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찰라 Jul 04. 2019

54. 아아, 마추픽추!

페루- 마추픽추


새벽 4시. 위나이 와이나는 벌써 트레킹 여행자들로 웅성거렸다. 우리는 4시 반에 빵과 우유로 간단한 식사를 하고 여행자들과 함께 어두운 길을 나섰다. 정글은 어둠과 침묵에 잠겨있고 아득히 먼 계곡 아래 마을에서는 드문드문 희미한 불빛이 깜빡거렸다.


사람들은 저마다 손에 랜턴을 들거나 헤드 렌턴으로 길을 비추며 해발 2600m가 넘는 잉카의 길을 말없이 뚜벅뚜벅 걸어갔다. 여명이 밝아오고 있으나 산등성이에는 안개가 자욱이 끼어 있었다. '잉카의 눈물'이라는 안개는 점점 더 짙어져만 갔다. 여행자들은 오로지 앞사람을 따라 좁은 길을 걸어갈 뿐이다. 숲 속에서는 간간히 새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여명이 밝아오는 안데스 산맥


잉카의 길을 걷는 사람들의 마음속엔 저마다 마추픽추의 멋진 일출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안개는 마추픽추로 들어가는 마지막 입구인 ‘인티 푼쿠(Intipunku-태양의 문, 2700m)에 들어설 때까지 벗어지지 않고 더욱 짙게 드리워졌다. 인티 푼쿠에서 내려다보아야만 가장 멋진 마추픽추의 전체 비경을 조망할 수 있다. 그러나 안개와 구름 때문에 아무것 보이지 않았다. 


멀리 안데스의 영봉에는 이미 태양이 솟아올라 만년설을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눈 덮인 설봉들이 숨바꼭질을 하듯 구름과 안갯속에서 사라졌다가 나타나곤 했다. 안갯속에 베일처럼 싸인 산들이 더욱 신비하게만 보였다. 저 구름과 안개 때문에 멋진 마추픽추 일출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물 건너 가버린 것은 아닐까? 가이드 어네스토가 말했다. 


안개갯속에 가려진 마추픽추


“오늘은 안개가 쉽게 벗어질 것 같지 않습니다. 앞으로 20여분 정도 기다리다가 안개가 벗어지지 않으면 일정과 기차 시간 때문에 마추픽추로 내려가도록 하겠습니다.”

“아니야, 우린 안개가 벗어질 때까지 기다릴 거야.”

“어네스토, 우리도 함께 기다리겠소.”

"나도 기다릴 거야."


사람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하며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리겠다고 했다. 늙은 봉우리 건너편에 있는 우아이나 픽추(Huaina Picchu-젊은 봉우리)가 안갯속에 가려졌다가 나타났다가를 반복했다. 안개는 유독 마추픽추 유적을 베일처럼 휘감아 돌고 있었다. 보일 듯 말 듯하면서도 끝내 속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마추픽추. 속이 탔다. 


“여보, 선크림을 바르면서 기다려요.”

“해가 뜨지도 않았는데?”

“원래 안개가 낀 날은 무덥고 자외선이 더 강해요.”


아내가 선크림을 잔뜩 짜내서 나에게 주었다. 얼떨결에 선크림을 받아 얼굴에 바르고 있는데 마리노가 나를 보고 배꼽을 쥐며 깔깔거렸다. 다른 일행들도 우리를 보고 까르르 웃었다. 왜 웃느냐고 물었더니 사진을 한방 찍어 주겠단다. 그에게 카메라를 건네주었다. 카메라에 비친 네 모습이 내가 보아도 웃음이 절로 났다. 온 얼굴에 밀가루를 바른 것처럼 하얀 선크림 투성이다. 

“이거야 정말, 안개 귀신이 되어버렸군. 하하하.”

“그러니 내가 골고루 잘 문지르라고 했지 않아요.”


인티푼구 언덕에 앉은 사람들은 30분이 지나가도 여전히 안개가 벗어지길 기다리며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 원주민 한 명이 피리를 꺼내어 불기 시작했다. 또 한 명의 원주민 포터가 피리를 꺼내어 함께 불었다. 애잔한 피리 소리가 안갯속을 뚫고 메아리치며 마추픽추에 울려 퍼졌다. 그는 안개가 벗어지기를 안데스의 신들에게 간절히 기원을 드리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마추픽추를 향해 마법의 피리를 부는 원주민 가이드


마법의 피리소리에 점점 벗겨지는 잃어버린 공중 도시 마추픽추


“와아! 마추픽추다!”

“와우! 뷰티풀!”

“오! 마추픽추! 어메이징!”

“안개의 베일에서 모습을 드러내니 더욱 신비해!”

“기다리길 잘했지?”


원주민이 피리를 불며 간절하게 드린 기도를 잉카의 신이 들어준 것일까? 일순간 산정은 안개가 걷히더니 마추픽추의 신비한 비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사람들이 모두 그 놀라운 광경에 탄성을 질렀다. 안갯속을 뚫고 모습을 드러내는 마추픽추는 정말 ‘공중 도시’처럼 하늘에 둥둥 떠 있었다.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소름끼치는 짜릿한 전율이 눈에서부터 뇌를 통해 온 몸으로 타고 내려왔다. 말없이 넋을 잃고 멍~하니 놀라운 풍경을 바라보던 아내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그런 아내의 모습을 본 순간 내눈에도 진한 감동의 눈물이 맺혔다. 말과 글로는 도저히 표현을 할 수 없는 그런 놀라운 풍경이었다. 여기저기서 "어메이징!" 하는 외마디 소리가 들려왔다. 여행자들은 이 한ㅁ 순강의 놀라운 풍경을 바라보기 위하여 며칠간의 그 힘든 잉카 트레킹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안개가 완전히 걷히고 늙은 봉우리와 젊은 봉우리 사이에 드러난 마추픽추


내 일생에 수많은 풍경을 보아왔지만 이렇게 신비하고 놀라운 비경을 본 적이 없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한순간에 나타났다가 한 순간에 사라진다. 아무것도 영원한 것은 없다. 이제 비록 마추픽추가 다시 안갯속에 가려지더라고 여한이 없었다. 


'마추픽추(Machu Picchu)'는 '늙은 봉우리'란 뜻이다. 마추픽추 유적은‘젊은 봉우리’라고 불리는 우아이나 픽추와 늙은 봉우리 사이에 신비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싼 울창한 숲과 뾰쪽한 봉우리들이 마추픽추를 외부세계와 완전히 격리시키고 있었다. 유적의 존재는 그 어디에서도 볼 수가 없고, 오직 공중에서만 확인을 할 수 있다 하여 ‘공중 도시’란 이름이 붙여졌다. 


완전히 안개의 베을 벗고 드러난 잃어버린 공중도시 마추픽추


유적은 쿠스코지역과도 완전히 차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우기에는 우루밤바 강에 물이 불어나 저지대에서도 도저히 접근이 불가능하다. 때문에 그 어떤 정복자들도 결코 마추픽추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마추픽추의 가장 오래된 부분은 2000년 전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스페인군이 잉카를 정복한 후 다른 유적은 모조리 파괴하였지만 이곳까지는 손길이 닿지 않아 잉카의 유적 중 가장 완벽하게 남아있다. 1911년 미국의 역사학자 하이람 빙엄은 하늘 위에 떠 있는 듯한 유적을 발견하고 이 도시를 ‘잃어버린 공중 도시’라고 불렀다.


“우나 포토!”


유달리 키가 작은 잉카의 여자 가이드가 다가오면서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했다. 아내와 나는 마추픽추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했다. 잉카의 여인이 사진을 찍고 나서 내 곁으로 다가와 옆에 섰다. 그녀는 나와  함께 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다. 내 옆으로 다가 선 그녀의 키는 나의 허리에 걸렸다. 귀여웠다. 그녀와 나는 어떤 인연의 끈으로 이곳 마추픽추로 가는 잉카의 길에서 만났을까? 그녀가 마치 오래된 오누이처럼 느껴졌다.


원주민 가이드가 찍어준 사진(좌). 원주민 가이드와 함께(우)


"이 사진 메일로 꼭 보내주세요."

"네, 잊지 않고 보내줄 게요."


그녀는 이메일 주소를 내 수첩에 촘촘히 적어주었다. 여행자들은 마추픽추 비경에 끌려 사진을 찍거나 움직일 줄 모르고 한없이 바라보고만 있는데 어네스토가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고 다그쳤다. 그제야 여행자들은 정신이 든 듯 하나 둘 일어섰다. 


우리는 돌로 깔려 있는 좁은 잉카의 길을 따라 잃어버린 잉카의 공중 도시 속으로 걸어갔다. 아내가 앞장을 서서 걸어갔다. 안갯속에 가렸다가 갑자기 나타난 마추픽추 비경에 압도된 아내는 피곤한 기색이라곤 전혀 보이지 보이지 않았다. 이른 아침에 쿠스코를 출발하여 고산증을 극복하고 1박 2일 동안 잉카의 길을 걷느라 무척 지쳐 있을 텐데 아내는 힘이 점점 솟아나는 모양이었다. 누가 저 여인을 움직이는 종합병원이라고 하겠는가? 


사람은 놀라운 비경에 압도되었을 때 엔도르핀의 몇 백배 효과에 해당하는 다이돌핀이라는 신비한 호르몬이 분비한다고 하는데 지금 아내의 모습이 그랬다. 놀라운 풍경에 압도되었을 때, 좋은 음악을 들었을 때, 새로운 진리를 깨달았을 때, 엄청난 사랑에 빠졌을 때, 스포츠에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역전승을 거두었을 때 사람의 뇌에서는 기적의 다이돌핀이 분비된다고 한다. 


리마에서 아내의 약을 몽땅 도둑을 맞았던 일, 리마에서 쿠스코까지 20여 시간의 버스를 타고 토하고 또 토하면서 극심한 고산증에 시달리던 일, 쿠스코에서 고산증세로 코카 잎 차를 마시며 하루종일 누워있었던 일더 전혀 생각이 나지않았다. 아내와 나는 9회말 만루 홈런을 치고 역전승을 거둔 야구선수처럼, 마지막 홀에서 롱 퍼트로  버디를 잡고 역전승을 거둔 골프 선수처럼 진한 감동 속에 묻혀 잃어버린 공중 도시 마추픽추로 다가갔다.





매거진의 이전글 53. '잉카의 길'을 걷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