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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돌 Jan 14. 2021

실패라고 말하지 마

자괴감에 빠져들던 어느 날

진흙탕에 발이 빠진 듯 찐득하고 더러운 기억이 문득 떠올라 그 속에서 허덕이는 순간이 있다. 한참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때의 상황이 고스란히 재현되며 온몸에 힘이 빠지는 순간. 혈기왕성하던 20대, 모든 것이 내뜻대로 이뤄질 거라 자만하며 활개를 치던 그때, 공연과 무대라는 환상을 현실로 옮겨오며 겪었던 마찰은 아직도 가슴이 뻐근할 만큼 강한 충격으로 몸속에 남아있다. 그저 치기 어린 시절의 실수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 이후로 실패의 순간을 맞을 때마다 그 시절로 돌아가버리고 만다. 그때의 실수를 극복하지 못하고 또 반복하고 있구나. 그래서 나는 이 실패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구나.


허무와 공허함, 염세의 기운이 온몸을 감싸는 날이면 마음과 머리가 얼음처럼 굳어져 버린다. 이럴 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더 꼼짝할 수 없게 돼버리고 만다. 꺼져버린 컴퓨터처럼 작동을 멈춰버린 상태의 나를 그나마 사람답게 만들어주는 것은 남편이다. 닦고 조이고 기름칠하듯. 고장 난 나를 어떻게든 고쳐내고 움직이게 한다. 이런 표현을 남편이 본다면 기겁하겠지만, 나에게 남편은 그런 존재다. 나를 살게 하고, 숨 쉬게 하는. 살아갈 수 있는 온기를 가득 채워주는 사람이다.


자연임신도 배란일 주기 조절도 인공수정도 시험관 시술도. 모두 모두 실패로 돌아가 가슴이 답답하던 어느 날. 좋아하는 영화를 보다 과거의 한 순간이 떠올라, '나는 원하는 직업도 가정도 가질 수 없는 건가'라는 생각에 울컥 눈물이 차오르던 순간. 소파에 널브러져 엉망진창 와장창의 기분으로 20년 전의 실수를 들먹이며 실패를 입 밖으로 내뱉아 버렸다. 실패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삶이 아닐까 자책하고 말았다. 그 말을 듣던 남편은 정색을 하며 나를 또 살린다.


'실패라고 말하지 마.

지금 내 옆에 니가 있고, 내가 있고, 우리를 만들어 준 과거가 있는데, 모두를 싸잡아 실패라고 말하지 마.'


그래. 니 말이 맞아. 모두가 다 실패는 아니야. 원하는 이상을 이루지 못한 건 맞지만, 누구나 넘어지고 일어나는 법이고 그 과정이야말로 삶인 거니까. 그렇게 또 남편은 나를 일으켜 주었다. 꼬물꼬물 다시 시작할 기운을 주고 뭐라도 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어쩌면 그 말을 듣고 싶어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말인지도 모르겠다. 아닌 척 하지만, 비임신이라는 말은 들을 때마다 가슴이 철렁하는 아픈 말이니까.


실수건 실패건 구렁텅이에 같이 빠져있는 단어들을 의식적으로 되뇔 필요는 없다. 내가 원치 않아도 언젠가는 또 나를 덮칠 기운들이니 굳이 앞장서서 마중 나갈 필요는 없는 거다. 이유 없는 무기력이라고 말했지만 이유가 없지 않다. 그렇기에 또 이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글을 쓴다. 참 다행이다. 어둡지 않게 살도록 해주는 남편이 있어서.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공간이 있어서. 실패해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삶이라는 시간이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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