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연애와 결혼
“회사에 괜찮은 사람들 없어? 나 좀 소개해주라.”
“글쎄. 딱히 소개해줄 만한 사람이 생각이 안 나네. 그래도 네가 부탁하니까 다시 한번 눈 씻고 찾아봐야겠다! 내가 잘 좀 살펴볼게”
‘어이구, 너만 없냐. 나도 없는데.’
종종 친구들을 만나면, 회사 동기나 선배 중에 괜찮은 사람으로 소개팅을 해달라고 부탁하곤 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이 나이에 남자를 소개해 달라고 하는 것은 잘 되면 결혼까지도 생각할 수 있는, 그러니까 흔히 말하는 조건도 괜찮은 남자여야 했다.
남자 임직원이 80% 이상이니까 분명 괜찮은 사람이 있을 텐데, 인아씨는 알고 있는 회사사람들을 아무리 떠올려봐도 후보가 추려지지 않았다. 외모나 성격은 다들 무난한 것 같은데, 업무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이다 보니 진짜 성격도 잘 모르고, 집은 어디고, 학교는 어디를 나왔고, 전공은 무엇인지, 소개팅에 필요한 필수 스펙을 파악할 도리가 없으니 후보를 고르기가 당연히 어려울 수밖에. 동기든 선배든 소개해줬다가 잘 안되면 매일 얼굴 보는 사이에 괜히 서로 민망할 것도 같고.
기자단에서 신규 론칭 서비스의 광고촬영 현장을 취재 가는 날이었다. 회사 제품이었지만 광고담당 부서도 마케팅 부서도 아니었던 인아씨가 아는 광고는 TV나 잡지, 인터넷에서 소비자의 입장으로 본 게 전부다. 광고 모델로 나오는 연예인이 보고 싶다는 사심과 함께 광고는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진지한 호기심이 생겨 이번 취재를 지원했는데,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다행히 인아씨가 뽑혔다.
“엇, 안녕하세요? 그 신입사원?”
“아, 네 선배님이시네요. 안녕하세요?”
“이번 취재 지원했어요? 혹시 현빈 때문에?”
“네 겸사겸사. 하하하 재미있을 것 같아서. 선배님도 하지원 때문에?”
“하, 네 제가 시크릿가든을 너무 재미있게 봐가지고 완전 팬이 됐거든요. 예쁘기도 하고 또 연기도 잘하고.”
“저도 다 챙겨 봤잖아요. 너무 재미있었죠?”
“완전!”
눈을 제대로 뜨기 힘들 정도의 화려한 조명,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는 스텝들, 끊이지 않는 카메라 셔터소리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취재하라고 불러줬지만 이 역시 많은 이들이 숨 가쁘게 일하는 업무 현장. 눈치껏 한쪽 구석에서 촬영하는 모습, 광고업체 직원들, 우리 회사 담당자들을 지켜보며 인아씨와 대명 씨는 드라마이야기, 연예인 이야기, 회사이야기, 그리고 여기서 본 내용을 어떻게 기사로 써낼지 이야기하며 벌써 서너 시간을 서성였다.
“저 오늘 사무실 들어갔다가 퇴근해야 돼서 담당자한테 이야기하고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래요? 우리 선배들이 이런 날은 사무실 들어가는 거 아니라고 그랬는데. 이것도 엄연히 업무외출인데.”
“아, 그런가요? 제가 그런 팁이 없었네요. 그런데 저녁시간에 제가 담당하는 해외법인이랑 미팅이 있어서 어차피 들어가긴 해야 돼요.”
“그렇구나. 그럼 커피 한잔하고 들어가요. 오늘 고생했는데 한 기수라도 선배인 제가 살게요. 기사 어떻게 쓸지도 마저 이야기해야 되고.”
“아, 기사. 아까도 이야기해 놓고 기사 같이 써야 되는 걸 깜빡했네요.”
“편하고 좋은 업무외출이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니죠. 취재를 갔으면 기사를 써내라. 회사가 공짜는 없어요.”
“하하, 그러게요.”
조명 때문에 뜨겁기도 하고, 건조하기도 한 촬영장의 공기를 벗어나, 두 사람은 근처 커피숍에 들어갔다.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을 마시니 살 것 같았다.
“저 선배님, 친하지도 않은데 이런 부탁을 드려도 될지 모르겠어요.”
“뭔데요? 설마 기사 저 혼자 쓰라고요?”
“에이~그런 건 절대 아니고요.”
“그거 아니면? 친하지도 않은데 무슨 부탁을 하시려고?”
“하하 그러게요. 근데 친구들이 만날 때마다 자꾸만 소개팅을 시켜달라고 해서요.”
“아~ 남자를 소개해 달라?”
“제가 신입이라 저희 부서 말고는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데, 부서 분들을 소개팅 시켜주기에는 서로 부담스러울 것 같고, 또 누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기도 해서요. 혹시 선배님 부서에 괜찮은 분 없나요? 그래도 1년 정도 더 봤으니 저보단 아무래도 나을 것 같아서……좀 그렇긴 한데……한 번은 시켜줘야지 안 그러면 내내 시달릴 것 같아요.”
“저 어때요?”
“네? 선배님 본인요? 진짜요? 아싸! 몇 살이세요? 집은 어디? 참 여자친구 없는 거 맞죠?”
“우와! 바로 호구조사 들어오네. 이런 당돌한 신입사원을 봤나?”
“어머, 죄송합니다. 본인 어떠냐고 하시니까……”
“하하, 후배님 의외로 놀려먹는 재미가 있네요? 저는 됐고요. 부서에 괜찮은 선배 한 명 있는데 한번 물어볼게요.”
“오예! 진짜죠? 감사합니다! 소개팅 성사되면 제가 꼭 밥 한번 사겠습니다!”
“나도 오예! 밥 얻어먹게 생겼네! 전화번호 좀 알려줘 봐요.”
드라마로 이야기가 잘 통했던지 취재날 우연히 만난 인아씨와 대명 씨는 그 이후로도 가끔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미국 법인과의 회의가 늦어져 밤늦게 퇴근하던 인아씨. 삐~ 사원증을 찍고 나서 고개를 드는 찰나, 삐~반대편에서 사원증을 찍고 들어오는 대명 씨와 마주쳤다. 가끔 연락은 주고받았지만 얼굴 볼 일이 자주 없던 두 사람은, 어! 하며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잠깐 기다려봐요. 같이 퇴근해요!”
“네? 뭐라고요?”
“같이 가자고! 금방 올게요!”
숨을 헐레벌떡, 땀까지 삐질 흘려가면서 가방을 들고 나온 대명 씨였다.
“천천히 나오시지 뭘 그렇게 열심히 뛰어요?”
“안 기다리고 갔을까 봐!”
“네?”
“같이 가자는 말 못 듣고 그냥 퇴근했을까 봐, 같이 가려고 뛰어왔다고요.”
“아, 그럼 전화를 하시면 되지..”
“그러게. 전화를 하면 될 것을. 그동안 전화 한번 안 해봤네요.”
“소개팅 이후로는 딱히 할 일이 없었으니까…….”
“왜 할 일이 없어요? 할 일이 있어도 못한 거지!”
“메신저랑 카톡으로 종종 연락한 것 같은데요? 지난번 제 친구한테 좋은 선배 소개해주셔서 감사하다고도 하고.”
“아, 그러고 보니 밥 안 샀다! 밥!”
“아 맞다! 밥 사기로 했는데……선배님이 괜찮은 날 알려주세요.”
“오늘……? 이왕 이렇게 된 거 오늘 어때요? 나 안 그래도 배고파서 집에 가기 전에 뭐 좀 먹어야 될 것 같은데.”
“저녁 식사 안 하셨어요?...... 저는 집으로 바로 갈 생각이었어요. 시간 괜찮으니 그럼 오늘 밥 사겠습니다! 뭐 좋아하세요?”
“인아씨 좋아하는 거.”
“저는 싼 거 좋아하는데요. 특히 제가 살 때는요?”
“하하 솔직하시네요. 뭐든 괜찮아요. 배고프니까 일단 가요!”
그렇게 간단하게 밥을 먹고, 맥주 한잔을 마시며 요즘 왜 이렇게 바쁜지, 회사 일은 잘 적응하고 있는지, 동기들의 실수담, 회사 근처 맛집, 요즘 보는 드라마와 책 등 시시콜콜한 주제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말이 잘 통하고 유쾌한 사람이었다. 인아씨도 오랜만에 편안하게, 실컷 수다를 떨었다.
그날 밤 집으로 데려다주면서 대명 씨는 좋아한다고, 인아씨를 좋아한다고 고백했다. 몇 번 안 봤지만 사실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좋아했다고. 나 한번 만나봐 줄래요? 술기운 때문인지, 즐거웠던 수다 때문인지, 아니면 수줍게 떨리는 그 눈동자 때문인지 인아씨는 그 말이 싫지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연인이 되었고, 가끔 퇴근길 데이트를 즐기며, 어느덧 결혼까지 약속하게 되었다.
이제는 대리 진급을 앞둔 4년 차. 결혼준비를 하는 인아씨는 행복했다. 회사일도 많이 익숙해졌고, 작은 업무지만 도맡아서 진행해 볼 기회도 종종 주어졌다. 이렇게 저렇게 아이디어를 내서 부장님께 기획안을 가져가면 여전히 빨간 줄 투성이었지만, 몇 번의 수정과 보완을 거쳐 그 일들이 회사의 예산으로 착착 진행이 될 때, 수고했다는 한마디 칭찬을 들을 때, 그리고 연말 고과 평가에서 좋은 등급을 받았을 때, 이 회사에서 꼭 성공해야겠다 다짐을 하며, 일 이야기도 회사 이야기도 공유할 수 있는 같은 회사 사람과 결혼을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인아씨, 들었어? 인아씨 동기 중에 강민규 씨? 스페인으로 지역전문가 간다고 하더라.”
“네 제 동기예요. 아 그렇구나.!”
‘언제 그런 걸 선발했지? 나도 지원해 볼 걸……’ 연애하고 결혼 준비를 하느라 바빴지만 당연히 회사에서도 인정받고 싶었던 인아씨는 괜스레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결혼하고 나서도 해외연수를 갈 수 있을까? 아마 어렵겠지? 에잇, 그래도 평생을 같이 할 좋은 사람을 만났다는 것은 더 감사한 일이니까. 그렇게 아쉬운 마음은 마음 한구석에 접어두었다.
‘기회는 또 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