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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라 Jul 13. 2019

55. '잃어버린 공중도시'
마추픽추 산책

페루 마추픽추

오직 하늘에서만 내려다 볼 수 있는

 '잃어버린 공중도시'


태양의 문 인티 푼쿠(Inti Punku, 2720m)에서 내려다본 마추픽추는 평생 잊을 수 없는 놀라운 풍경이었다. 그것은 '잃어버린 공중도시'란 말처럼 하늘에 둥둥 떠 있는 세계였다.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마추픽추 유적지에 도착하니 거대한 돌로 쌓아 올린 공중도시가 디테일하게 다가왔다. 실로 엄청난 유적이었다. 바퀴나 도르래도 없던 시기에 어떻게 저 거대한 돌들을 옮기고 들어 올렸을까?


해발 2420m에 쌓아 올린 마추픽추 유적지


가이드 어네스토는 배낭을 짐 보관소에 맡겨두라고 했다. 성스러운 유적을 방문하는데 배낭을 가지고 가면 안 된다는 것이다. 마치 박물관에 들어갈 때 짐을 맡기는 것과 같았다. 배낭을 맡기고 카메라만 들고 유적지로 걸어갔다. 계단식 밭으로 연결된 유적지는 깎아지른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곳은 도저히 접근을 허용할 수 없는 천혜의 요새였다. 1911년 빙엄이 이곳을 발견하고 기술한 내용과 일치했다.


"계곡의 북쪽면에는 엄청난 화강암 절벽이 600m나 솟아 있었다. 왼쪽으로는 우아이나픽추의 외로운 봉우리가 접근을 허용치 않겠다는 듯 절벽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온통 바위 투성이 절벽이었다. 그 절벽들 위로는 구름을 거느리고 눈 덮인 산들이 수천 길 위로 솟아 있었다." (하이럼 빙엄, 잉카의 사라진 도시, 1948)



계단식 밭을 따라가자 유적지 입구가 나오고 곧 초가지붕이 얹혀 있는 ‘오두막 전망대’에 이르렀다. 전망대에서 어네스토는 마추픽추 유적지에서 근무하는 현지 가이드를 소개했다. 그는 나이가 꽤 들어 보였다. 그가 웃으면 그의 온 얼굴이 온통 주름투성이로 변해 마치 늙은 봉우리를 연상케 했다. 그는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모습이었다. 하회탈 같이 친근감이 드는 그런 모습이랄까?


“이 오두막 전망대에서 마추픽추를 바라보는 마추픽추 풍경이 가장 좋습니다. 사진 촬영하기에도 좋은 장소이지요.”


마추픽추 시가지를 바라보기 좋은 오두막 전망대


그의 설명을 들으며 나는 먼 과거의 잉카시대로 돌아간 듯 일종의 채면 상태에 걸려 들어갔다. 그는 느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굵은 바리톤 음성은 마치 옛 잉카가 다시 부활하여 들려주는 옛날이야기처럼 들렸다. 낮은 목소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그의 곁으로 더욱 바짝 다가가 귀를 기울여야만 했다. 가끔씩 침묵을 하면서 느리게 말하는 영어는 발음이 또렷하여 영어에 서투른 나도 비교적 알아듣기가 쉬웠다. 


“잉카는 계단식 밭을 만드는데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했지요. 마추픽추로 연결되는 잉카의 길에는 1만여 명 정도의 사람들이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높은 산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그래서 경사면에 밭을 만드는 돌을 쌓는 기술을 발전시켰고, 잉카인들은 이 밭에 옥수수, 감자, 코카 등 200여 종의 작물을 생산하였지요.”


잉카의 계단식 밭


그는 잠시 침묵을 지키며 눈을 들어 끝없이 펼쳐져 있는 거대한 계단식 밭을 잠시 바라보았다. 몇 천 명이나 되는 잉카인들이 계단식 밭에서 일을 하는 모습은 과히 장관이었을 것이다. 우루밤바 강에서 마추픽추까지 많은 계단식 밭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우아이나픽추의 가파른 절벽에도 계단식 밭이 만들어져 있었다. 마추픽추 광장의 푸른 잔디에는 양들이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눈과 가슴을 편안하게 해주는 목가적인 풍경이었다! 침묵을 지키고 있던 늙은 가이드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스페인 군은 결코 이 마추픽추를 발견하지 못했지요. 그만큼 이곳은 천혜의 자연조건으로 완벽하게 감추어진 도시였어요. 그 증거로 마추픽추가 빙엄에 의해 발견된 이후 100여 년 동안 수백 번의 탐사를 했지만, 스페인 문화의 흔적이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스페인 콜로니얼 주거지의 특징인 빨간 지붕 기와 쪼가리나 그릇 조각 하나 발견되지 않았거든요. 그만큼 마추픽추는 정글 속 보이지 않는 비밀의 장소에 도시를 건설하여 그 누구의 눈에도 띠지 않게 건설되었습니다. 1911년 발견되기 전까지 안데스의 깊은 산속에 묻혀 있는 마추픽추의 존재를 아무로 몰랐고, 산과 절벽, 밀림, 강에 가려 접근이 어려운 데다 전혀 볼 수 없고, 오직 공중에서만 볼 수 있다 하여 '잃어버린 공중도시'란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마추픽추는 발견되기 전까지 깊은 산속에 묻혀 있는 데다 산과 절벽, 밀림에 가려 접근이 어려운 데다 전혀 볼 수 없고, 오직 공중에서만 볼 수 있어 '잃어버린 공중도시'라 불린다. 그는 여전히 낮은 음성으로 담담하게 마추픽추에 대한 역사를 말했다. 표정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어떤 범상한 기상이 말을 하는 그의 표정 속에 담겨있었다. 잉카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랄까?          


태양신의 처녀들, 아크야를 위해 지은 신전

     

계단식 밭의 끝을 지나자 마추픽추 마을 주거지가 나왔다. 구거지에는 꼬리를 물고 이어진 수로가 흘러내려 ‘양수장’을 이루고 있었다. 물은 산 위에서 도랑을 타고 내려왔다. 돌 뿐인 산에서 어떻게 이런 물이 흘러 내려올까? 고산지대에 위치한 잉카가 대제국으로 발전하는 또 하나의 비밀은 관개수로의 개발에 있었다.      


물은 잉카의 생명이나 다름없었다. 이곳의 수로는 잉카 이전 ‘프레 잉카’ 시대부터 이미 만들어졌다고 한다. 잉카제국은 이를 더욱 확대하여 거미줄처럼 수로를 확대해 나갔다. 이 유적에만도 물을 저장하는 양수장이 17군데나 있고 유적 전체 구석구석에 수로가 연결되어 있었다. 


사이펀의 원리를 이용한 관계수로


잉카는 오래전부터 '사이펀(siphon)의 원리를 알고 있었다. 사이펀은 굽어진 유리관 한쪽 입구를 물속에 넣고 다른 쪽의 입구를 빨아 일단 용기 위를 넘게 하면 나중에는 저절로 물이 흘러내리게 하는 원리다. 물을 퍼 올리는 원리를 이용해 돌에 고랑을 파내고 지하용 수로를 만들거나, 나무를 도려내어 관을 만드는 기술을 그들은 이미 터득하고 있었다. 


“이 욕조에서 왕녀들이 목욕을 했지요. 이는 일종의 의식용 욕조로 매우 복잡한 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왕녀들이 맨 몸으로 목욕을 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면 재미있을 것입니다.”


이 말을 하면서 노인은 누런 이를 드러내면서 비시시 웃었다. 양수장 밑에는 왕녀들이 목욕을 했다는 욕조가 있었다. 여러 개의 욕조들이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태양신에게 바치는 어떤 의식이 행해질 때 여인들은 이곳에서 먼저 몸을 깨끗이 하기 위해 목욕을 하였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마추픽추는 태양신의 처녀들, 즉 ‘아크야(aclla, 잉카제국에서 태양신을 주재하고 왕을 섬겼던 시녀)’를 위해 지은 것이라고도 하지요. 1560년 칼란차라는 신부의 기록에 의하면 두 명의 아우구스티노회 수도사가 잉카인에게 초대를 받고 빌카밤바로 갔는데, 수도사들은 순결성을 위협받는 시험을 받아야 했습니다. 잉카가 밤마다 숙소로 여인들을 보내 그들을 유혹했던 것이지요. 결과는 아무 효과도 없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발굴된 유골의 80%가 여자들의 유골인 점을 들어 빙엄 역시 이곳이 태양신의 처녀들-아크야를 위하여 지은 도시라고 기록하고 있지요. 이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 마추픽추가 아크야를 위한 주거지였다고 믿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수로를 타고 내려가니 둥그런 반원형의 건물이 보였다. 부드럽게 경사가 지고 약간 둥근 외벽은 쿠스코의 태양사원과 닮아있다. 태양신전이다. 활처럼 자연스럽게 굽은 외벽은 또 하나의 외벽으로 이어져 있다. 특별히 고운 화강암 마름돌만을 골라 매우 정성 들여 맞춘 벽은 최고 장인의 작품임에 틀림없다. 물이 흐르는 듯한 선, 마름돌의 균형 잡힌 배열, 가로줄의 점진적인 변화가 서로 결합되면서 놀라운 효과를 나타내고 있었다. 유럽의 그 어떤 대리석 사원보다 훨씬 부드럽고 자연미가 넘치는 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마추픽추 태양신전


모르타르를 전혀 쓰지 않은 덕분에 마름돌 사이에 보기 흉한 부분이 하나도 없다. 돌들이 마치 서로 맞물리기 위해 자란 것처럼 물림이 빈틈없이 정교하다. 지금까지 내가 보아왔던 석조 건축들-웅장한 로마의 건축물, 아름다운 인도의 타지마할, 불가사의한 피라미드 등과는 구별되는 자연미 넘치는 세계 최고의 석조 건축물이다. 세계의 어느 문명에서도 이렇게 거대한 바위들을 그토록 완벽하게 조립한 것은 없다고 한다. 이렇게 큰 바위들을 바퀴나 도르래도 없이 어떻게 옮기고 들어 올렸는지 여전히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모르타르를 전혀 쓰지 않은 잉카의 석벽


입구 아래쪽에는 둥근 구멍이 몇 개 나있고 돌 안을 빙글빙글 돌아서 안쪽으로 빠져 있었다. 빙엄은 이것을 ‘독사의 통로’라고 불렀다. 구멍은 돌 속에서 날카롭게 굴절하여 반대쪽으로 떨어지게 되어 있다. 여기에 돌을 넣으면 빙글빙글 돌아 반대쪽으로 떨어진다고 노인은 말했다. 그러나 지금은 넣을 수가 없단다. 돌이 막힐 수도 있으므로 금지되어 있다는 것.


태양신전 밑에는 여러 개의 제단들이 만들어져 있다. 이곳에서 미라들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왕의 무덤’이라고 부른다. 암석에 비스듬히 반쯤 막힌 삼각형의 석실이 있고, 중앙에  돌기둥이 묘석처럼 나와 있다. 벽에 있는 움푹한 곳에 미라를 모셨고, 2단의 커다란 제단에는 공물을 놓아두었다고 한다.


태양신전 밑에 있는 왕의 능묘


태양신전 옆으로는 2층으로 된 왕녀의 궁전이 연결된다. 왕녀의 궁전으로 돌아 들어가는 문 양쪽에는 구멍이 뚫려 있다. 내가 양손을 넣으며 사형을 집행한 곳이 아니야는 흉내를 냈더니 노인은 빙그레 웃으며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실은 문을 설치하기 위한 구멍이라고 했다. 


좁은 계단과 통로를 따라 걷는 느낌은 마치 마법의 성을 걷는 기분이다. 뭔가에 홀린 듯 계단을 타고 올라가니 완만한 지대가 나왔다. 아름다운 백색 화강암은 어른들의 키보다 더 큰 거석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신성한 광장(La plaza Sagada)'이다. 신성한 광장은 ‘신관의 집’, ‘세 개의 창문이 있는 신전’, ‘주신전’ 등으로 둘러 싸여 있다. 말 그대로 신성한 곳이다. 광장의 동쪽에는 세 개의 창문이 있는 신전이 있었다. 이는 잉카의 유적 가운데 매우 독특한 것이다. 세 개의 큰 창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창문 사이로 잉카의 계단식 밭이 찬란하게 다가왔다. 


세 개의 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풍경이 아름답다.


“페루의 고사에 의하면 최초의 잉카인 망코는 ‘내가 태어난 곳에 세 개의 창이 있는 석조 벽을 세우라’고 명령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곳이 최초 잉카의 탄생지가 되는 샘인데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잉카의 발상에 관한 전설은 탐푸토코라고 하는 세 개의 구멍에서 8명의 형제자매가 솟아 나오고, 그중 한 명이 제1대 황제 망코 카팍이 되어 쿠스코에서 잉카제국의 기초를 세웠다는 설이 전해지기도 하지만 이 역시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전설은 수많은 가설을 낳고, 가설은 모험심 많고, 의구심이 깊은 탐험가들에 의해 현실로 증명되기도 한다. 마법에 걸린 듯 세 개의 창문 사이로 밖을 내다보니 병풍처럼 둘러싸인 천혜의 절벽을 이룬 안데스의 계곡 사이로 우루밤바 강이 아득히 바라보였다. 그 놀라운 경치를 한 동안 바라보노라니 가벼운 현기증이 일어났다.       

   

태양을 묶어두었다는 인티우아타나     


그곳에서 한 계단 더 올라가니 유적에서 가장 높은 곳에 말뚝을 박아 놓은 것 같은 석조물이 나왔다. 인티우아타나(Inti Huatana)라는 해시계다. 


태양을 묶어 두었다는 인티우타나


“이것은 해시계 역할도 했지만 12월 21일, 태양이 기울면서 인간을 버리려고 하는 것 같은 동지가 오면, 사제는 천체가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태양을 이 돌에 붙들어 매는 의식을 이곳에서 진행했지요.”


높이 1.8m의 큰 돌을 깎아서 만든 해시계는 가운데 돌출한 각주가 36cm로 유적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인티라이미(동지) 때 태양이 돌다가 각주의 모서리에 연결한 대각선을 통과한다. 각주의 모서리는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다. 작은 돌이지만 어쩐지 정감이 갔다. 내 마음을 저 인티우아타나에 붙들어 매어볼까? 나는 두 팔을 한껏 벌려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마추픽추 위에 무한대로 펼쳐져 있는 하늘은 푸르고 높았다. 어쩐지 가슴이 후련하고 뻥 뚫린 것처럼 시원했다. 오, 태양의 신이여! 가련한 이 두 사람을 보살펴 주소서.  


인티우아타나 뒤쪽으로 올라가니 쪼개다 만 바위들이 무더기로 있었다. 채석장으로 쓰였던 곳이다.


“거대한 바위의 결을 따라 틈을 내고 나무로 만든 쐐기를 박아 물을 흘려 놓으면 나무가 부풀어 올라 바위가 서서히 쪼개지지요.”


쪼개다 만 거석 덩어리들


철기를 쓸 줄 몰랐던 당시에 나무나 돌 같은 단순한 도구를 이용하여 어떻게 이토록 치밀하고 완벽하게 돌을 다듬었는지 신기에 가까운 그들의 기술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우리는 인티 우아타나를 지나 젊은 봉우리를 향해 언덕을 조심스럽게 내려왔다. 광장에 야마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마추픽추 배후에 우뚝 솟아있는 우아이나 픽추는 ‘젊은 봉우리’ 답게 힘차게 하늘로 분기탱천하고 있다. 무언가 힘을 솟아나게 하는 기운이 서려 있다.


젊은 봉우리 우아이나픽추


“어떤 여성은 하늘로 우뚝 솟은 젊은 봉오리를 바라보면 성욕을 느끼기도 한다고 하더군요. 하하. 여러분은 저 봉오리를 보고 어떤 느낌이 드나요? 조금 있다가 자유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그때 희망자는 이 봉우리를 올라갈 수 있습니다. 왕복 2시간 정도 걸리는데 길이 가파르고 위험함으로 조심해야 합니다.”


우아이나픽추로 가는 입구에는 초가지붕을 덮은 건물이 있고, 그 옆으로 고사된 나무가 한그루 서 있었다. 바로 그 뒤에 사립문 같은 문 뒤 입구 오두막에서 젊은이들은 신고를 하고 우아이나픽추로 올라갔다. 봉우리에는 앞쪽의 달의 신전으로 가는 길이 있는데 현재는 통행금지라고 노인은 전했다.      


“여보, 나 저 봉우리에 올라가고 말 거예요!”     


새로운 곳에 대한 호기심이 불타고 있는 아내를 나는 다소 염려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물론 죽을힘을 다하여 올라가면 정상에 설 수는 있겠지만, 이틀간의 트레킹과 오늘 돌아본 유적지에서만도 우린 많은 힘을 이미 소모하여 급경사의 가파른 젊은 봉우리를 오르기에는 아무래도 무리였다. 내가 오르기에도 힘들 것 같은데… 사실 나는 아까부터 광장의 나무 그늘 아래 누워 쉬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한편으로는 우아이나픽추에 오르면 어떤 충만한 기(氣)를 받을 수도 있을 것만 같아 오르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했다. 나는 고집불통인 아내를 겨우 만류하며 콘도르 신전으로 내려갔다.               


콘도르 신전과 잉카의 감옥


노인은 입구가 3개인 귀족 거주 지구를 지나 콘도르의 신전으로 안내했다. 3개의 입구가 있는 집에는 직경 60cm 정도 되는 둥근돌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다. 돌절구로 사용한 것이라고 한다. 귀족의 거주 지역에서 밖으로 나와 올라가는 계단은 마치 미로와 같았다. 마추픽추에는 109개의 계단들이 있는데 이 계단은 특히 아름다웠다. 계단을 따라 걸어가는 아내의 모습이 먼 과거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잉카의 여인처럼 보였다.




‘콘도르의 신전’은 잉카의 상징인 콘도르를 본떠 만든 돌이 남쪽을 향해 새겨져 있다. 이 유적을 전체적으로 조망을 하면 콘도르 형태라고 한다. 퓨마, 뱀과 함께 콘도르는 잉카의 신앙을 대표하는 상징물이다. 콘도르 신전 반 지하에는 잉카의 감옥이 있다. 잉카제국에서는 ‘아마스아(훔치지 말라), 아마케아(게으름피우지 말라), 아마유아(거짓말 하지 말라)’라는 법도를 어긴 사람들에게는 무거운 형벌을 내렸다고 한다.


“이 법도를 어긴 자는 어두운 감옥에 가두었으며, 감옥에 독이 든 거미를 집어넣기도 했지요. 이 돌은 법도를 어긴 자에게 체벌을 주었던 곳인데, 손을 넣고 틀을 채우면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어요. 특히 아마케아(게으름 피우지 말라)의 반역 행위에 대해서는 최대의 형벌이 내려졌는데, 며칠 동안 음식물을 주지 않거나, 물을 주지 않았어요. 이 가파른 산에서 게으름을 피워 농사 시기를 놓치면 모두가 굶어 죽기 때문이지요.”


법도를 어긴 자에게 형벌을 가했다는 형틀과 콘도르 모형의 돌


구멍에 손을 넣어 보니 정말 섬뜩할 정도로 무서운 느낌이 들었다. 마치 로마에 있는 ‘진실의 입’과 같은 느낌이랄까? 게으름을 피운 자에 대한 노인의 말을 듣고 있노라니 갑자기 돌아가신 어머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어릴 적부터 우리 어머니는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 않는다’는 교훈을 철저하게 심어 주었다. 내가 동네 아이들과 노느라고 정신이 팔려 나에게 주어진 일을 하지 않으면 그날 저녁밥은 어김없이  굶어야 했다. 그러나 후에 이 교훈은 내가 인생을 살아가는 데 두고두고 가장 큰 교훈이 되어 주었다.     

     

마추픽추 잔디 위에 눕다     


“자, 이제 여러분과 헤어질 시간입니다. 젊은 봉우리를 오르든 아니면 태양의 문을 지나 잉카 처녀들의 묘지로 가든 여러분은 지금부터 자유입니다.”


노인은 역시 낮은 음성으로 작별 인사를 했다. 악수를 한 노인의 손이 따뜻했다. 몇 백 년이 지난 후에도 잉카의 뜨거운 피는 이렇게 흐르고 있었다. 거미줄처럼 흘러가는 수로처럼… 돌담 사이로 사라져 가는 노인의 뒷모습에서 옛 잉카 시대의 모습을 연상했다.



“오후 2시까지 푸엔테 루이나스 역, 엘 톨도 레스토랑으로 늦지 않게 도착하세요. 쿠스코로 가는 기차는 4시 20분에 출발합니다.”


어네스토는 자유 시간 이후에 만날 장소를 말하고 노인과 함께 사라져 갔다. 함께했던 일행들도 이곳에서 헤어졌다. 마리노가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미스터 초이, 우리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다시 만나요."

"오케이, 마리노, 인연인 닿으면 우리 다시 만나요."


심장이 좋지 않은 마리아가 섭섭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초이, 아내를 잘 보살피며 남은 여행도 잘하세요."

"네, 마리아도 건강 조심하고 멋진 여행되시길 바랍니다."


언제나 이별은 서글프다. 1박 2일 동안의 짧은 시간이지만 정든 그들과 헤어지기가 섭섭했다. 사라져 가는 사람들… 마추픽추를 중심으로 살았던 1만 명이나 되는 잉카인들은 어디로 사라져 버렸을까? 1911년 하이럼 빙엄이 황금의 도시 빌카밤바라고 믿었던 마추픽추에서는 황금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래서 탐험가들은 잉카인들이 더 깊숙한 곳에 빌카밤바를 건설했으리라고 추측하고 있다. 


잉카인들은 침략자들을 피하기 위해 더욱 깊숙한 곳으로 떠나면서, 마추픽추의 비밀을 지키기 위하여 태양의 처녀들과 걷지 못하는 노인들을 마추픽추 한쪽의 묘지에 묻었다고 한다. 위쪽에 있는 묘지에서 173구의 미라 중 150구가 여성이고, 22구가 노인이었다는 사실이 이 가설을 어느 정도 입증해 주고 있다. 


현지 가이드 노인과 헤어진 우리는 광장의 잔디밭으로 올라갔다. 광장 한 편에는 나무 한그루가 외로이 서 있어 그늘을 제공해 주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 나무를 가시나무라고 하는데 정확히 가시나무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 나무 그늘 잔디밭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누워서 잠을 자는 사람, 책을 읽거나, 편지를 쓰는 사람, 그냥 멍청히 앉아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사람…. 모두가 평화스럽고 편한 자세다. 나는 잔디밭에 그냥 눕고 싶었다. 


마추픽추 광장 잔디정원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여행자들


나는 아내와 함께 벌렁 누워 사지를 편하게 뻗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모든 시름이 사라지고 그저 평온했다. 늙은 봉오리와 젊은 봉오리 사이에 있는 유적지의 잔디밭에 누우니 마치 오래된 과거로 되돌아간 느낌이 들었다. 어린 시절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품에 안긴 느낌이랄까? 아내의 손을 잡으니 따스한 체온이 가만히 전달되어 왔다. 행복했다. 살아있다는 것은 이렇게 좋은 것이다. 마추픽추 유적이 주는 어떤 알 수 없는 기운과 태고의 느낌이 대지를 통해 피부로 전달되어 왔다. 


하늘엔 흰 구름이 둥둥 떠가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가? 

어쩐지 낯설지 않은 풍경 

먼 과거 세상에 나는 잉카의 후예였을까?     



마추픽추 잉카 유적지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니 조각구름들이 서서히 흘러갔다.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슬슬 눈이 감겨왔다. 그렇게 한참을 누워있다가 나는 그만 깜빡 잠이 들었나 보다.


“여보, 그만 일어나요?”

“응? 여기가 어디지?”

“등만 대면 잠을 자는 당신의 그 잠자는 솜씨는 알아주어야 해요.”

“어? 내가 잠이 들었나?”


시계를 보니 12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우뚝 솟아오른 젊은 봉우리가 나를 굽어보고 있었다.


“여보, 이제 슬슬 걸어 내려가는 것이 어때요? 역까지 걸어가려면 한 참을 가야 할 것 같던데….”

“그래야 할 것 같소. 그래도 여기서부터는 내려가는 길이니 걷는 것이 훨씬 수월하겠지.”


짐 보관소에서 배낭을 찾아 메고 우리는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내려갔다. 뱀처럼 구불구불한 이 길은 발견자 빙엄의 이름을 따서 ‘하이럼 빙엄 도로’라고 부른다. 도로는 열세 번이나 360도로 회전하며 굽이굽이 휘돌아 간다. 미니버스가 먼지를 일으키며 비포장도로를 지나갔다. 미니버스를 타면 20분이면 역에 당도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잉카의 길을 끝까지 걷기로 했다. 


우리는 도로를 따라가지 않고 중간중간 계단으로 만들어진 오솔길을 걸어 내려갔다. 밑으로 내려 갈수록 우루밤바 강물이 흘러가는 소리가 시원스럽게 들려왔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보이는 것은 울창한 나무한 산뿐이다. 그때 갑자기 두 명의 소년들이 오솔길을 뛰어 내려갔다. 이름만 들었던 ‘굿바이 보이’들이다. 마추픽추에서 버스가 출발할 때에 손을 흔들며 ‘굿바이’하고 인사를 하던 소년들이다. 그들은 버스가 역을 향해 출발할 때에 함께 뛰어서 내려갔다. 



버스는 커브를 따라 내려가고 소년은 숲 속의 지름길을 뛰어 내려갔다. 그리고 커브를 하나 돌 때마다 나타나서 버스를 통과하기를 기다렸다가 ‘굿바이’하고 소리를 지른다. 버스에 탄 사람들은 그때마다 바람처럼 달리는 소년들을 보면서 탄성을 지른다. 그리고 마침내 소년은 버스보다 먼저 밑에 도착을 하여 잠시 멈춘 버스에 올라 인사를 한다. 버스의 관광객들은 소년의 건각을 예찬하며 몇 푼의 헌금을 그에게 던져 준다. 인간 파발꾼 차스키의 후예들이라 그렇게 빠를까?


“느리지만 우리도 굿바이 소년이 되어볼까?”

“아서요. 그러다간 다쳐요!”


부리나케 뛰어가는 잉카의 소년 흉내를 내며 내가 달려갈 자세를 취하자 아내가 말렸다. 그러나 어쩐지 굿바이 소년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슬픔의 그늘이 떨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물줄기가 세차게 흘러내려가는 우루밤바 강을 따라 걸어갔다. 다리 위에서 잃어버린 공중도시 마추픽추를 바라보니 울창한 숲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과연 천혜의 요새다. 


밑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천혜의 요새 마추픽추


마추픽추 정문에서 약 2시간 걸어가니 푸엔테 루이나스 역이 나타났다. 오후 3시. 역 근처에는 레스토랑과 기념품점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여행자들로 제법 붐비고 있었다. 우리는 먼 과거의 잉카 시대에서 문득 현실로 돌아온 느낌이 들었다. 형형색색의 기념품을 진열한 가게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고, 선로를 따라 음식점과 카페들이 들어서 있었다.


‘엘 톨도’라는 레스토랑에서 우리는 잉카의 맥주 한잔을 마시며 늦은 점심을 먹었다. 아내와 나는 잉카 트레일을 무사히 마친 기념으로 축배의 잔을 들었다. 뜨거운 대낮에 오랫동안 걸은 뒤 마시는 잉카의 맥주 한 잔 맛이 그만이었다! 점심을 먹고 기념품점을 배회하다가 한국에서 온 여행자들을 만났다. 오랜만에 만난 한국인들이 너무 반가웠다. 15일간의 남미 패키지여행을 떠나온 여행자들이라고 했다.



"아니, 두 분만 이렇게 여행을 다니시다니 대단하십니다!"

"속 알 머리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하하."

"한국을 떠난 지 얼마나 되셨나요?"

"3개월이 거의 다 되어가고 있어요."

"피곤하지 않으세요? 우린 겨우 10일째인데 벌써 피곤해서 죽겠는데요."

"피곤하지요. 그러나 바쁜 패키지여행과는 달리 느긋하게 다니는 여유가 있어서 오히려 덜 피곤할지도 모르지요." 

“아하, 그렇기도 하겠군요.”


사실 그랬다. 패키지여행은 너무나 바쁘다. 더 쉬고 싶어도 짜인 일정 때문에 바삐 움직여야 한다. 그러나 둘만 다니는 자유여행은 여유가 있다. 쉬고 싶을 때 쉬고 느긋하게 여정을 잡을 수 있어서 오히려 패키지보다 덜 피곤할 수도 있다. 다만 교통, 숙소, 여행지를 예약하고 찾아다니는 일을 스스로 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어느 것이나 다 만족을 할 수 없다. 


우리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자고 하는 분이 있어 함께 포즈를 취했다. 그들은 버스를 타고 떠난다고 했다. 잠시 만남이었지만 열차시간이 다 되어 그들과 헤어지자니 순간 마음이 착잡해졌다. 아이들도 보고 싶고 아늑한 내 집의 침대와 거실도 그립다. 그러나 아직 갈 길이 멀다. 협궤열차는 빽빽 기적소리를 지르며 쿠스코를 향해 서서히 출발했다. 



"여보, 고마워요. 아픈 나를 이렇게 멋진 마추픽추까지 데리고 와 주어서요."

"하하, 당신이 더 고맙지. 아픈 당신이 함께해서 나도 이런 곳까지 올 수 있지 않겠소."


사실이 그랬다. 아마 내가 조기 은퇴를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직도 직장에 매달려 허덕이고 있었을 것이다. 죽기 전에 세계일주 여행을 하고 싶다는 아내의 소원을 쫓아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올 수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순전히 아내 덕분이었다. 내 손을 꼭 잡고 있던 아내가 이내 잠이 들었다. 나도 아내를 바라보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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