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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라 Jun 16. 2019

46. 잉카제국의 멸망과
피사로의 최후

-페루 리마

리마에서 하룻밤을 지낸 이튿날 아침 볼리비아 영사관에 가서 비자를 받기로 했다. 물론 국경을 통과하며 비자를 받을 수도 있지만 미리 받아두는 것이 시간 절약을 위해서도 좋을 것 같아서다. 리마는 택시비와 버스요금이 큰 차이가 없다고 한다. 대낮에는 택시를 타도 비교적 안전하다는 민박집주인의 설명에 ‘TAXI’라고 써 붙인 티코 중고차를 탔다. 이곳에도 우리나라 중고차인 티코가 있다니 놀라웠다. 리마에서는 영업용 택시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 차나 택시라고 써 붙이고 영업을 한다. 택시비는 거리에 상관없이 거의 비슷하다. 라디오 택시라고 캡을 달고 있는 택시는 요금이 더 비싸다. 안전을 위해서는 라디오 택시를 타는 것이 좋지만 오늘따라 쉽게 발견을 하지 못해 우리는 그냥 티코를 탔다. 아니 우리나라의 중고차 티코를 타고 싶었다. 


볼리비아 영사관은 산 이시드로 235번지에 주택처럼 생긴 허름한 건물에 있었다. 아침 일직이라 그런지 영사관엔 우리 부부뿐이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중년 부인이 안경 너머로 우리를 쳐다보며, 1인당 비자비용은 30달러를 먼저 달라고 했다. 월드컵을 치르고 나서 남미의 여러 국가가 비자를 면제해 주고 있지만 아직 볼리비아는 비자를 필요로 했다. 


비자를 받으러 온 사람은 우리밖에 없는 데 안경을 쓰고 비쭉 마른 영사관 여직원은 약 2시간 정도 소요된다고 했다. 뇌물을 달라는 눈치 같기도 했다. 좀 빨리 해줄 수 없느냐고 사정을 했더니 그녀는 안경 너머로 우리를 힐끗 쳐다보더니 비자 신청서류를 들고 영사실로 들어갔다. 영사실에서 나온 그녀는 영사가 직접 면접을 하겠다고 하니 영사관실로 들어가라고 했다. 비자를 받는 데 영사관이 직접 면담을 한다니 다소 놀라웠다.  영사실을 들어가니 훤칠한 키에 미남형의 백인 볼리비아 영사가 우리를 친절하게 맞이했다. 


“어서 오시오. 아주 멀리서 오셨군요.”

“네, 저희 들은 한국에서 왔습니다.”

“한국인이 여기까지 와서 볼리비아 비자를 받는 일은 매우 드문 일인데… 볼리비아는 무슨 일로 가시나요?”

“티티카카 호수와 우유니 소금 사막 등 볼리비아의 아름다운 자연을 보러 여행을 갑니다.”

“아하, 그래요. 두 분은 부부 사이 이신가요?”

“그렇습니다. 우린 결혼 30주년 기념으로 세계일주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랍니다.”

“대단하군요. 축하드립니다. 비자를 바로 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영사님.”

“좋은 여행이 되시기 바랍니다.”


볼리비아 영사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하더니 여직원을 불러 즉시 비자를 발급해 주라고 지시했다. 2시간이 아니라 단 10분 만에 비자를 발급받았다. 뇌물을 상상했던 내가 괜히 부끄러웠다. 그러니 사람을 함부로 짐작해서 의심을 해서는 안된다. 기분 좋게 영사관을 나온 우리는 리마의 아르마스 광장으로 가는 택시를 탔다.  

         

문맹자에 돼지치기였던 피사로의 야심 


아르마스 광장으로 온 우리는 스페인의 정복자 피사로의 미라가 안치된 대성당부터 돌아보기 시작했다. 스페인의 지배를 받은 남미의 여러 도시에는 의례 똑같은 콜로니얼 도시 모형의 아르마스 광장이 있다. 아르마스 광장을 중심으로 대부분 정부 종합청사, 대성당, 시청사, 박물관 등의 건물이 타원형을 이루며 운집해 있다. 


정부청사가 가운데 있고, 청사 좌측에 대성당, 우측에는 시청사나 박물관이 있다. 정복자들은 한 손엔 종교로 민중을 어루만지며, 다른 한 손으로는 지배자의 칼로 식민지를 통치하기 편리하게 설계를 한 것이다. 격자형을 이루고 있는 아르마스 광장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역시 대성당이다. 스페인의 전설적인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이곳에 직접 말뚝을 박아 남미를 지배하는 전진기지로 삼고 리마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광대한 잉카제국은 어디로 갔는가? 이것은 남미로 오기 전에 화두처럼 머릿속을 뱅뱅 도는 의문 덩어리였다. 오래전부터 잉카의 땅을 밟고 싶었다. 나는 여행을 떠나기 전에 잉카제국에 대한 책들은 손에 잡히는 대로 탐독을 했다. 남미를 여행하기 전에 먼저 잉카제국에 대하여 꼭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잉카란 말만 들어도 어쩐지 신비해요."

"사실 나도 그래요."

"그런데 그렇게 막강했다는 잉카제국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어떻게 망해버렸을 까요?"

" 나 역시 그 점이 매우 궁금하여 가이드 북과 잉카제국에 대한 참고서적을 몇 권 읽어 보았는데 그게 참, 그 방대하고 막강했던 잉카제국에 너무나 허망하게 무너지고 말았더군." 


'잉카'는 ‘온 세상을 지배하는 통치자’란 뜻으로 보통 '황제'로 번역된다. 페루의 원주민들은 '위대한 잉카(줄여서 '잉카'라고 함)'라고 부른다. 잉카제국은 나에게 언제나 신비의 대상이었다. 아내도 막강했다는 잉카제국이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린 것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막강한 잉카제국이 불과 몇 백 명도 안 되는 스페인군에게 굴복을 하게 되었을까? 나는 아내에게 잉카제국의 흥망성쇠에 대하여  내가 알고 있는 내용의 대강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중에서 피사로에게 굴복을 한 잉카 최후의 황제 아타우알파의 어처구니없는 죽음은 한 편의 우화를 보는 것처럼 흥미롭다. 

  

광대한 잉카제국을 건설한 사람은 잉카 황제 파차쿠티이다. 전설에 의하면 쿠스코는 열두 명의 황제가 잉카 왕조를 이어나갔다고 한다. 그중의 아홉 번째 군주인 파차쿠티가 실질적인 첫 잉카라는 데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파차쿠티는‘세계 질서의 전도(顚倒)’를 의미한다. 그는 쿠스코시를 재건축하고 도로망을 건설한 장본인이다. 그는‘비라코차’ 숭배를 장려했다. 비라코차는 티티카카 호수에서 태양을 떠오르게 하는 조물주로 숭배되는 잉카의 신이었다.


쿠스코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뻗어있는 잉카의 영토는 실로 엄청났다. 쿠스코 사람들은 자신들이 건설한 제국을 타우 안틴 수유, 즉 ‘4방위의 땅’이라 불렀다. 쿠스코를 중심으로 북쪽은 지금의 에콰도르와 페루의 대부분을 포함한 친차이 수유이다. 남쪽의 코야 수유는 가장 큰 지역으로 티티카카 호수를 넘어 태평양으로 뻗어 지금의 칠레 해변을 따라 삼분의 일까지 내려갔다. 쿤티 수유는 서쪽으로 뻗어갔다. 그리고 동쪽으로는 아마존 산록 지대가 이어졌다.

 

그런데 그렇게 방대한 영토와 막강한 군대를 가진 제국이 어떻게 하여 몇 명 안 되는 피사로의 군대에 허망하게 멸망을 하였을까? 잉카제국을 멸망시킨 프란시스코 피사로, 그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잉카제국의 멸망은 역사적으로 프란시스코 피사로를 빼놓을 수 없다. 


피사로는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했으나 용기와 야망에 찬 모험가였다. 그는 미천한 태생이었고 사생아였다. 거기에다가 그는 무학에 문맹자였었다. 어려서는 돼지치기였고, 나이가 들어서는 용병으로 잔뼈가 굵은, 야심과 용기로 똘똘 뭉친 사나이였다.


1526년 두 번째 남미 탐험에 나선 피사로는 산후안 강어귀에 정박하고 있는 동안 에콰도르 근처에서 그의 부하 루이사가 뗏목처럼 생긴 배 한 척을 발견했다. 원주민들은 라마의 털로 짠 옷을 입고 있었다. 그들은 루이스에게 온 세상을 지배하는 ‘위대한 잉카’의 이름이 ‘우아이나 카팍’이라고 알려주었다.


루이스의 보고를 들은 피사로는 산악지대에서 무력으로 그들을 제압하기에는 병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하고 파나마로 증원군 요청을 보내는 한편, '이슬라 델 가요(Isla del Gallo, 닭의 섬)' 섬에서 동료들과 함께 탐험 계획에 착수했다. 그런데 막상 배가 돌아오자 동료들은 길고도 힘든 기다림에 지쳐 있어 탐험을 포기하고 파나마로 돌아가자고 했다. 그러나 피사로의 결심은 확고했다. ‘황금으로 번쩍이는 나라’ 엘도라도를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던 것. 의기소침해진 동료들 앞에서 피사로는 땅바닥에 선을 하나 그어 놓고 부하들을 다그친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피사로의 목적은 오직 하나였다. 황금, 바로 그것이었다!


“동지이자 친구인 여러분, 이쪽에는 가난과 굶주림, 고생, 억수 같은 비, 그리고 박탈이 기다리고 있다. 저쪽에는 쾌락이 있다. 이쪽에 서면 파나마와 가난으로 돌아간다. 저쪽에 서면 부자가 된다. 훌륭한 스페인인으로서 최선의 것을 선택하라.” 


이 순간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까? 이판사판인데 물론 피사로가 그려 놓은 선을 넘어갈 가능성이 크다. 피사로의 동료 가운데 12명이 넘어왔다. 훗날, 그 선을 넘어선 자들이 원정의 선봉에 섰던 유명한 ‘이슬라 델 가요의 13인’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된다. 


그들은 해안을 따라 드디어 툼베스 항구에 도착했다. 툼베스 항구에 도착하자 원주민들이 환대를 했다. 원주민 중에 화려한 복장을 하고 귀에 무거운 장식을 단 잉카의 사절 ‘오레혼(큰 귀를 가진 사람)’이 다가와 물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먼 땅에서 이곳까지 왔는가?” 그러자 피사로는 에스파냐 국왕 카를로즈 5세가 세상에서 제일 강력한 황제라고 말하며, 위대한 황제가 믿는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려 왔다고 전한다. 오레혼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해 우아이나 카팍에게 전령을 파견했다.          


그러나 피사로는 이 전력으로는 도저히 수십만의 군대가 있는 잉카제국을 정복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에스파냐로 돌아가 왕에게 후원을 요청했다. 마침내 그는 왕실의 원조로 준비를 갖추고, 1531년 3척의 배에 부하 180명, 말 30두를 싣고 에콰도르 툼베스 항구에 도달했다. 


툼베스 항구는 과거의 활기찬 항구는 사라지고 전쟁과 질병으로 황폐해져 있었다. 1526년 백인들이 몰고 온 달갑지 않은 천연두가 퍼져 잉카제국의 왕 우아이나 카팍이 죽고, 민중은 질병과 기아에 허덕이고 있었다. 더구나 후계를 둘러싸고 적자인 우아스카르와 아타우알파 간에 치열한 권력투쟁이 벌어져 많은 잉카인들이 죽었다. 결국 우아스카르는 쿠스코의 잉카로 봉해졌고, 아타우알파는 키토의 군주로 즉위하였다.


이 사실을 감지한 피사로는 툼베스를 벗어나 아타우알파가 있는 카하마르카로 향했다. 험준한 산맥에 고대 로마의 길과 비슷한 잉카의 길을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며, 그는 해발 5,000미터의 산악지대에 도달하였다. 매서운 추위가 그들을 덮쳤고, 말들은 병에 걸렸다. 그들은 돌로 만들어진 피라미드식 저장고에서 잉카의 군대가 몇 주간 사용할 수 있는 직물과 음식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넜다. 산악의 급류는 밧줄을 타고 건너야 했다. 모든 건널목에는 물샐틈없이 감시되고 통행료를 내야만 통과를 할 수 있었다. 피사로는 이 강력한 문화에 대항하려면 잔꾀를 부릴 수밖에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잉카인들은 에스파냐인 들의 말과 화승총에 대한 공포심이 있었으나 곧 그 공포심에서 벗어났다. 


툼베스에서 낯선 자들이 카하마르카로 향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아타우알파는 혹시 이들이 전설 속에 나오는 비라코차(잉카 신화에 나오는 창조주) 신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잉카인들은 그들의 세계에 하얀 얼굴에 수염이 텁수룩한 스페인 사람들이 갑자기 나타나자 스페인인들이야말로 태고의 전설로 전수되어 내려온 신들이라고 믿었다. 


그들의 전설에는 하얀 얼굴을 가진 사람들이 나타나 자신들을 지배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1530년대 초에 하얀 얼굴의 사람이 나타났다는 소식이 잉카제국에 알려졌고, 잉카들은 스페인인들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아타우알파가 후에 들은 보고에 의하면 그들은 난폭하고 잔인하며, 여자들을 밝히고 쉽게 사람을 죽인다고 해서 그들이 신이 아닐 것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이들은 천둥소리가 나고, 번갯불을 뿜는 것 같은 무기를 가지고 굉장히 힘이 세다는 정보를 듣고 좀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특사를 파견해 보고를 들은즉, 그들은 신이 아니라 200여 명의 떼강도들로 추측되는 데, 재와 구슬을 구멍에 넣고 불을 붙이면 엄청난 소리와 함께 불을 뿜는 막대기(총), 고기를 잘라내는 데 탁월한 성능을 보이는 하얗고 반짝이는 긴 꼬챙이(창)와 휘장을 두른 말에 대해서 보고를 들었다. 이 보고를 들은 아타우알파는 별로 대단한 무리가 아니라는 파단을 내렸고, 카하마르카에 도착할 때까지 그대로 놔두라는 명령을 내렸다.


마침내 카하마르카 광장에 도착한 피사로는 잘 정돈된 잉카의 주둔지를 보고 등골이 오싹함을 느꼈지만, 이제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광장은 3면이 두꺼운 벽으로 막혀 있었고, 한쪽으로만 통하게 되어 있었다. 피사로는 인원이 적은 자신의 군대가 머물기에 적합하다고 판단을 내렸다. 광장에 진을 치고 나서 동생 에르난도를 아타우알파에게 보내 자신의 진지를 방문해달라는 전갈을 보냈다.


에르난도가 처음 만난 잉카 아타우알파는 낮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 주위에는 고관들이 빽빽하게 둘러서 있고, 여러 명의 부인들이 보였다. 잉카는 정교하게 짠 직물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으며, 머리에는 왕권의 상징을 쓰고 있었다. 얼굴에는 아주 고운 베일이 드리워져 있었는데, 태양의 아들인 그를 인간이 직접 볼 수 없다는 상징이었다. 


피사로의 방문 요청을 수락한 아타우알파는 그동안 빼앗은 직물을 전부 돌려 달라고 요구했다. 다음 날 아침, 아타우알파는 첩자로부터 낯선 자들이 전투준비를 마쳤다는 보고를 받았지만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겨우 170명의 군사와 수만 명에 달하는 자신의 군대와 전투를 위해 무엇을 준비 한단 말인가?


허무하게 무너진 잉카제국의 멸망


그러나 피사로는 잉카를 사로잡을 치밀한 계획을 꾸몄다. 3면이 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한쪽만 밖으로 열려 있어 전투가 시작되면 외부로부터 진입이 쉽지 않기 때문에 좁은 공간에서의 전투가 자신들에게 아주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적은 군사로 수만 명의 잉카 군과 대적해야 한다는 사실에 긴장과 초조함 속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피사로는 부하들에게 숨어 있다가 ‘산티아고!(성 야곱, 에스파냐의 전쟁 수호성인. 에스파냐 인들은 전투를 벌이기 전에 이 이름을 외침)’라는 말이 떨어지는 즉시 돌격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다음 날, 결정적인 만남이 이루어졌다. 잉카의 행렬은 장관을 이루었다. 잉카는 앵무새의 깃털로 호사스럽게 장식한 가마에 올라탄 채 금으로 장식한 화려한 의상을 걸친 근위병에 둘러싸여 있었다. 어린 소년들이 잉카가 지나갈 땅을 조심조심 쓸었고,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가람들이 행렬 좌우에서 소라 고동과 피리를 불었다. 그러나 제국의 운명은 한 시간도 채 못 되어 완전히 기울어지고 말았다. 도미니크 신부인 빈센테 발베르데가 잉카 앞으로 나가 한 손으로 성호를 긋고 다른 손으로 성서를 내밀었다

.

“나는 그대에게 신의 말씀을 가르치기 위해서 왔노라.”


에스파냐 인들은 언제나 새로운 도착지에서 원주민을 만나면 ‘그리스도교 포교’라는 십자군적인 명분을 내 걸었다. 목적은 물론 금이었지만… 아타우알파는 성서를 빼앗아 귀에 대보고는 땅바닥에 던져 버렸다. 이 불경에 피사로가 분노를 터트렸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저 바보 같은 이교도가 신의 책을 바닥에 던져 버렸다. 크리스천이 되기를 거부했으니 그는 우리의 적이다. 내가 너희들의 죄를 사할 것이니 이교도들을 무찔러라! 산티아고!”


에스파냐 군인들은 일제히 “산티아고!”를 외치며 돌격을 했고, 4문의 대포와 총들이 불을 뿜었다. 피사로는 아무도 감히 손을 댈 수 없는 태양의 아들 잉카의 팔을 잡아 가마에서 끌어내렸다. 엄청난 소동이 벌어졌고, 시체가 널리기 시작했다. 에스파냐 군의 칼에 맞아 죽는 숫자보다 놀란 군중들에게 밟혀 죽는 자가 더 많았다. 


이제 광장에는 공포에 질린 원주민과 잉카만이 옷이 갈기갈기 찢긴 채 팔이 묶여 이었다. 불과 두 시간 동안에 7천여 명의 잉카인이 죽고 수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으며, 아타우알파는 피사로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실로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1532년 11월 16일 토요일 밤이었다. 이날은 잉카제국이 멸망하는 결정적인 날이다. 

    

포로로 잡힌 아타우알파는 그런 와중에서도 자신을 죽이지 않는 이들을 보고 빠져나가 복수를 할 궁리를 하였다. 그는 목숨을 살려주면 왕궁의 방 하나를 가득 채울 만큼 황금을 채워주겠다고 제안을 했다. 좀 어리둥절했지만 피사로는 즉시 서기를 불러 이 약속을 문서로 작성하게 했다. 그러나 아타우알파도 피사로도 글을 쓸지도 읽을 줄도 몰랐다. 그 방은 가로 6.7미터, 세로 5.2미터였다. 이 방에다 황금을 가득 채우겠다고 아타우알파는 서명을 했다. 현재 카하마르카에 있는 ‘몸값의 방’ 안에 그러져 있는 선의 높이는 2.8미터로 아타우알파가 손을 뻗어 닿은 높이다. 


잉카의 몸값으로 곧바로 해안지방, 산악지방 등 사방에서 금이 속속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윽고, 몸값이 다 거두어지자 피사로는 금의 5분의 1은 에스파냐 국왕의 몫으로 남겨두고, 자신의 몫을 제외한 나머지를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피사로와 그의 병사들이 그토록 빨리 부유해진 경우는 없었다. 그리고 아타우알파가 그렇게 빨리 그만한 재물을 날린 경우도 없었다. 그것도 단 한 번의 주사위를 잘못 던진 바람에….


황금을 바치면 풀려날 줄로만 알았던 아타우알파는 자신이 자유의 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또 다른 정복자 알마그로가 150명의 군대와 59두의 말을 이끌고 피사로와 합류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을 구하리라 믿었던 잉카군 사령관 찰구치마가 피사로의 동생 에르난도의 농간에 속아 스스로 아타우알파를 찾아와서 피사로의 포로가 되어 버렸다. 


피사로는 아타우알파에게 충성하는 장군들이 반란을 꾀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아타우알파를 대역죄라는 죄목으로 화형에 처할 것을 선고한다. 화형은 잉카인들에게는 가장 잔인한 처벌이었다. 잉카인들은 육체가 없어지는 화장에 대한 극도의 공포를 가지고 있었다. 공포에 질린 아타우알파는 화형 대신 목이 잘린다는 조건으로 가톨릭으로 개종을 하기로 했다. 아타우알파는 만약 목이 잘리더라도 언젠가는 다시 살아나서 반드시 복수를 하겠다고 자신에게 속으로 맹세를 했다. 지금도 페루 산악지방에는 머리가 땅 밑에서 솟아나는 '잉카리'(일종의 메시아)가 돌아올 날이 임박했다는 신화가 전해지고 있다.


아타우알파가 처형되던 날, 하늘이 어두워졌다. 아타우알파는 목이 잘려 피를 쏟으며 최후를 맞이했다. 너무나 어이없는 죽음이었다. 그의 아내 몇 명과 누이는 내세에서 그를 섬기기 위해 스스로 목을 매달았다. 군주의 죽음을 따르는 자살은 북부 안데스 지역에 널리 퍼져 있던 풍습이었다.    

      

부하의 칼에 죽은 피사로의 최후     


아타우알파를 죽인 피사로는 잉카제국의 수도 쿠스코로 진격했다. 1533년 11월 15일, 드디어 피사로는 쿠스코를 점령했다. 피사로가 내세운 꼭두각시 망코 잉카의 협력 아래 그는 쿠스코 시내와 그 주위의 모든 신전, 무덤, 그리고 원주민에게서 금, 은, 보석을 거둬들였다. 모든 금과 은은 녹여서 금괴로 만들어졌다. 금이 아닌 모든 것은 거의 파괴하여 버렸다.


피사로는 대성당을 주축으로 리마를 건설한 다음 약탈한 잉카의 황금을 모두 녹여 5분의 1은 에스파냐 왕실에 보내고 나머지는 자신의 몫을 제외하고 부하 등에게 나누어 주었다. 병사들이 그렇게 빨리 그렇게 부유해진 경우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피사로의 황금 배분에 항상 찬밥 신세를 면치 못했던 부하 알마그로는 피사로를 제거할 앙심을 품게 되었다. 그러나 알마그로의 암살을 눈치챈 피사로는 즉시 알마그로를 제거해 버렸다.


알마그로가 죽은 다음 푸대접만 받고 있던 알마그로 파들은 그의 아들을 중심으로 알마그로의 원수를 갚겠다는 명분을 내 걸고 리마를 습격하여 피사로의 등에 비수를 꼽았다. 그렇게 야심 많던 피사로도 끝내 동료의 비수를 맞아 암살당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 그러나 알마그로의 아들은 또다시 피사로의 동생에게 완전히 전멸당한다. 동료끼리 죽이고 죽이는 참상이 끝없이 이어졌다.     


책과 인터넷을 통해서 읽은 잉카 제국에 대한 이야기를 아내에게 비교적 길고 상세하게 설명해주었다. 가이드가 없는 여행이기 때문에 나는 미리미리 역사의 현장에 대한 공부를 하고 그 내용을 아내에게 종종 설명을 해주어야 했다(잉카, 카르망 베르낭 지음, 시공사, 2004 등)


“그런데 왜 페루 사람들은 피사로 사체를 이처럼 성당에 고이 모시고 있지요?”

“나도 알다가도 모르겠어. 역사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피사로의 유체는 리마의 대성당 안 유리 상자에 고이 보관되어 있다. 또한 대성당의 건너편에는 말을 탄 피사로의 동상까지 그대로 남아있다. 잉카의 황금을 손에 넣기 위해 피사로가 직접 삽질을 하여지었다는 대성당의 위용은 과연 대단했다. 성당 안에는 금과 은박, 조각으로 이루어진 16개의 제단이 화려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역대 잉카의 초상화도 눈길을 끈다. 


피사로는 이 성당에 자신의 무덤을 파 놓은 거나 다름없었다. 황금에 눈이 어두워 너무 욕심을 내다가 부하의 비수에 쓰러지고 말았으니 말이다. 그는 아직까지도 자신이 삽질을 해 지었던 대성당의 입구 우측 코너의 유리 상자 안에 잠들어 있다. 페루 인들은 자신들을 멸망시킨 원수를 왜 아직까지도 성스러운 대성당 안에 안치하고 있을까? 역사의 교훈을 남겨주기 위해서일까? 아무튼 페루에는 스페인이 지배하에 건축했던 역사적인 건물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조선총독부 건물까지 파괴해 버린 우리나라의 정서와 비교해 보면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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