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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라 Mar 08. 2019

38. 바그너에 미친 왕과
노이슈반슈타인 성(城)

뮌헨-퓌센-노이슈반슈타인 성(城)

루트비히 2세-바그너-히틀러까지...  

노이슈반슈타인 성에 얽힌 이야기


퓌센은 독일 ‘로맨틱 가도’의 종점에 위치한다. 이 길은 옛날 독일과 이탈리아를 연결하는 ‘로마로 가는 길’이었다. 차창에 스쳐 지나가는 가을 풍경이 아름다웠다. 건너편 좌석에는 동양인으로 보이는 청년 한 사람이 홀로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야길 나누다 보니 그는 평택이 고향인 Y라는 한국인 대학생이었다. Y군은 대학을 다니다가 군에 입대하여 금년에 제대를 하였는데, 복학을 하기 전에 자신의 정체를 알고 싶어 유럽으로 기차여행을 떠나왔다고 했다. 그는 이번 여행이 일생에 첫 해외여행이라고도 했다. 


여행을 하면서 그는 자신이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처럼 지냈는가를 깨닫게 되었다고 했다. 내 나라가 얼마나 소중하고, 그리고 자신을 낳아서 길러주시고, 대학까지 보내주신 부모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고마운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고 했다. 그의 첫 소망은 자신이 빨리 경제적으로 독립을 하여 부모님의 은혜에 보답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요리에 관심이 많았다. 그의 전공은 원래 경영학인데, 유럽을 여행하는 동안 요리사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그는 요리사 준비를 위해 독일에서 요리용 쌍둥이 칼까지 한 세트 사놓았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소박한 꿈을 위해 꾸준히 준비를 하고 노력을 한다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Y군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기차는 퓌센 역에 도착했다. 동유럽의 마지막 여행지로 퓌센을 선택한 것은 아주 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로맨틱 가도를 달리는 기분도 좋았지만, 퓌센 역에 도착하자마자 알프스 산자락에 한 마리 하얀 백조처럼 목을 길게 빼고 서 있는 희고 아름다운 노이슈반슈타인 성이 우리를 반겨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풍잎이 곱게 물든 알프스의 산자락에 우뚝 서 있는 노이슈반슈타인 성에서는 금방이라도 잠자는 숲 속의 미녀가 나올 것만 같았다. 노이슈반슈타인 성은 독일 뿐 아니라 세계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성으로 손꼽히고 있다. 미국의 디즈니랜드에 있는 판타지랜드 성과 잠실의 롯데월드 매직아일랜드의 신데렐라 성도 이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모델로 하여 만든 것이다. 


노이슈반슈타인(Neuschwanstein) 성은 '새로운 백조의 바위'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를 의역하면 '백조의 성'이란 뜻이다. 이 성을 직접 설계하고 건축한 사람은 바이에른의 국왕이었던 루트비히 2세(Ludwig 2, 1845~1886)였다. 그는 16세 되던 해에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을 관람한 뒤부터 바그너에 매료되어 그의 열성팬이 되었다. 바그너의 음악에 미친 왕은 마침내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에 나오는 배경을 그대로 성으로 짓고자 했다. 


루트비히 2세는 어릴 때부터 집짓기 놀이를 좋아했다. 감수성이 뛰어나고 시와 음악, 그리고 미술 등 예술분야에 심취하였으며, 건축에도 조예가 깊어 일찍이 건축공부를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나중에 이 성을 직접 설계하여 짓는 계기가 된다. 그는 열여덟 살에 왕이 되었는데, 국민들은 모두 젊고 멋진 왕에게 갈채를 보냈다. 그런데 어린 왕의 첫 명령은 어이없게도 "바그너를 찾아오라."는 것이었다. 


당시 바그너는 막대한 빚을 지고 유럽을 전전하고 있었다. 루트비히 왕은 바그너의 빚을 모두 갚아주고 뮌헨에 호화로운 저택까지 지어 주며 작곡활동을 지원하였다. 그런 왕의 행동이 국민들로부터 비난을 받자 왕은 수도를 떠나 산속의 성으로 들어가 버렸다. 


바그너가 왕을 매혹시킨 것은 음악가 바그너 보다도 시인이자 철학가 바그너였다. 바그너는 격정적인 언어와 강렬한 시로 젊은 루트비히 2세를 사로잡았다. 바그너는 특유한 어조와 음악으로 신비한 전설을 왕에게 들려주었고, 왕은 항상 그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니, 그는 바그너에 미친 미치광이 왕이었다.   


어린이처럼 천진난만한 왕은 바그너를 조언자이자 친구로 대했으며 그를 아버지처럼 여길 정도였다. 덩치는 크나 여성스러운 면이 있는 왕은 호탕한 성격의 바그너에게 더욱 깊이 빠지게 된다. 마침내 바그너가 왕에게 미치는 영향이 점점 커지면서 왕과 함께 공동으로 왕국을 다스린다는 소문까지 돌게 되었다.


  

노이슈반슈타인 성은 3면에는 세 개의 호수에 둘러싸여 있어 성의 모습을 하루 종일 세 곳에서 비추어볼 수가 있도록 설계되어있다. 바로 성 주변을 싸고 있는 세 개의 호수에는 백조들이 많이 날아들었다. 왕은 이 천하 명당자리에 백조의 성을 지어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의 주인공인 백조의 기사나 ‘탄호이저’에 나오는 음유시인처럼 살기를 원했다.


알프스의 험한 자락에 성을 짓는 공사는 난공사와 더불어 많은 돈이 필요해 공사를 시작한 지 무려 17년이 지났지만 3분의 2밖에 완성하지 못했다. 루드비히 2세는 자신의 개인 재산까지 몽땅 털어 공사비에 충당을 하였으며, 심지어는 은행으로부터 융자를 받기까지 하였다. 


허지만 정작 루트비히 2세가 이 성에서 살았던 기간은 겨우 6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는 정치에 점점 무관심해져 낮에는 잠을 자고, 밤이 되면 황금마차를 타고 성 주변을 배회하였다. 허지만 그는 성이 완전히 완성되지도 못한 상황에서 어느 날 정적에게 납치되어 요양소에 감금된 지 사흘 만에  호수에 빠진 채 변사체로 발견된다. 정사를 돌보지 않고 성을 짓는 데만 국가재정을 탕진한 왕에 대한 정적들의 반감이 날로 커졌던 결과가 가져온 재앙이었다. 


이 죽음은 아직까지도 의문의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왕의 죽음은 두 가지로 추정되고 있다. 그 한 가지는 성을 짓는 데 국비를 몽땅 탕진하는 왕의 행위를 보다 못한 정적들에 의해 살해되었을 가능성, 다른 하나는 요양소에 강제로 연금된 것을 비관하여 자살을 시도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그러나 그가 자살을 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1미터 90센티의 큰 키를 가진 그는 어릴 때부터 수영선수에 버금가는 수영실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나이 불과 41세. 비운의 왕 루트비히 2세는 평생 동안 그의 예술세계와 바그너의 음악에 미처 성만 짓다가 죽어간 왕이다.


루트비히 왕은 생전에 성을 구경거리로 삼고 싶지 않으니 자기가 죽으면 성을 폭파하라고 했다. 그 성을 폭파하라고 한 또 한 사람의 미치광이 정치인 있었다. 아돌프 히틀러다. 젊은 날 화가 지망생이었던 히틀러는 미대 입시에 두 번이나 떨어진 이후 독재자가 되었다. 화가 지망생이었던 히틀러는 거대한 건축물을 좋아했고, 특히 바이에른의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좋아해 자기가 죽으면 성을 폭파하라고 말할 정도였다. 미치광이 왕 루트비히와 독재자 히틀러는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노이슈반슈타인 성은 폭파되지 않았고, 바이에른 최고의 관광자원이 되고 있다. 현재 퓌센에는 매년 1백20만 명의 관광객이 아름다운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보기 위해 찾고 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고 했던가?  나는 이곳에 오기 전에 한국에서 여행을 준비하며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과 '탄호이저' 수없이 듣고 또 들어 보았다. 그러나 나는 음악적 영감이 없어서 그런지 그냥 지루하기 짝이 없는 오페라에 지나지 않았다. 


성 입구에 들어서자 아내는 마치 오페라 로엔그린에 나오는 공주라도 된 듯 의기양양해하며 낙엽이 뒹구는 길을 올라갔다. 세상의 여자들은 누구나 자신만을 사랑해 줄 '백조의 기사'가 나타나기를 영원히 기다리는 것일까?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바람이 불면 낙엽은 속삭인다."


우리는 구르몽의 시를 읊조리며 성으로 걸어 올라갔다. 성 입구에 역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낙엽 지는 아름다운 알프스의 황혼이 깃든 길을 우리는 그냥 걷고 싶었다. 갈색의 단풍잎이 늦가을 바람에 포물선을 그으며 우수수 떨어졌다. 추호의 미련도 없이 떨어지는 낙엽은 자신의 갈 길을 알고 있었다. 



발자국에 밟힌 낙엽이 사각사각 영혼처럼 소리를 내며 울었다. 새들의 날개 소리처럼, 여자의 옷자락 소리처럼…. 그러나 황혼에 지는 낙엽들은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알고 있었다. 만나면 헤어지고, 헤어지면 다시 만날 것임을…. 


낙엽을 밟으며 30분 정도를 걸어 올라가니, 드디어 백색의 대리석으로 치장된 노이슈반슈타인 성이 백조처럼 우아하게 고개를 내밀었다. 예술을 목숨보다 사랑했던 루트비히 2세. 바그너의 음악처럼 낭만적인 삶을 살고자 했던 사람. 그러나 그 꿈을 펼치기도 전에 낙엽처럼 사라져 가버린 처연한 왕의 사연은 너무 슬프다. 그래서인지 노이슈반슈타인 성은 아름답다 못해 애잔한 슬픔이 배어있다. 


성의 내부는 세상의 그 어떤 성에서 보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은 준다. 내부 곳곳에는 왕의 예민하고 섬세한 예술성이 구석구석 깃들어 있다. 베르사유 궁전의 화려함이나, 에든버러 성의 웅장함, 타지마할의 고고함과는 완연히 색깔이 다른 느낌을 주는 성이다.  


노이슈반스타인 성에는 모든 것이 음악과 시와 전설로 가득 차 있는 듯하다. 내부 곳곳에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과 ‘탄호이저’, ‘파르치팔’ 등을 배경으로 한 회화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벽화의 대부분이 바그너의 오페라 등장인물과 배경으로 가득 장식되어 있다. 


노이슈반슈타인 성 내부



백조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성안의 문고리는 모두 백조모양으로 만들어져 있고, 벽화와 커튼에도 백조가 그려져 있다. 키가 1미터 90센티가 넘는 왕의 침대는 2미터 10센티나 되고, 문고리는 보통 사람의 가슴에 닿을 정도로 높이 달려 있다. 


이처럼 노이슈반슈타인 성은 예술을 목숨처럼 사랑했던 루트비히 2세의 예술 혼이 아직도 고스란히 숨 쉬고 있다. 그토록 사랑했던 성안에는 왕의 초상이 그 어디에도 없다. 그는 자신의 초상이 남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생전에 바그너가 온 정열을 바쳐 세운 뮌헨 근처에 있는 '바이로이드' 극장에서는 해마다 바그너의 오페라가 독일 최고의 정신적 축제로 자리 잡고 있다. 바그너리즘에 심취한 사람들을 일명 '바그너리안'이라 하는데, 나치 카리스마의 대부 격인 아돌프 히틀러도 바그너의 음악을 매우 즐겨 들었다고 한다. 


이는 바그너의 오페라가 게르만 민족 신화에 근거한 성배의 기사에 대한 전설을 담은 '로엔그린', 그리고 귀족사회를 증오하고 평민에 대한 사랑이 담긴 '탄호이저'에 흐르는 정신이 독일 고유의 철학적 국민성과 게르만 민족을 만족시켜 준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정말로 왕의 예술 혼이 담긴 황홀한 궁전이군요!”

“말하자면 백조의 기사 같은 멋진 왕에게 반했다 이거지요?”

“그 누구라도 저렇게 멋진 왕에게 반하지 않고 배겨 나겠어요?”

“허긴…. 난 백조의 기사는 죽었다 깨어나도 되지 못하니 공주님의 마부나 되어볼까?" 

"난 백조의 기사보다 마부인 당신이 더 좋아질걸요. 호호호."

"흠… 맴에 드네. 자, 그럼 공주님, 기차 시간이 다 되어 가는군요. 오늘 밤은 이 마부가 당신을 위하여 뮌헨의 맥주 집으로 모시겠나이다. 우리들의 웨딩마치를 위하여!"

"그렇지 않아도 갈증이 나는데, 그거 정말 입맛 당기는 이야기네요."    



우리는 마치 바그너의 음악 웨딩마치에 장단을 맞추듯 함께 손을 잡고 성에서 사뿐사뿐 걸어 내려왔다. 오늘은 11월 7일이다. 아직 다가오지는 않았지만, 마침 11월 11일은 우리들의 결혼기념일이다. 그래서 11월이 돌아오면 우리는 늘 다시 결혼을 하는 신혼부부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자~ 여기를 보세요!" 


때마침 함께한 Y군이 우리들의 그런 마음을 알기라도 한 듯 카메라의 앵글을 돌렸다. 해질 무렵이 되자 성의 타워 사이로 내다보이는 알프스의 언덕에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안개가 드리워진 노이슈반슈타인 성은 하얀 면사포로 가리듯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일생 동안 바그너에 미친 왕의 영혼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거대한 궁궐, 큰 사옥, 큰 저택을 짓고 패가망신을 하는 경우가 많다. 베르사유 궁전, 타지마할, 노이슈반슈타인 성이 그 좋은 예다. 허지만 후세에는 그런 궁궐들이 관광지로 각광을 받아 먹여 살리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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