의 이름, 주소, 생년월일이 적혀 있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비치된 수감자들의 유품


“너희들에게 출구는 화장터의 연기 하나밖에 없다.” 


수감들이 수용소로 들어올 때 관리국장으로부터 듣는 말이었다. 새로 들어온 수감자들은 의복, 소지품을 빼앗기고 세 가지 포즈의 사진을 찍어야 했다. 왼쪽 가슴에 죄수번호 문신을 새기고, 갖가지 색의 삼각형을 부착했다. 빨간색은 정치범, 빨강 노란색은 유대인, 검은색은 집시, 분홍색은 동성연애자 등등.


수감자들의 참상은 차마 눈으로 볼 수가 없었다. 수용소의 주거상황은 너무나 비참했다. 7블록은 수감자들의 주거 위생 생활을 했던 곳이다. 초기에는 콘크리트 위에 놓인 지푸라기 위에서 잠을 잤고 후에 매트리스를 지급받았다. 40~50인용 방에는 200여 명이 콩나물처럼 엮여 잠을 자야만 했다. 11블록은 죽음의 블록이다. 불과 2~3시간 사이에 수백 명의 사형 판결이 내려졌고, 사형선고를 받은 수감자들은 총살을 당하기 전에 나체 상태로 ‘죽음의 벽’ 앞으로 끌려갔다. 죽음의 벽은 바로 총살의 벽이다. 


죽음의 블록 11, 총살의 벽


“저 장미꽃과 촛불들이 죽은 자들의 영혼을 달래줄까요?” 

“글쎄? 죽은 자의 영혼처럼 촛불이 가물거리고 있군요.”


총살의 벽 앞에는 장미꽃과 국화, 촛불 등이 죽은 자의 영혼을 달래기라도 하듯 놓여있었다. 그러나 죽은 자는 말이 없었다. 지하 감옥은 더욱 암울했다. 이곳은 사이클론 비를 최초로 사용하여 집단학살 실험을 한 곳이라고 한다. 


지하 감옥 중에서도 18호실은 특별한 곳이다. 이곳은 배고파 죽도록(餓死) 선고를 받은 죄수를 수감하였던 곳이다. 그런데 이 감방에서 다른 사람을 대신해 죽은 폴란드인 막시밀리안 콜베라는 신부가 있었다. 배고픈 자를 위하여 대신 죽어간 신부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콜베 신부는 아우슈비츠에서도 약자를 위해 자신의 몸을 던져 희생한  성인이었다. 누가 자신의 죽음을 대신해 줄 사람이 있겠는가?


다른 죄수를 대신해 죽어간 콜베 신부의 18호 독방 


살벌한 철조망 사이를 비집고 다니다 보니 등골이 오싹해졌다. 점호 광장의 교수대는 목을 매단 영령들이 지금도 눈에 보이는 듯했다. 화장터가 가까워지자 더욱 공포감이 엄습해 왔다. 화장터는 수용소를 둘러싸고 있는 철조망 바깥에 있었다. 그 입구에는 1947년 4월 16일 아우슈비츠 수용소 소장 루돌프 회스(Rudolf Hoss :1901-1947 나치 친위대 중령으로 1940년 5월 4일부터 1943년 11월까지 아우슈비츠 수용소 소장을 지내며, 백만 명 이상의 사람들을 죽게 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의 사형을 집행한 교수대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입구로 들어가 첫 번째로 나오는 방은 초창기에 사체 안치소였던 것을 후에 가스실로 개조한 것이라고 했다. 뒤쪽 방에는 2대의 화장을 위한 가마가 놓여 있었다. 이 이곳에서는 하루에 350구의 사체가 화장되었다. 두 대의 가마 위에는 국화꽃과 촛불이 타고 있었다. 


 “세상에! 세상에! 세상에…” 


학살현장을 돌아보는 아내의 입에서는 오직 이 소리만 탄식처럼 흘러나왔다. 누가 인간을 사형의 심판대에 올릴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을 심판할 수 있는 자는 오직 죄를 짓지 않는 신만이 할 수가 있다.     


화장터 내부


아직도 아우슈비츠는 끝나지 않았다! 

인간을 이토록 잔혹하게 학살한 이유는 무엇일까? 학자들은 이것을 ‘증오’에서 찾고 있다. 게르만 족과 유대인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증오가 있었다. 히틀러는 그 증오를 이용한 희대의 최면술 가였다. 히틀러는 게르만족에게 증오라는 올가미를 씌워 최면을 걸었다. 


그 증오의 벽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다. 기독교와 모슬렘, 힌두교와 마호메트교, 이스라엘인과 아랍인, 백인종과 흑인종… 증오의 벽은 지금도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증오의 극치에 있다. 그래서 토마스 만은 나치즘 하의 독일인들과 전후 유대인들이 보여주는 놀라운 유사성에 대해 기술한 적이 있다.      

“그들은 모두 똑같은 방식으로 미워하고 경멸하며 두려워한다. 그리고 그들은 똑같은 정도로 남을 소외시키며 자신이 소외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인 이탈리아 토리노 출신의 유대인 프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는 끝나지 않았다’는 그의 저서에서 말한다. “인간은 완전한 행복을 발견할 수도 없지만 완전한 불행을 느끼는 것도 불가능하다”라고. 그는 아우슈비츠의 최대 피해자이면서도, 아우슈비츠를 만든 것이 인간이라고 할 때, 인간인 자기 자신도 ‘유죄’에 포함된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레비는 처음에는 유태민족의 피난처로 이스라엘 국가가 존재해야 한다는 생각을 지지했다. 그러나 이스라엘군이 PLO거점을 침공하자 유태 문화의 인터내셔널리즘 성격이 아닌 공격적 의미의 내셔널리즘 사태를 우려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화장터


레비는 결국 ‘인간으로서 수치스럽다’는 죄의식의 무게에 눌려 1987년 자택에서 스스로 몸을 던져 자살을 하고 만다. 인간의 존재를 선과 악의 단순한 프리즘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 그 단순 이분법이 ‘삶의 회색지대’를 형성하고 증오와 전쟁, 인간 학살을 만들어 낸다고 했다. 


아우슈비츠를 경험하고 치유될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자살한 또 다른 작가들이 있다. 파울첼란, 타데우스 브로스키, 상 아메리, 루트 클리겔 등이 그들이다. 그들이 체험한 아우슈비츠는 인간 최악의 수치였다. 도저히 치유될 수 없는 상처였다.


그렇다! 

이 시대에도 아우슈비츠는 아직 끝나지 않고 있다. 패권주의, 민족주의, 집단 이기주의는 제2, 제3의 아우슈비츠를 만들어 내고 있다. 나는 몸서리 쳐지는 인간 가죽 공장인 화장터를 빠져나오며 이미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지구촌에 “증오의 벽”은 언제 무너질 것인가? 어둠이 깔리고 전류가 흐르던 아우슈비츠 철조망을 빠져나오며 나는 다시 임레 케르테스의 말을 떠올린다.      



“아우슈비츠의 굴뚝에서조차도 고통들 사이로 잠시 쉬어가는 행복이 있다. 사람들은 모두 내게 가장 끔찍한 일에 대해서만 묻는다. 그래, 난 사람들이 내게 묻는다면 다음엔 강제수용소의 행복에 대해서 말할 것이다.”  수용소 안에서조차 행복을 느끼고 경험했다는 임레 케르테스, 아우슈비츠를 만든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인 자신이 수치스러워 자살로 목숨을 끊으며 죽어간 프리모 레비의 말에 우리는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극단적인 이기주의 때문에 경솔한 판단으로 제2, 제3의 아우슈비츠와 같은 폭력을 휘둘러서는 안 될 것이다.    

 

아내와 나는 몸서리 쳐지는 인간 가죽 공장인 화장터를 빠져나오며 이미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지구촌에 증오의 벽은 언제 무너질 것인가? 아내는 빨리 아우슈비츠를 벗어나고 싶다고 했다.      


어둠이 깔린 오시비엥침 역


아우슈비츠에서 오시비엥침 역으로 온 우리는 기차를 타고 크라쿠프로 향했다. 크라쿠프 역사에 도착하니 사방이 어두워졌다. 플랫폼에 이정표처럼 새겨진 번호가 마치 수용소로 가는 길을 안내하는 암호처럼 보였다. 악몽처럼 내 머리를 흔들어대는 아우슈비츠의 잔영을 떨치려고 할수록 더욱 선명하게 수감자들의 비참한 영상이 클로즈업되어 왔다. 


“증오는 지워야 하나 망각은 비애국적 행위다.” 


이스라엘 국민들의 말이다. 그래서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는 유태 민족들은 이스라엘에 오면 반드시 세 곳의 장소를 방문한다고 한다. 


첫째는 이스라엘 성전 아래에 있는 “통곡의 벽”이다. 그들은 여기서 통곡의 벽을 붙들고 이스라엘의 번영과 평화를 기도한다. 


두 번째는 “마사다 성”이다. 마사다 성은 예수가 죽은 후 70년이 흘러 이스라엘인이 로마 군대에 맞서 끝까지 저항하다가 마지막 한 사람까지 최후를 맞은 곳이다. 


세 번째는 “야드메쉼” 민족기념관이다. 이곳은 나치 치하에서 학살당한 600만 명의 참상을 기리는 유물관이다. 이곳을 방문한 이스라엘인들은 학살당한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씩 새기며 얼굴이 상기되어 눈물로 흠뻑 적신다고 한다. 이 기념관은 과거를 용서하되 대학살의 참상을 절대로 잊지 말자는 다짐의 장소다. 증오는 지워야 하나 망각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경각심을 불어넣어주는 곳이다. 그들은 말한다. 과거를 용서하되 잊지는 말아야 한다고… 그런데 과연 이 참혹한 과거를 진심으로 용서를 할 수 있을까? 


시간이 지날수록 과거의 어두운 그림자는 희미해지기 마련이지만, 이스라엘인들은 더 뚜렷하게 과거를 새기고 기억한다. 우리도 일본인들에 대한 일제 치하에서 당한 고통과 치욕을 망각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아우슈비츠에서 크라쿠프로 돌아온 우리는 기차역에서 어느 아가씨의 도움으로 중심가에서 멀리 떨어진 유스호스텔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버스에서 만난 그녀는 마침 호스텔 근처에 산다고 하며 호스텔 앞까지 안내를 해주었다. 아마 그녀가 아니었더라면 호스텔을 찾는데 애를 먹었을 것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가지전 한 번쯤 보고 가야 할 영화와 책


*아우슈비츠 관련 영화

쉰들러 리스트(Schindler`s List)

인생은 아름다워(Life is beautiful) 등      


*아우슈비츠 관련 책

운명(임레 케르테스 작)

아우슈비츠와 히로시마(이안 부루마 작) 등


★유대인들은 말한다. 과거를 용서하되 잊지는 말아야 한다고… 그런데 과연 나치 치하의 참혹한 과거를 그들은 진심으로 용서를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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