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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lna Jan 27. 2022

스스로 선택한다는 것.

#옷소매붉은끝동 #뒤늦게 #끄적거리는 #감상문

옷소매 붉은 끝동이 끝났다. 오랜만에 아주 몰입해서 본 드라마였다.

아주 긴 여운을 붙잡고 있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선택한 대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정말 내 스스로 선택하고, 나의 선택대로 내 삶을 꾸리고 있는 걸까?



0.

산이의 입장에서 옷소매 붉은 끝동을 보면 이야기는 그의 일대기에 가깝다.

왕손으로 태어난 산이는 고통스러운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도 백성을 생각하는 임금이 되겠다는 의지를 굳게 다진다.


산이의 길에 나타난 덕임이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위안이다.

언젠가 산이가 말했던 것처럼 내가 산이였더라도

나를 믿어주고, 기다려주고, 웃게 해 주며, 구해주기까지 하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 같다.


하지만 덕임이의 입장에서 드라마를 살펴보면, 이야기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덕임의 입장에서 이야기는, 그녀가 스스로 ‘선택’ 한 것과 선택하지 '않은' 것 사이의 간극을 그리고 있다.



1. 그녀가 선택한 것.


필사 모임에 왜 복연이와 영희도 끼워주었으냐는 경희의 물음에 덕임이는 웃으며 대답한다.

궁안에서는 내가 나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고.

사소한 거라도 좋으니 자신은 선택이란 걸 하며 살고 싶다고.


놀랍게도 덕임이는 스스로 선택한 다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이다.

하루 종일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는 궁녀이지만 덕임이는 자신의 역할을 즐겁고 성실히 수행한다.

여관으로서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지기로 한 것은 그녀가 직접 ‘선택’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덕임이는 선택에 따르는 부차적인 노력이나 고됨 역시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고 여긴다.


그것 말고도 그녀가 스스로 선택한 것은 많다.

필사일이나 전기수 노릇을 하여 돈을 번 것, 오빠를 찾고 그의  과거 시험을 돕고자 한 것 모두 그녀가 선택한 것이다.

그래서 고된 하루에도 덕임이는 자주 웃고 행복하다.

남들이 하찮게 보고 소박하다 말할 지라도

자신이 선택한 것을 위해 노력하고 그것이 만족스럽다 여길 줄 알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덕임이는 궁궐이라는 상황 속에서도  

‘내’가 한 선택으로 나만의 작은 세계를 꾸미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주체적인 그녀는 그 작은 세계 속에서 꽤나 훌륭히 중심을 잡고 살고 있었다.



2. 내 선택과 상관없는 상황에 화가 난다.


극 중에서는 덕임이가 투덜거리거나 화를 내는 장면이 종종 등장하는데 대부분 그녀가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상황들 때문이다.

덕임에게 홍덕로가 궁녀의 마음 따위 누가 궁금해하느냐 말하자 덕임은 대단히 화난 표정을 짓는다.

불쾌한 계례식을 마친 뒤에도 화를 낸다. 누가 후궁이라도 되고 싶다 했느냐고, 왜 자기들 마음대로 이러쿵저러쿵 난리냐고.


그녀가 직접 선택하지 않은 외부의 상황들이 덕임의 세계를 흔들려고 했기 때문이다.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의 세계에서 두발 굳건히 버티고 서 있는 덕임은 그 세계를 위협하는 외부의 상황에 대단히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것은 그녀가 대단히 현명하고 또 현실적인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흔드는 밖의 것들이 아무리 엄청나고 매력적인 것들이라도 그녀는 쉬이 넘어가지 않는다.

그런 것들을 선택했을 때 함께 올 수 있는 폭풍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고

그런 것들보다  작아 보일지언정, 그래도 소중한 다른 것들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덕임이는 수많은 유혹들을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작지만 충분한 행복을 지키려고 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산이를 주군으로 모시고 충심으로 받들기로 한 것은 분명 덕임이가 선택한 것이었다

할아버지에게 호되게 맞으면서도 고통을 참아내는 그를  알게 되었고

그럼에도  훌륭한 왕이 되고 싶다, 많은 백성들을 구하고 싶다 말하는 그의 의지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덕임이는 산이의 충직한 심복이 되었고 약속한 대로 그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 일들에 대해 덕임이는 산에게 대가를 바라지 않았다. 그녀가 선택한 거니까.

그녀가 바란 것이 있다면 지금처럼 성실히 일하며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고픈 변함없는 일상이었다.


하지만 산이가 자신을 사랑하게 된 것은 그녀도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던 것 같다.

덕임이도 바보가 아닌데, 표현하는 산이의 마음을 몰랐을 리 없다.

하지만 덕임의 세계에서 산의 마음은  순수하게 받아들이기 너무 엄청난 일이다.


덕임이는 산이의 마음을 받게 되면,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될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이 부분이 이 드라마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라고 생각하는데

궁녀인 덕임이 산의 마음을 거절하는 ‘선택’을 하는 것이 생소하면서도

자신의 세계를 지키고 싶다는 마음이 정말 잘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화가 나 서고로 찾아온 산에게

당신은 일상에 하찮은 것 하나를 더하는 것일지 몰라도

나는 내 세계를 모두 흔들리고, 내 인생을 당신에게 모두 내어주면서도 나는 온전히 받지 못하지 않느냐 말했던 것처럼.


그래서 스스로를 잃게 될까 봐 너무 두렵다는 건  덕임이가 스스로 ‘선택’ 하지 않은 상황에 휩쓸려 스스로의 중심을 잃게 될까 봐 두렵다는 말일 것이다.


그렇다면 덕임이는 산이를 사랑하지 않은 걸까?

할 수만 있다면 덕임이는 산이를 끝까지 왕으로만 모시고 싶었겠지만 사람의 마음이 참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서 그녀도 산이를 사랑하게 된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더 고통스럽고 힘겨운 것이다.


그를 사랑하지만 그의 마음을 받았을 때 달라질 내 삶을 너무 잘 안다.

그래서 끝까지 그의 마음을 거부하려 했지만,  다른 후궁에게 찾아가는 그의 뒷모습을 씁쓸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서상궁과의 대화에서 덕임이는 울먹거리며 말한다.


난 후궁이 되고 싶지 않은데 왜 후궁이 돼라 하느냐고

저하가 소중하지만, 나 자신이 제일 소중하니, 절대로 나 자신을 고통 속에 몰아넣지 않을 거라고.


이 말이야 말로, 덕임이의 의지를 가장 잘 드러낸 말이 아닌가 싶다.

내가 한 선택, 내 삶, 내 의지, 내 주체성이 나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4. 결국 덕임이는 산이를 선택했다.


산이의 입장에서야  덕임이의 마음이 아리송하고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는 것 같이 느껴졌을 수도 있겠지만

덕임이는 어쨌든 산이와 함께 하기를 택했다.  

다른 것들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었다. 산이 역시 그녀가 사랑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산이와 함께하는 짧은 시간 동안 그녀는 행복하기도 했고 좌절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산이를 선택한 것 역시 자신의 선택이었고, 그에 수반되는 수많은 책임과 결과들을 짊어지려 했다.

아이를 임신했을 때 찾아오지 않은 산이에게 섭섭하다 말하지 않은 것도

영희의 죽음을 알리지 않은 산이를 원망하지 않은 것도 다 그 때문일 것이다.



5.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진다는 것.


드라마에는 덕임이 외에도 '내'가 스스로 선택하고자 하는 수많은 캐릭터들이 많이 나온다. 덕임이를 살려준 월혜가 그랬고 죽을 줄 알면서도 사랑하는 이를 선택한 영희가 그랬다. 그동안 주로 수동적으로 그려졌던 궁녀들의 이야기를 보여주면서, 스스로 선택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만드는 것 같다.


우리는 늘 선택하며 살아간다.

점심 메뉴처럼 매일 하는 선택도 있고 여름 휴가지처럼 일 년에 한 번쯤 하는 선택도 있다.

조금 더 중요한 선택도 있고, 어떤 것을 선택하든 결과가 크게 달라지지 않는 것도 있다.

혼자 골머리를 썩으며 선택한 것도 있고, 주변 사람들의 의견에 선택한 것도 있다.


분명한 것은 어떤 것을 선택하더라도, 내가 스스로 내 의지와 주체성으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외부 상황의 흐름 속에서도 마지막 선택은 '내 것' 이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내가 선택한 것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고 그 선택으로 인해 주어진 행복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혹은 그 선택으로 인해 내게 지워지는 책임감이나 기회비용 역시 기꺼이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덕임이와 친구들은 정말 멋진 인물들임에 틀림없다.

나는 저들처럼 내 뜻대로 선택하고 또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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